베이징과 리야드, 낙타의 실용외교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은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이지만,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여전히 무신론을 주창하는 중국은 물질적·사상적으로 동떨어진 나라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두 나라는 경제·문화·종교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군사 분야에서도 때때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랑스의 대형 할인매장 ‘카르푸’ 옆에 최근 오픈한 거대한 쇼핑몰 ‘차이나마트’의 네온사인이 고속도로를 따라 비치고 있다. 입점한 상점은 중화제국에서 직수입한 수많은 상품을 진열해놓고 있다. 중국 <신화통신>은 “수천 명의 중국 무슬림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 무슬림 선발대 322명이 간쑤성을 출발해 리야드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6월, 양국의 과학자들은 단봉낙타의 DNA 해독을 끝냈고,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존재하지 않는 낙타 종인 쌍봉낙타 37마리를 기증했다. 이런 이국적인 공생의 상징으로, 리야드의 중국 식당 ‘미라지’는 베이징식 낙타고기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은 양국의 놀라운 친선관계를 보여주는데, 특히 경제 부문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2009년, 중국은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사우디산 석유의 최대 수입국이 됐다. 중국은 2000년 4%였던 사우디산 석유 수입을 현재 11.3%까지 확대했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보다 더 많은 4륜구동 지프와 대형차를 사우디 왕국에 판매했다.
여기서 우리는 동맹관계의 반전, 즉 워싱턴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베이징과 리야드의 관계를 엿보게 된다. 일부 논평가는 개의치 않고 이런 사태를 즐기거나 우려를 표명하면서 한발 앞서가고 있다. 사우디 외무장관 사우드 알파이잘의 자문위원 래드 크리물리는 논평을 통해 “우리도 워싱턴이 중국과 우리 관계에 대해 일부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와 미국의 중요한 전략적 관계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믿기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이란 핵 문제 해결 때처럼, 주로 “우방인 미국의 요구로 리야드가 베이징과 중재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사우디 왕국의 최고 경제 전문가 중 한 명인 사우디프랑시은행의 존 스파키아나키스는 이런 주장에 공감하며 “베이징과 리야드의 관계는 순수한 경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미국보다 사우디에 수출을 많이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국보다 더 많이 수출하고 있다.(1) 사우디인들도 중국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교류 급증… “경제에 국한” 선긋기
미국 등 서구에서는 열강으로 급부상한 중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2003년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소설 <석유 루트를 보호하기 위한 전투>에서는 중국을 두려워하는 열강 제국들이 석유 루트를 봉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2) 실제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 석유관이 통과하는 말라카해협에 대한 서구의 봉쇄 가능성을 내다보기도 한다. 중국 언론은 석유 배럴당 가격이 150달러를 웃돌 당시, 워싱턴이 중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가격에 개입했다고 봤다.
이 때문에 베이징은 사우디와의 무역협정에 만족하지 않고, 탄화수소 부문에 상호 투자를 확장했다. 사우디 왕국의 탄화수소 국영회사 아람코는 미국의 세계 최대 석유회사 엑손모빌 및 중국 국영 석유회사인 시노펙과 손잡고 중국 푸젠성에 하루 24만 배럴을 생산할 수 있는 정유공장을 설립했다. 또 다른 사우디 기초산업 공사 사빅은 시노펙과 함께 최근 대형 석유화학단지를 톈진에 조성해 가동하고 있다. 사우디에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투자한 중국 기업들은 최초로 가스 탐사 승인을 획득했다.
사우디는 주로 중국에 석유와 석유화학 품목을 수출하고 있고, 중국은 고속철도 건설부터 담수·알루미늄·시멘트 공장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다양한 부문에서 사우디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사우디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나 일부 사우디 극빈층이 저렴한 중국산(직물·의류·장난감 등)을 이용하는 고객이지만, 이 상품들이 아프리카에서처럼 적대감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현지의 경쟁 상품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컴퓨터와 휴대전화, 그리고 자동차에서 굴착기에 이르기까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완성품 시장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중국 기업은 공격적으로 사우디의 공공 노동시장과 건축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 기업은 프랑스를 따돌리고 메카∼메디나 구간의 테제베(TGV) 공사를 수주할 뻔했다. 중국 기업이 경쟁력만 갖춘 것이 아니라, 사우디의 정책 결정권자 및 왕족 일가와 밀접한 친분을 쌓는 능력도 갖췄음을 보여준 셈이다. 이들은 값싼 인력을 직접 중국에서 들여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지 사우디 사업가의 말을 빌려 주사우디 중국대사관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건축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상시 준비 중인 노동자만 4만 명에 달했다.
동전은 양면이 있다. 지난해 10월, 메카 전철공사(지난해 11월 개통) 현장에 투입된 중국 노동자들은 몇 달 만에 다시 두 번째 시위를 벌이며 차량과 유리창을 파손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45℃를 웃도는 열약한 노동조건에 반발했다.(3) 물론 사우디 당국이 이를 좋아할 리 만무였지만, 여타 건설현장들도 공사 기간을 못 지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건물을 완공했다. 이따금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일도 있다. 이를테면 근사한 차이나마트의 신축 매장에 입점한 한 상점은 카탈로그도 없이 중국어로 된 설명서만 갖춘 채 금고를 판매하고 있다. 한편 가격 파괴는 그 대가를 치렀다. 중국 언론은 “메카 전철 프로젝트가 40억 위안(약 6억 달러)의 적자를 내, 중국 시공사와 사우디 당국 간에 법적 분쟁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4)
미국 견제 의식한 제스처 성격
그런데도 중국은 기록적인 기간 안에 중동 전체로 발판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대중동 무역 규모는 2004년 370억 달러에서 2009년 1100억 달러로 급증했다. 2004년 이후 양국의 정치 지도자, 기업가, 시민사회 대표들은 정기적으로 ‘시노-아랍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양국 간에 문화 교류가 확대되면서, 중국은 아랍에 자국의 TV 뉴스를 송출해 언제라도 스트리밍해서 볼 수 있게 했다.(5) <신화통신>은 리야드를 비롯해 대부분의 아랍 수도에 상주하고 있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도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현재 중국은 이런 얄팍한 프로필을 상술로 이용하고 있다. 사우디 외무부 장관의 동생이자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에 맞서 항쟁을 주도했던 전직 정보부장 투르키 알파이잘 왕자는 자신을 “일개 시민”이라 지칭하며 미국에서 강연하고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사우디 왕족 중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미국과 우리의 관계보다 단순하다. 중국에는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로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내부의 정치적 견해차 때문에 우리가 볼모로 잡히는 일은 없다”고 했다. 9·11 테러 때, 반사우디 캠페인을 몸소 체험했던 전직 주미 사우디 대사였던 그가 하는 말이니 결코 가벼운 발언이 아니다. 다르푸르 문제에서처럼, 리야드와 베이징은 많은 국제 문제에 대해 내정간섭 반대와 국가의 주권 존중을 주장하거나, 인권존중을 주장하는 서방외교에 대해선 순전히 기하학적 변수를 띤 기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조롱하며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공격적 진출… 일부 잡음도
표면상 양국의 신뢰가 드러나진 않지만, 신뢰의 밑바탕에는 첩보소설을 방불케 하는 에피소드가 자리하고 있다. 1985년 2월, 이란-이라크전이 한창일 때, 이라크는 미사일로 이웃 나라의 도시와 유전 등을 공격해 사우디 유조선에 타격을 줬다. 사우디 정부는 사담 후세인 정권과 아무런 협상도 할 수 없어 불안했다. 파드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미사일을 확보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반발을 우려했다. 이스라엘 의회가 이미 투표를 통해 어렵게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6)를 사우디 왕국에 인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이건은 파드의 요청을 거부했다. 파드가 누굴 찾아갔을까? 당시 주워싱턴 사우디 대사관에 근무했고 현재 반다르 벤 술탄 왕자가 주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안보회의’의 사무차장인 리합 마수드는 “우리가 소련을 찾아갔을 수도 있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불렀다. 그래서 우리와 전혀 외교관계가 없는 중국을 택했다”고 해명했다.
이런 민감하고 기밀을 요하는 임무는 국방장관의 아들이자 주워싱턴 사우디 대사인 반다르 왕자가 도맡았다. 그는 워싱턴에서 은밀히 중국 외교관들과 접촉했다. 사우디는 경제사절단을 가장해 혹은 실제 군사 임무를 핑계로, 홍콩 호텔에서 중국과 비밀 회동을 하고, 계약 기일 등을 조율해, 1986년 12월 마침내 사정거리가 3천km를 넘고 이론적으로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서방에서 일명 ‘중거리 탄도미사일’(CSS-2)로 불리는 동펭3 미사일 50여 기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배들이 장비 운송을 맡았다(미국을 속이기 위해 행선지를 바그다드로 정했다). 그리고 사우디 인력은 신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미국과 달리 정치권에 압력 없어
하지만 1988년 3월 중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며 핵 분야에 야망이 없음을 확인시키자 폭풍이 진정됐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사우디는 아주 중요한 시점에 중국이 자신의 편을 들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중국은 미국의 ‘민감한’ 자국 로켓 사찰을 거부해준 사우디에 감사했다.
중국과 사우디 간의 군사관계는 항상 은밀하게 유지되고 있다. 사우디가 중국에서 구입한 장비라야 고작 2008년에 구입한 대포 부품이 전부인 것처럼 알려졌지만, 항간에는 사우디가 정기적으로 중거리 탄도미사일(CSS-5와 CSS-6)을 구입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사우디가 중국의 도움과 함께, 역사적·전략적으로 또 다른 사우디 왕국의 동맹국인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설계한 군사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8) 미국 네오콘(신보수자)의 환상을 조장하고 있다.
첩보전 방불케 한 비밀외교 전사
미사일 거래가 1990년 양국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는 길을 터준 데 반해, 대만과는 외교 단절로 이어졌다.(9) 리야드가 뒤늦게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에 동참한 것이다. 사우디 상공회의소의 압둘 카림 야콥 행정국장은 당시 “사우디의 입장에서는 자국이 서방의 영원한 동맹국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서, 좀더 균형 잡힌 행보가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을 선택한 것은 훌륭했다”고 했다.
걸프전(1990~91) 때, 중국은 전쟁을 채택한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에 투표하지 않았고, 반 사담 후세인 전선에서 날선 대립각을 세우던 사우디와 냉전기를 맞았다. 이들의 관계가 거대한 도약을 하기까지는 몇 해가 걸렸다. 한편 2006년 압둘라 국왕은 권좌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인도·말레이시아·파키스탄 등을 차례로 방문하며 첫 아시아 공식 순방에 나섰다. 사우디 국가원수의 첫 베이징 방문이었다. 방문은 철저히 준비됐다. 25명의 시민사회 대표단에는 중국계 인사 5명이 포함됐다. 2006년 4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도 일주일간 리야드를 방문해, 국가자문위원회(Majlis al-Shura)에서 연설하는 등 흔치 않은 특권을 누리며 수많은 협정을 체결했다. 그중 하나가 사우디 왕국에 중국 한의학을 도입시킨 것이다.
한 지식인은 리야드 사람들이 “중국의 문화, 만리장성, 올림픽 유치 등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수많은 사우디인이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미국을 증오하는 반면, 중국의 성공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일부 서구적 사고를 지닌 중국인들은 나약한 우리와 아랍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쌍방의 감정이 같지 않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현재 수백만의 사우디 젊은이가 “중국에 가서 배우라!”던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대로 중화제국에서 유학하고 있다.
리야드는 중국에 우호적인 자국의 이미지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2006년 여름 쓰촨성 지진 당시, 사우디 왕국은 4천만 유로의 구호성금을 내며 중국에서 최대 구호성금을 낸 국가로 언론에 집중 소개됐다. 이어 상하이 국제엑스포 때, 화려하게 설계된 사우디관은 최대 방문객이 몰린 장소 중 하나였다. 관에 설치한 달 모양의 거대한 배 갑판에는 종려나무를 심어 공중에 매달린 정원, 일종의 사막의 오아시스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실크로드를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크로드에는 양국이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수많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이란의 핵 문제도 해결하기 힘든 과제다. 몇 해 전부터 중국은 이란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이란은 사우디나 앙골라와는 격차가 많이 나긴 해도, 중국의 세 번째 석유 공급국이다). 중국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있고, 이란에서의 중국 무역은 전 분야에 걸쳐 활성화돼 있다. 2009년 300억 달러였던 중국의 교역량은 2015년에는 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베이징이 테헤란에 대한 모든 제재 조치 확대를 꺼리는 까닭도 그래서다. 이에 지난해 5월 사우디 외무장관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고, 미국이 여러 비밀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해 몇 달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유엔 안보리는 지난해 6월 9일 중국으로부터 안보리 결의안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확보하게 된다. 사우디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란이 중국에 석유 공급을 중단할 경우 사우디가 책임지겠다는 보장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유엔 결의안을 준수했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제재 조치 확대에는 반대하며, 심지어 이란에서 철수한 서구 기업들을 대신했다.
1차 걸프전 땐 냉전기 맞기도
사우디는 이란이 군사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다. 사우디 현지인들은 테헤란이 핵무기 획득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두려움은, 사람들이 말은 않지만, 미국과 사우디 간의 급격한 관계 변화에 기인한다. 워싱턴은 왜 아랍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핵을 보유한 테헤란과 화목을 도모하지 않을까? 투르키 알파이잘 왕자는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란과 미국 때문에 우리 관심사가 묻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핵을 보유한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사태를 이 지경으로 어렵게 만든 이란 대통령 “아마디네자드를 지켜주는 신께 감사한다”며 조소했다.
이런 우여곡절이 베이징과 리야드의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아니지만, 사우디에서 중국의 행보는 신중해졌다. 중국이 제3세계, 특히 중동 지역 혁명운동을 지원하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1960년대, 알제리와 함께 야세르 아라파트가 주도하던 무장단체 파타를 지원한 첫 국가가 중국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제 중국은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선언을 선호하며,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갈등에 강력한 개입을 삼가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1990년대 이스라엘과의 군사협력을 긴밀한 관계로 발전시켰다. 양국의 협력관계는 2000년 7월 이스라엘이 조기경보시스템이 장착된 팔콘 레이더를 중국에 판매하는 데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때까지 지속됐다.(10) 한 중국 언론인은 “사우디 주재 중국 언론은 친이스라엘과 친아랍 두 시각으로 나뉘어 취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란 핵, 양국 관계의 복병
2004년,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평화협상을 위한 정상회담(유럽연합·유엔·미국·러시아)에 초대받지 못한 중국은 중동에 특사를 파견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역할은 미비했다. 중국은 처음으로 다르푸르 다국적군과 특히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UNIFIL)에 350명가량을 파병했다. 또한 중국이 2006년 1천여 명을 추가 파병하겠다고 제안하며 이를 빌미로 레바논 갈등에 더 깊숙이 관여하자, 프랑스와 미국은 미래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11)
사우디 지도부는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미국이 쿠웨이트의 안전을 보장했던 것처럼, 중국은 자신들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럼 앞날은 어떻게 될까? 2008년 12월, 중국은 자국의 유조선과 수에즈운하를 통해 지중해로 가는 수출품을 보호하기 위해 소말리아 해역에 군함 몇 척을 선발대로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3월, 이 군함 중 두 척이 아부다비 자이드 항구에 정박했다.
지역 언론은 중국 선박이 인도양을 항해한 것이 15세기 중반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명나라 때 무슬림 신자였던 중국 장군 정화는 황제의 선단을 이끌고 1405∼33년 호르무즈해협, 홍해, 아프리카 동부 해안 등을 항해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아프리카 일주 항해는 물론이고 서인도제도까지 모험 항해를 했다고 한다.(12) 사우디의 한 지식인은 이런 에피소드를 꺼내며, “중국이 황금기를 되찾아 사우디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대면해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란다”고 했다.
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브라질·중국·인도가 형성한 브릭스(BRICs)에 가입을 신청하기도 했다.
(2) Ben Simpfendorfer, <The New Silk Road>, Palgrave Macmillan, New York, 2009 참조. 또 John Garver, Flynt Leverettt, Hilary Mann Leveret의 공동 저서 <Moving (Slightly) Closer to Iran>, China’s Shifting Calculus 참조.
(3) 사우디 일간 <아랍 뉴스>, 2010년 10월 13일.
(4) <위클리 타임스>, 베이징, 2010년 11월 4일.
(5) 웹사이트 http://arabic.cntv.cn/01/index.shtml.
(6) 올리비에 다라주, ‘군사협력 책임을 위한 편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85년 1월호 참조.
(7) David B. Ottaway, <The King’s Messenger: Prince Bandar Bin Sultan and America’s Tangled Relationships with Saudi Arabia>, Walker & Company, New York, 2008.
(8) <워싱턴 포스트> 기자 제프 스타인의 블로그에 게재된 기사 ‘Former CIA analyst alleges China-Sauid nuclear deal’, 2010년 6월 7일 참조.
(9) 다른 국가에서처럼, 대만은 여전히 리야드에서 왕성한 무역활동을 펼치고 있다.
(10) 이자벨 생메자르, ‘인도의 이상한 새 친구, 이스라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1월호 참조.
(11) International Crisis Group, <Growing Role in UN Peacekeeping>, Bruxelles, 2009년 4월 17일.
(12) 가뱅 망지, <1421년, 중국이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 Intervalles, 파리, 2007 참조.
[박스기사] 양국 관계 물꼬 튼 건 ‘성지순례’
젊은 압둘 카림 야콥은 상공회의소 행정국장으로서, 특히 중국과의 관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양국 관계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그는 사우디 국적을 지녔지만 중국계다. 1949년 마오쩌둥의 군대가 진군할 때, 수백 명의 중국계 무슬림은 대만보다는 사우디 이민을 선호했다. 메카와 메디나에는 1930년대에 이미 폭력과 전쟁을 피해 정착한 동투르키스탄(현 신장) 출신 중국계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무슬림 성지순례 하지(Hajj) 외교’를 통해 중국과 사우디의 관계를 맺어준 것은 종교다. 1955년 수십 명의 신생 독립국가 수장들이 회동한 인도네시아 반둥회의는 비동맹 외교를 탄생시켰다. 이때 사우디 파이잘 왕세자(추후 국왕이 됨)와 중국 외무장관 저우언라이는 중국계 무슬림의 사우디 성지순례 허락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매년 수십 명의 무슬림이 1966년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문화혁명 여파로 성지순례 행렬의 맥이 끊어졌다.
양국 관계가 악화된 것은 사우디가 대만과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1960∼70년대 장제스가 창립한 세계 반공산주의 동맹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극우파 ‘신질서’(Ordre Nouveau)와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비델라 등이 주도하는 전체주의 단체들이 이 동맹에 합류했다. 중국계 사우디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전복 행위에도 가담했다.
압둘 카림 야콥 행정국장은 “1980년대 초반부터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우디와의 관계 정상화를 꾀해왔다”며 “중국은 다시 한번 ‘하지 외교’를 이용해 중국계 무슬림에게 중국이 종교에 반감이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우디에 접근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1981년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정상회담 때, 사우디 파드 국왕과 중국 지도자들의 회동이 있었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1979년 성지순례를 정례화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85년, 중국 사절단이 리야드를 처음 공식 방문하며 정부가 성지순례를 직접 주관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순례자 수가 2천 명에서 2009년 1만2700명으로, 그리고 2010년에는 1만3500명으로 증가했다. 중국의 베이징, 우루무치, 란저우, 인촨, 쿤밍 등에는 메카행 직항편이 개설됐다. 중국 쪽에서 보면, 2009년 여름 신장위구르 유혈 사태 때, 중국은 이같은 정치적 전략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사우디 정부가 유혈 사태에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우디 언론조차 이 사건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앙카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슬람권 국가들처럼 사우디도 침묵한 것이다. 외무장관 사우드 알파이잘의 자문위원 래드 크리물리는 “훌륭한 무슬림은 중국에서든 다른 나라에서든 훌륭한 시민이어야 한다. 우리는 타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으며, 우리 또한 타국이 우리 내정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중국과 공유하는 원칙이다”라고 했다.
베이징은 ‘무슬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공식 집계된 중국의 무슬림 수만 2천만 명에 달하지만, 일부 사우디 연구원들은 그 수가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무슬림은 10여 민족으로 나뉘어 있으며, 터키권의 위구르족과 후이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정부에 대한 반발이 다른 민족보다 상대적으로 적었던 후이족은 중국에서 종교 때문에 소수민족으로 규정된 유일한 민족이다. 후이족은 전설적인 실크로드 시대 때 중국에 정착한 아랍 상인들의 후손이다. 중국은 드러내고 이들을 ‘가교역’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중국은 후이족 대부분이 거주하는 닝샤자치구의 수도 인촨에서 아랍과 중국 간의 경제포럼을 개최했다.
중국은 극단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무슬림의 적법성’을 강화하고, 급진적 요소를 억제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아랍 세계에 접근했다. 중국은 이를 위해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의 수호천사’인 사우디가 필요했다. 중국은 사우디로 신학생들을 유학 보내, 사우디 남서부의 항구도시 제다에 본부를 둔 57개국으로 구성된 이슬람회의기구(OIC)의 참관국에 중국이 포함될 수 있도록 사우디가 힘써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해 6월, OIC 사무총장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한편 지난해 10월, 중국 공안부장 멍젠주가 리야드를 방문했을 때, 양국은 안보협력 협정을 체결해 ‘테러와의 전쟁’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