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이 또 다른 장벽을 덮을 수 있다

[통독 30주년]

2019-11-29     보리스 그레지용 l 엑스마르세유 대학 지리학 교수

 

여러 동독지역의 주에서는 극우 정당이 득세하고 동독 출신자들이 좌절감에 휩싸인 가운데, 독일 통일의 실패를 둘러싼 논쟁에 다시금 불이 붙고 있다. 독일이 통일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경제·사법·학문 기관은 서독 출신 인사들이 지휘하고 있다.

 

2018년 9월 독일에서는 논쟁적인 책 한 권이 출간됐다. 저자는 작센주 평등통합부 장관 페트라 쾨핑이다. 통일 독일에 대한 동독 출신자들의 불만을 다룬 책인데, ‘Integriert doch erst mal uns!(먼저 우리부터 통합하라!)’(1)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다. 여기서 ‘우리’란 동독 출신의 독일인을 의미한다. 한편 이 말의 대척점에 있는 ‘저들’이란 독일이 2015년 여름 이후 대대적으로 자국 땅에 받아들인 난민을 뜻한다. 이후 독일 정부는 난민들의 사회 편입을 돕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먼저 우리, 독일부터 통합하라’

사실 ‘먼저 우리부터 통합하라’라는 절절한 외침은 쾨핑 장관(독일의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아닌, 사회민주당(SPD) 진영의 인사)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다. 이 외침은 그녀가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매일 듣고 수집한 불만 사항을 표현한 말이다. 쾨핑 장관이 전해 들은 현장의 이야기는, 그녀가 이토록 신랄하면서도 풍부한 정보가 담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하는 단초가 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일을 1년 앞두고 구 독일민주공화국 출신의 여성이 ‘Eine Streitschrift für den Osten’(동부를 위한 변론)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출간한 일은, 말하자면 평화롭던 통일 독일의 질서정연한 정원 위로 난데없이 날아든 돌멩이와도 같았다. 일부 구동독 출신자들의 통합 요구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동독지역의 불만’의 핵심은 독일의 정치, 경제, 문화 상층부에 거의 전무한 동독 출신자의 현실이다. 구체적인 통계를 보면 현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예를 들어 정부 고위 관료 중 동독에서 태어나거나, 동독 사회의 영향권 내에서 성장한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2005년 독일 총리로 취임하고, 2005~2018년 기독민주연합(CDU)의 대표로도 함께 활동한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민주공화국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권력직에 오르고 자리를 보전하기까지 메르켈은 자신의 뿌리를 지우는 노력을 해야 했다. 물론 메르켈, 볼프강 티에르제(1998~2005년 연방하원 의장), 요하임 가우크(목사 출신. 2012~2017년 독일 대통령) 같은 인물들은 동포들이나 혹은 유럽인들의 눈에 통일 독일에서 정치적으로 성공한 ‘Ossis’(동독인)의 표본으로 간주되곤 한다. 하지만 동독 진영에 그 어떤 제자도, 피후견자도, 후계자도 없는 그들은 거대한 숲을 가리는 작은 나무들에 불과했다. 오늘날 그 숲은 작은 나무들조차 찾아보기 힘든 아주 헐벗은 숲에 불과하다.

2017~2018년 전환기를 맞이해 내각을 구성하는 동안 처음에 메르켈은 서독 출신으로만 장관을 인선했다. 그러던 중 막판에 개입한 것이 사민당(SPD)이었다. 지난 9월 24일 총선 이후 구성된 ‘대연정’ 정국에서 기민/기사연합(CDU-CSU)의 파트너였던 사민당(SPD)은 거의 무명에 가까운 동독 출신 여성, 프란치스카 기파이를 당내에서 발탁해 가족부 장관으로 추천했다. 일부 논평가들은 정부가 신식민주의 냄새가 짙은 ‘동독할당제(Ostquote)’를(또한 여성 할당제 역시) 다시 유행시키고 있다고 비꼬았다.

한편 정당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기독민주당(CDU), 사회민주당(SPD), 자유민주당(FDP), 녹색당 할 것 없이 모든 집권 여당의 지도부가 온통 서독 출신자들의 차지였다. 독일 동부에 탄탄한 지지기반을 마련한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 역시 ‘서독 출신자’(Wessis)들이 이끌었다. 오로지 좌파당(Die Linke)이 역사적 배경(좌파당은 1990년 동독을 집권했던 옛 사회주의집권당(SED)의 폐허 위에 세워진 정당) 때문에, 겨우 지도부의 동서 간 동수 원칙을 유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2019년 3월 좌파당의 심장으로 통하던 당대표 그레고르 기지와 원내대표 자라 바켄크네이트가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좌파당은 중요한 두 동독 출신 중견 정치인을 잃었다.

 

서독 출신이 모든 분야의 요직 차지

고위 행정 공무원의 경우에도 동독 출신자는 전체 직위의 단 5%만을 차지했다. 심지어 ‘신연방주’(옛 동독지역)의 시민은 전체 인구 대비 17%에 이르는 데도 말이다. 2016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실시한 한 연구조사도 동독 출신자가 전체 고위 공직과 임원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7%에 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전체 인구 대비 동독인 비율의 10%에 불과한 수치다.(2) 한편 연방부 산하 각국 국장급 관료 중에서도 동독 출신은 총 120명 가운데 단 3명에 그쳤다. 또한, 2016년 차관급 관료 역시 6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유리천장 원칙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셈이었다. 위계서열이 더욱 높아질수록 동독 출신 인사는 찾아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경제 및 비즈니스 부문의 상황은 한층 더 심각했다. 이 분야의 통계 수치는 단순히 참담한 수준을 넘어 가혹하기까지 하다. <슈피겔>(2018년 11월)에 의하면, 독일 30대 상장기업(DAX) 내에 동독 출신 최고 경영자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사진 역시 단 3명에 그쳤다. 더욱이 이들 대기업 가운데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동부지역에 본사를 둔 기업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연방주’ 내에서도 서독 출신자의 독식 현상이 확인됐다. 동독지역의 100대 기업 중 3/4은 ‘서독 출신자(Wessis)’가 이끌었다.(3) 예를 들어, 전체 고위 임원 가운데 무려 77%가 서독 출신자였다. 마지막으로 독일 백만장자의 92.7%가 서부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부에 사는 부호는 단 3.9%에 그쳤다. 그나마 베를린이 3.4%를 차지했다.(4)

흔히 동서 간 융합이 원활할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령 독일의 모든 대규모 문화기관은 전부 서독 출신자들이 수장을 맡고 있다. 심지어 동독지역의 기관조차 서독 출신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물론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가령 토마스 오베어엔더가 이끄는 베를리너 페스트슈필레(베를린 축제)가 대표적이다. 오베이엔더는 “신흥 연방주의 엘리트 다수가 서독 출신이다”(5)라며 씁쓸하게 말했다. 일례로 독일 동부지역 15개 대학의 총장은 모두 서독 출신자다. 또한, 교수직 대부분도 서독 출신자가 차지했다(사회학의 경우에는 서독 출신자가 무려 80%에 육박한다).

미디어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대형 미디어 그룹(스프링거, 푼케, 부르다, 베텔스만, 그루너+야르 등), 주요 전국일간지(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쥐트도이체 차이퉁, 디벨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타게스차이퉁, 타게스슈피겔), 유력 주간지(슈피겔, 디 차이트, 슈테른, 포쿠스)는 전부 구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 시작됐다. 동독의 매체 중에는 (지역 일간지를 제외하고는) <베를리너 차이퉁>과 <베를리너 쿠리어> 정도만 살아남았다. 이들 매체의 주요 독자층은 동베를린의 장년층이다. 심지어 동독 문제를 주로 다루는 확실한 좌파 성향 주간지 <프라이탁>에도 동독 출신 상근 기자는 단 2명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은 많은 언론매체와 서방의 지도자들이 베를린 장벽 붕괴를 단순히 ‘통일’(재통일)이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됐다. 당시 많은 동독인은 통일과정을 대변혁으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어떤 이들은 병합으로까지 인식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체제가 해체되자마자, 곧바로 사회주의집권당(SED)을 지지했거나 혹은 몰락한 정권을 지지하던 동독 출신 엘리트들을 축출하기 위해 숙청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행정, 경제, 정치, 문화계는 물론 대학에서도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했다. 서독 출신의 젊은 고학력자들은 신이 나서, 이제 막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병합된 구 동독지역의 신연방주의 요직을 하나둘씩 꿰찼다. 그 바람에 백만 명의 동독 출신 공무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가령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직원 7만 명이 실직자 신세가 되는가 하면, 형사 사법관(판사와 검사) 전원이 법원에서 쫓겨났다.

이후 서독 출신의 새 엘리트계급은 사회적 재생산이나 인맥 및 유착관계를 이용해 자신들의 위상을 영구화했다. 물론 동독인을 권력 요직에서 쫓아내려는 의도가 명백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독인들의 자리를 찾아주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독일의 육·해군 장성 202명 중 동독 출신자는 단 2명에 불과하게 됐다. 마찬가지로 연방대법원의 판사 336명 가운데 동독 출신자는 단 3명뿐이었다. 구 동독 영토에서 활동하는 동독 출신 판사도 13%에 그쳤다.(6)

 

국가에 소속감 못 느끼는 ‘이등시민’들

권력 요직에 동독 출신자를 찾아보기 힘든 현상은 경제적 원인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0년 독일 통일 뒤 동독인은 급격한 사회적 지각변동을 겪으며 모든 직업적 출세 야망을 잃어버렸다(더욱이 직업적 출세 야망은 사회주의 체제가 그다지 장려하지 않던 태도이기도 했다). 포츠담대학 교육학 교수이자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당(SPD) 산하 ‘동독위원회(동독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구조적 문제를 담당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프라우케 힐데브란트가 설명하듯, 통일과 동시에 모든 동독의 각 가정은 갑작스러운 실직과 장기 실업에 처했고, 공장과 국영기업, 행정기관이 문을 닫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그들 모두는 계급이 추락했고, 불안정한 임시직을 전전했고, 직업적 관계나 친구 관계가 와해됐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가 서독으로 이주하여 부부간에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 모두는 한 세계의 몰락을 경험했다. 그것은 단순히 슈타지, 장벽, 혹은 당 하나로만 환원되지 않는 세계였다. 1990년대 온갖 위협이 도사리던 시대에, 그들에게는 경력을 쌓는 것보다 일단 목숨부터 건지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많은 이들이 서독지역으로 사활을 건 모험을 떠나게 됐다. 이로써 구 동독의 또 다른 비극인 대대적인 인구 출혈이 발생했다. 1990년대 이후 수만 명에서 시작해 이어 수십만 명에 이르는 동독인이 서독지역에 정착했다. 대부분은 젊은 고학력자로,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신연방주는 (거의 2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 출혈을 겪은 후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이탈자 중 일부는 충분히 독일 동부지역의 요직에서도 널리 활약을 할 만한 귀중한 인재들이었다.

오늘날 적지 않은 독일인은 스스로를 ‘이등 시민’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외부가 강요한 신자유주의로 인해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장기실업자, 기초생활수급자, 임시직(혹은 시간제) 노동자, 빈곤층 연금생활자들은 ‘자유’는 있지만 의미와 목표는 없는 헛된 세계의 약속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 정치적 측면에서, 동독인의 미비한 사회통합은 기권표나 혹은 항의적 성격의 투표로 나타난다. 소신 투표를 하는 대신, 2000년대에는 좌파당의 전신 독일사회당(PDS)에, 그리고 2010년 이후에는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에 무조건 표를 던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독지역보다 동독지역에서 두드러진다.(7) 말하자면 두 독일 정당의 현격한 정치적 차이가 다음의 절절한 외침 속에 녹아들어 있던 셈이다. “먼저 우리부터 통합하라!”

두 가지 상보적 연구조사가 독일 사회의 동독인 ‘부재’ 현상을 잘 설명해준다. 먼저, 첫 번째 연구는 유리천장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취약한 경제 상황에 더해(비록 1990년대 이후 확실히 좋아졌지만) 동독 출신자들은 엘리트층에 그들을 대변할 대표를 지니지 못했다.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사람들이 그토록 열렬히 부르짖던 ‘비로소 되찾은 나라’(8)에 자신들은 소속돼 있지 않다고 느낀다. 일부는 ‘고통의 희석제’라고 믿는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국가통합을 완성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전체 인구 대비 동독인의 비율에 맞게, 권력 요직에 동독인 할당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은 시간이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독인(Ossis)’의 분노와 체념과 좌절감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할당제 도입(비록 여론조사에서는 동독인의 48%만 관심을 보이는 이슈라고는 하지만)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9)

한편 조금 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해석도 있다. 냉전의 승리자들은 본래 동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경험한 그대로의 역사를 지워버리고,(10) 역사적 기념물(베를린 공화국궁(분단 시절 동베를린 청사-역주)처럼)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모든 동독인을 오로지 전체주의 독재체제의 희생자나 경찰 끄나풀로 간주하며, 모든 권력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 그 결과 그 어떤 종류의 할당제로도 잠재울 수 없는 감정을 동독인들 사이에 불어넣었다. 그것은 바로 국가에 소속돼 있지 않다는 감정이다.

 

 

 

글·보리스 그레지용 Boris Grésillon
엑스마르세유 대학 지리학 교수, 마르크블로흐센터(베를린) 객원연구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Petra Köpping, 『Integriert doch erst mal uns! Eine Streitschrift für den Osten』, Christoph Links Verlag, Berlin, 2018년.

(2), (3), (6) Michael Bluhm, Olaf Jacobs, 『Wer beherrscht den Osten? Ost-deutsche Eliten ein Vierteljahrhundert nach der deutschen Wiedervereinigung』, 중부독일방송(Mitteldeutscher Rundfunk)과 협업, 라이프치히 대학, 라이프치히, 2016년.

(4) <Manager Magazin>, 2018년 가을.

(5) <Süddeutsche Zeitung>, 2018년 3월 2일.

(7) Béatrice von Hirschhausen, Boris Grésillon, 『La permanence de la partition allemande 독일 분단의 영속성』, <Hérodote>,  Géopolitique de l'Allemange, 2019년 11월 출간.

(8) Anne-Marie Le Gloannec, ‘La nation retrouée. De la RDA à l'Allemange 되찾은 나라. 독일민주공화국에서 독일까지’, <Politique étrangère>, 제55-1호, 1990년.

(9) ‘Ostquote. Verhilft sie Ostendeutschen zu mehr Chancengleichheit?’, <Die Zeit>, 함부르크, 2019년 3월 21일.

(10) Sonia Combes, 『D'Est en Ouest, retour à l'archive 동에서 서까지, 기록보관소로 회귀』, Publications de la Sorbonne, 파리, 2013년./ Nicolas Offenstadt, 『Le Pays disparu. Sur les traces de la RDA 사라진 나라. 독일민주공화국의 발자취를 좇아서』, Stock, 파리,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