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새로운 고민, 아프가니스탄

2011-02-14     필리프 레마리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미국의 대대적인 추가 파병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개최된 리스본 정상회의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 군과 경찰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안보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활동이 교전으로 확대되자 유럽의 지도자들은 그곳에서 발을 뺄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독일은 2월 주둔 시한 종료를 앞두고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게 불분명했다. 사망자 수도 모르고 주검들이 어디로 옮겨졌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국제안보지원군(ISAF) 소속 독일군 장성 중 한 명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군에 반군이 납치한 두 대의 유조차를 폭격해달라고 요청한 지난해 9월 4일, 독일국제안보연구원(SWP)에서 독일의 대아프가니스탄 정책을 연구하는 시타 마스는 공식적인 업무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머무르고 있었다. 독일 병력이 유조차를 되찾기 위해 지상작전을 펼칠 경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게 폭격 요청의 이유였다.

얼마 후 ‘실패한 작전’으로 낙인찍힌 쿤두즈 공습으로 14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독일은 오랫동안 아프가니스탄 참전을 순수한 군사적 목적이 아닌 “군사적 보호 아래 이루어지는 지원 활동”으로 규정해왔다. 독일군이 반군 진압에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와 이상주의에 입각해 활동한다는 것, 가령 아프가니스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여성을 해방시키고 어린 소녀들이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인도주의적 지원이라는 장막이 전쟁 상황을 가리고 있었다.” 시타 마스는 독일 국방부가 아프가니스탄 정부 지원, 식량 분배, 난민 귀환 등의 문제에 대해서만 떠들었지 아프가니스탄의 안보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쿤두즈 공습이 있기 전까지는 독일 정부가 내세우는 아프가니스탄의 이미지는 실제보다 더 행복하고 긍정적이었다. 독일 정부는 자세한 언급은 삼간 채 외교적 용어로만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전달했다.” 2009년과 2010년은 사태가 ‘안정’되기는커녕, 2003년 ISAF가 창설된 이후 가장 피를 많이 흘린 2년이었다.

독일 국회의원들과 여론은 그동안 자신이 속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나중에 연립정부 구성 변화에 따른 모호한 상황 때문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 사이 국방부 장관과 차관, 군 참모총장이 교체됐다. 지난해 4월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취임 후 처음으로 비행장에 몸소 나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독일군 7명의 운구를 맞이했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그동안 터부로 인식돼온 ‘전쟁’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쿤두즈 공습, 민간인 100여 명 희생

“우리는 갑자기 독일군 지휘관이 람보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베를린 좌파 일간지 <타게스차이퉁>(TAZ)(1)의 스벤 한센 기자의 말이다.  타게스차이퉁 신문사는 과거 ‘체크포인트 찰리’(2)가 있던 곳에서 불과 몇m 떨어진 루디두츠케 거리에 있다. “예전에 이런 행태를 보인 건 미군뿐이었다. 미군은 일단 발포하고 나서 심문을 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좋은 편, 재건자로서 주둔한다고 믿었다. 우선 질문을 하고, 만약 아군의 목숨이 위협받는다고 판단될 때만 수칙에 따른 경고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간주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의 독일군은 지역 재건을 위해 주둔 중이라는 명분을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독일 교회들은 정부 비판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독일 루터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마르고트 캐스만 개신교협의회(EDK) 의장은 지난해 1월 1일 설교 중에 “아프가니스탄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일갈했다.(3) 가톨릭 쪽에서는 프라이부르크 대교구장 로베르트 졸리치가 “기독교의 윤리적 관점에서 현재 정책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종군사제들의 증언이 잇따랐으며 대학과 비정부기구(NGO), 교회에서 다양한 토론이 전개돼왔다. 이런 활동들은 독일 정부가 내세우는 참전 목적과 실제 상황 사이의 괴리를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위키리크스의 폭로도 한몫했다. 지난해  8월 위키리크스는 독일 특수부대가 탈레반 지도자 제거 임무- 사살하거나 재판 없이 구금- 를 수행 중이던 한 미군 부대에 협력한 사실을 폭로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 연방군(Bundeswehr)은 자신이 선택한 탈레반 지도자 몇 명을 암살 대상자 명단에 추가하도록 했다.

독일 외교부는 문제가 된 특수부대는 국회와 협의를 거쳐 공식적인 임무를 투명하게 수행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관련 전문가이기도 한 전 녹색당 대변인 빈프리트 나크트바이는 “위키리크스가 독일의 참전이 자국 안보와는 아무 관련 없는 ‘비이성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베를린 시내의 소박한 건물 벤들러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사령부였고, 현재는 독일연방의 국방부 청사로 쓰인다. 1944년 7월 20일 미수로 그친 히틀러 암살 음모가 꾸며진 곳도 여기다. 암살 기도가 발각된 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동조자들은 이 건물에서 처형당한다. 독일이 오늘날 나치에 저항한 몇몇 군인들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 나치 군대의 악몽을 떨쳐내고 1954년 연합군과 독일 하원의 승인과 감시 아래 창설된 독일 연방군을 민주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다.

인도주의 장막 뒤에서 람보 행세

국방부에서 기자를 맞이한 장교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처음으로 독일군이 개입한 작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했다.(4) 아프가니스탄 독일 주둔군 총사령관은 ISAF 총사령관 스탠리 매크리스탈(5)이 민간인 사망을 방지하기 위해 공표한 새 교전규칙을 심각하게 위배한 첫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독일 연방군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 그간의 사고나 폭로는 최소한 독일군이- 지난 몇 년간 현장에서 소극적 참여로 비판받아왔다- 탈레반이 준동하기 시작한 북부 지역의 전투에 성실하게 임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지난해 2월 미국의 긴급 요청으로 독일은 5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다. 독일은 이미 미국(10만 명), 영국(1만 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5200명을 내보냈다. 그다음은 3580명을 파병한 프랑스다.

경찰관 200명의 보좌를 받는 독일 장교 400명은 아프가니스탄 군대 양성 임무에 전념하고 있다. 군 예산이 두 배로 늘어나고 장갑차 외벽을 강화하고 대포와 무인정찰기를 배치했다. 한 장교는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아프가니스탄 주둔 독일군의 개인 장비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는 독일군이 현지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미군과 같은 교전규칙을 준수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독일군의 작전 지역은 연방 의회의 동의를 받은 북쪽 주둔 지역에 한정돼 있다.(6) 그 장교는 군대와 사회 사이에 생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이미 전쟁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언급되는 상황에서 관건은 “(정치권과 여론이) 폭력의 적절한 수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패전 뒤 첫 해외 작전, 결과는 실패

독일 외교부의 한 관리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정부들이 쿤두즈 폭격을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전개된 작전으로 평가하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은 쿤두즈 폭격이 독일 사회에 미친 파장을 축소하는 효과가 있다. 그는 또한 지난해 8월부터 폭격의 희생자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됐다며(NATO 기준에 따라 희생자 가족에게 5천 유로를 지급했다), 이는 법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합의를 통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현지 전통에 따른 조의금” 형식으로 전달됐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참전과 경제위기로 독일 연방군은 창군 55주년이 되는 2011년 근본적인 개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연방 고용국 국장이 이끄는 바이스(Weise) 위원회의 보고서는 “실적에 비해 지나친 비용이 드는 비대한 관료주의적 기구”인 독일 연방군은 현재 임무수행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진단했다.(7) 독일경제연구소(DIW)는 아프가니스탄 참전에 드는 실제 비용을 연간 30억 유로로 계산했다(그러나 국방 예산에 편성된 비용은 10억 달러에 불과하다).(8) 이 계산대로라면 2001년부터 독일군 철수가 예상되는 2013년까지 총 누적 비용이 360억 유로에 달하는 셈이다.

예산 긴축과 군 효율성 제고를 위해 독일 연방 국방부 장관 카를테오도어 추 구텐베르크는 메르켈 총리의 지원하에 해외 파견 가능 부대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대신, 전체 병력 3분의 1을 감축하는 방안(18만 명으로 감축)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는 1955년 독일군이 창설된 뒤 유지돼오던 징병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자유민주당, 녹색당, 좌파는 (복무기간이 6개월로 단축된 이후부터) 이미 군사적 관점에서 불평등하고 비효율적인 징병제 폐지에 찬성한다. 그러나 기독교민주당(CDU)과 기독교사회당(CSU)은 지난해 10월과 11월 전당대회 토론을 거쳐 오는 7월부터 징병제를 폐지(유예)하는 대신 기존에 존재하던 대체복무제를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시민-병사’로 구성되고 민주적이고 평화 지향적이라고 알려진 독일군은 처음부터 독립적인 지위는 부여받지 못했다. 1990년 전까지 서독과 동독은 완전한 주권국이 아니었으며, 이른바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파병이 불가능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1990년 10월 2일 ‘4+2’회담(9)에서 통일조약과 주권이양이 공표된다. 통일독일 헌법은 사실상 서독 헌법을 계승한 것으로, 해외 군사작전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부분은 상당수 다른 국가(프랑스 포함)와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결정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국내에서는 고도의 정치적 게임이 벌어지고, 결국엔 일련의 규제 조치들을 채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다. 군 입장에서는 정치인들의 분열된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다.(10) 국회에서 파견된 위원이 독일 연방군의 활동을 감시한다. 5년 임기의 감시위원은 국회에서 비밀투표로 선출되지만 국회의원도 공무원도 아니다. 그렇다고 군 소속도 아니다. 감시위원회는 독일 연방 의회의 보조기구로서 기본 인권 보호를 위한 감시 업무를 수행한다.

독일 정부는 유럽이나 (주적 소련이 해체된 뒤 작전 반경의 ‘경계’를 지우려 는) NATO의 작전 지역 밖으로 자국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애써왔다. 가령 1993년 캄보디아에 의료 지원 성격의 파병을 추진했고, 1994년에는 소말리아에 인도적 지원을 목적으로 군대를 보냈다.

독일이 “신중한 태도에서 실력 행사로”(11) 나서게 된 계기는, 1999년 대세르비아 작전과 코소보 전쟁 개입이었다. 이는 당시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로써 독일군은 처음으로 전투를 치른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해 2003년 ISAF의 일원이 된다. 통일을 이룸으로써 “주권 없는 역사적 예외 국가”(12) 상태에서 벗어나고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독일은 이제 ‘정상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과거 나치 시절의 역사적 부채 의식이 독일이 국제사회로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전후 세대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면서 가능했다.

군, 경제위기와 맞물려 개혁 도마 위

그 뒤 독일 연방군은 꾸준히 해외파병을 추진해왔다. 콩고(2006년)와 차드(2007년)에 군대를 보냈으며, 2008년부터는 인도양의 소말리아 해적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군사작전은 항상 국회의 통제에 따른 시공간적 제약을 받는다. 반드시 독일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일 필요는 없다. 대신 ‘국제연대’와 ‘전후 재건’이라는 명분이 필요하며, 무력 사용은 자국 군대의 방어 목적에만 한정된다.

독일 여론은 다른 유럽국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자유를 전파한다는 식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유럽의회 국방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기민당의 카를 폰 보가우는 “왜 아직도 그곳에 머무르는가?”라고 묻는다. 그는 처음엔 서구 국가들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찬성했다. “우리 적은 탈레반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이다. 따라서 군대가 아니라 경찰이 개입해야 할 문제다.” 그는 독일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것은 과거 코소보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치안을 확립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국내 치안과 사법, 교육 등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칸 분쟁은 경우가 달랐다. 독일 국내 여론은 이웃 유럽 국가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 즉각 동의했다. 반면, 콩고와 차드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파병 방침에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도양의 해적 소탕 작전은 이상적인 경우다. 민간인 피해가 없는 ‘무장세력’과의 전투가 쌍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해상 수송로 보호라는 명분(공공안보 수호 임무)에 낭만주의(바다를 누비는 해적)까지 결합됐다.

‘정상 국가’ 향한 꿈, 시련 맞아

한센 기자는 현재의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추가 파병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안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한때 제3세계를 옹호하고 군사 개입에 반대했던 그는 자신의 기사에서 곤혹스러운 심정을 토로한다. “현재의 군사 개입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럼,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훈련시킨 뒤 모두 떠나버리면 그만일까? 하지만 NATO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 적으나마 그동안 이뤄놓은 것들이 무너져버릴지 모른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독일의 안보와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다른 유럽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한 외교관은 “독일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런던과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테러들을 생각해보라”며 ISAF에 총 40여 개국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모두가 참여하는 셈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아프가니스탄을 새로운 스위스로 만드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기자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중앙아시아의 전체 안보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단순히 원유 수송관이나 원자재 문제를 넘어 지정학적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반이 약한 이 지역에 안정적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떤 이는 그런 이유로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미 1970년대부터 독일은 세 번에 걸쳐 아프가니스탄 경찰 훈련을 지원한 바 있다. 또한 196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독일이 가장 먼저 경제 원조를 제공한 국가였다. 그리고 현재 원조가 이루어지고 있다.(13)

독일과 아프가니스탄의 교류 역사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아프가니스탄 왕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제국이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가- 그에게 아프가니스탄인은 아리안족이었다- 영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이용하려고 했다. 소련 점령기에 서독은 아프가니스탄 망명자들을 받아들였고, 동독은 유학생들을 맞아주었다. 카불의 독일계 고등학교(German Amani School)가 프랑스계·터키계 학교와 경쟁하는 것만 봐도 두 국가 간의 오래된 교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 주둔군은 소련군이나 미군과 달리 점령자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만큼 쿤두즈 폭격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온’ 온순한 군인들이 어떻게 침략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 묻는다.

2012년, 철군 분수령 될 듯

이 질문들은 독일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의 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마치 아프가니스탄 덕분에 독일이 정상 국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통일 후 경제대국 자리를 지켜온 독일은 자국 군대의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쩔쩔매는 정치적 ‘난쟁이’ 국가로 남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난해 5월 호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독일군을 방문하고 돌아온 자리에서 한 발언에 포함돼 있다. 독일 역시 “국익과 교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해야 한다”고 한 쾰러 대통령의 발언은 측근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카를테오도어 추 구텐베르크 장관은 “경제적 이익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구실이 될 수 없다”며 반박했고, 결국 대통령은 자진 사임했다.

소명 의식의 발로든 필요에 의한 것이든, 쾰러 전 대통령의 이 발언은 전후 재건을 돕는 평화적·인도적 독일이라는 이미지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언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주장했다. 인도양에서 해양 수송로 보호를 위한 EU 차원의 아틀란타(Atlanta) 작전에 대해 얘기한 것이지 아프가니스탄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국익을 논하는 데 아직 익숙지 않은 독일에서는 지난 10년간 공개적인 토론이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오는 2월 28일로 예정된 ISAF 소속 독일 연방군 철수 일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의회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주둔 기간 연장에 성공할 것으로 본다. 현재 즉각적인 철수를 주장하는 쪽은 독일 좌파당(Die Linke·구공산당과 사회주의 좌파)뿐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2012년 또다시 주둔 연장을 감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녹색당, 사민당, 기민당의 상당수 세력이 주둔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설 공산이 크다.

독일국제안보연구원의 연구위원 시타 마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미국의 비위를 맞추려고, 뉴욕 테러에 대한 NATO의 연대 선언에 동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독일인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어떤 절대적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필리프 레마리 Philippe Leymari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베를린 특파원.
블로그 ‘Défense en ligne’ 운영(http://blog.mondediplo.net/-Defense-en-ligne-).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타게스차이퉁>은 매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일어판을 발행한다.
(2)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는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1990년 6월 해체된 검문소 자리는 이제 관광 명소가 되었다.
(3) 마르고트 캐스만은 음주운전이 적발된 뒤 지난해 2월 독일개신교협회(EDK) 의장직을 사임했다.
(4) 그는 다른 외교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익명을 요구했다.
(5) 2010년 6월 스탠리 매크리스털이 사임하고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가 사령관에 임명됐다. ‘아프가니스탄: 퍼트레이어스와 함께!’, <Défense en ligne>, Les blogs du Diplo, 2010년 6월 25일자 참조.
(6) 다른 작전 지역으로의 일시적 이동인 경우 의회의 승인 없이 국방부 장관이 결정할 수 있다.
(7) 예를 들어, 해외 군사작전에 1명의 군인을 보내기 위해서는 35명의 군인과 16명의 민간인이 동원된다. 독일 국방부 부서는 17개나 되며 각 부서의 임무가 겹치는 경우도 많다. <TTU-국방전략 정보>, n°775, 2010년 10월 27일.
(8) 타 부처 지원금, 부상자 치료비와 연금, 가족수당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9)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선언하고 독일 통일로 가는 길을 연 ‘4+2 조약’은 199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공표됐다. 조약 당사자는 서독, 동독, 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이었다. 이 조약은 통일 독일의 핵무기 소유 금지와 독일 국경의 ‘영속성’을 규정하고 있다.
(10) Markus Kaim, ‘독일의 군사개입’, <Notes du Cerfa>, n°76, 2010년 7월.
(11) Jacques-Pierre Gougeon, ‘독일, 새로운 강대국’, <르몽드>, 2010년 10월 5일자.
(12) Heinrich August Winkler, <독일의 역사, 19세기와 20세기: 서구사회로 가는 머나먼 길>, Fayard, 파리, 2005.
(13) 연간 민간 원조 규모는 5억 유로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박스기사] EU 회원국들, 발빼기 눈치작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한 유럽연합(EU) 25개국은 지금 고민에 빠져 있다. 참전 명분은 희박해지는데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 수는 늘어만 간다.(1)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여론은 적대적이다. 예산도 부족하다. 유엔 사무차장으로 마약 퇴치 임무를 담당한 피노 아를라치는 “9년 동안 연합군이 전쟁을 벌였지만 탈레반 반군을 제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화나 안정을 가져오지도 못했다”고 말한다. 그가 작성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보고서는 유럽 의회에서 토의 안건이 되기도 했다. 그는 “치안상황이 악화됐다. 또한 과거에는 연합군에 우호적이던 현지 언론이 등을 돌렸다”면서 유럽이 그저 “미국의 결정에 따르기만 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EU는 아프가니스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EU 단독으로 아프가니스탄 경찰 양성에 지출하는 비용(2010년 4500만 유로)은 연합군이 이 분야에 지출하는 예산의 200분의 1에 불과하다. 물론 미국이 가장 많은 돈을 지출한다. 2002~2010년 EU와 회원국이 아프가니스탄 전후 재건과 안정화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80억 유로다. 미국은 520억 달러를 지출했다. 이 비용은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군 장비와 훈련을 위해 사용됐다. 유럽 국가들의 병력 수는 전체 연합군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활동반경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네덜란드를 포함한 몇몇 국가는 2010년 군대를 철수했으며, 현재 철수를 준비 중인 국가도 있다. 폴란드는 최근 미국의 요청으로 추가 파병을 단행했다. 그러나 폴란드 국회 국방위원장 스타니슬라스 비즈온텍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폴란드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주민들의 지지를 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상황이 그 반대임을 보여준다. 현재 감축이 진행 중인 폴란드군은 주어진 임무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상태다. 그는 “이 임무는 빨리 끝낼수록 좋다”고 말한다.

그리스 국회 외교국방위원회 위원장 디모스 브레토스는 “여론은 이 전쟁이 테러리즘을 뿌리뽑을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믿지 않는다. 차라리 그 돈을 마약 퇴치 활동에 쓰는 게 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확정한 철수 일정이 “군사적 관점이나 정치적 관점에서 나쁜 신호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재 그리스군은 물류 업무만 담당할 뿐 전투 병력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다. “우리는 NATO의 일원으로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뭔가 해야 하지만 가능하면 전투는 피하려고 한다. 반군들과 협상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겐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영국 보수당의 리엄 폭스 국방장관은 지난해 7월 아프가니스탄 방문을 앞두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했다. “중요한 것은 영국의 국내 치안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이 학교에 갈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영국군은 국제무대에서 영국 국민과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20일 NATO 정상회의에서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교부 장관은 “2015년 전에 영국군을 완전히 철수시킬 것”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며 “재고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의 경우, 여론의 70%가 프랑스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에 ‘대체로’ 혹은 ‘완전히’ 반대한다.(2) 이처럼 대다수 여론이 프랑스의 해외파병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경우는 30년 만에 처음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귀국한 프랑스군 지도자들은 현지 상황을 브리핑하면서 현지 군대와 경찰이 자체적인 지휘 체계를 갖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출 때까지 시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어떤 토론도 벌어지지 않았고 원칙이 제시되지도 않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군은 “주둔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한 계속 아프가니스탄에 머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지난해 2월 단지 200명의 교관을 추가로 파견하는 데 그쳤다. 미국은 프랑스에 전투병력 1500명을 추가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3)

러시아 연방의회 국방안보위원장 빅토르 오제로프는 “러시아는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하는 상황이 반갑지 않다”고 말한다. 이 지역에서 NATO가 실패할 경우 러시아에 우호적인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에까지 파급효과가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할 가능성은 없다. 러시아는 “이미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었다!” 오제로프 의원은 러시아가 연합군에 물류 수송로를 열어준 것에 만족한다. 러시아는 연합군 장비가 러시아 영토를 통과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했다. 러시아의 진짜 고민은 다른 데 있다. 테러리즘과 결합된 마약 생산·판매 조직이 이미 러시아 국경을 위협하고 있다.

<각주>
(1) 2001년 말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시작된 이래 연합군은 2300명의 병사를 잃었다.
(2)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Ifop가 <뤼마티테>(2010년 7월 8일자)의 요청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기존 여론조사 결과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3) 프랑스의 소극적 태도-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 에 대해 지난해 3월 11일 작성된 CIA ‘붉은세포팀’(Red Cell)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인을 저들의 운명에 내맡겨버리는 것에 대해 프랑스인, 특히 프랑스 여성들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