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렉시트를 위해 투쟁하는 프랑스인들

대중공화연맹당(UPR) 밀착 취재

2019-11-29     알랑 포플라르 l 기자

2019년 5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노란조끼’ 시위대의 집회에서는 특정 정당의 명칭이 종종 언급됐다. 다름 아닌, 유럽연합(EU) 탈퇴 또는 ‘프렉시트’를 주장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대중공화연맹(UPR)’당이다. 헌신적이고 유능한 당원들을 앞세운 이 정당은, 자신들이 좌우 분열을 넘어선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일까?

 

 

2019년 3월 29일. 대중공화연맹당(UPR) 활동가 700명이 영국의 수도에 모였다. ‘런던에서 다시 자유 프랑스’라 명명된 이번 모임은 브렉시트 시행을 축하하고, 유럽연합의회 선거가 치러지기 전, 프랑스의 EU 탈퇴를 위한 실력행사를 하기로 예정된 자리였다. 그러나 이날 영국 하원은 테리사 메이 총리와 유럽연합 지도자들이 맺은 합의를 세 번째로 부결했다.

그곳에 모인 프랑스인들은 로렌 십자가가 삽입된 삼색기(자유 프랑스의 국기-역주)를 흔들며, 의회 앞에서 분노를 표출하던 브렉시트 지지자들과 뒤섞였다. 프랑스의 이 작은 정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부 군중은 마린 르 펜의 정당과 혼동해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들의 행렬은 “프렉시트! 프렉시트!”라 외치며 웨스트민스터 처치하우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UPR의 대표이자 설립자인 프랑수아 아슬리노가 연설을 시작했다. 행사에 초대된 영국 보수당 및 노동당 출신 전 장관들 옆에서 그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번 모임은 1940년 이래 영국에서 열린, 프랑스인들과 함께하는 프랑스의 정치집회 중 최대 규모다. (…) 자유 프랑스인들은 다시 런던으로 와, 여러분들 앞에 서 있다. 2019년 3월 29일의 이 연설이 UPR의 역사에 있어 (…) 1940년 6월 18일의 연설에 버금가는 연설이 되기를 (…) 바란다.” 그는 유럽 “제4제국(신성로마제국을 칭하는 제1제국, 1871~1918년의 독일제국을 칭하는 제2제국, 나치 지배체제를 일컫는 제3제국에 이어 강한 경제력으로 유럽을 지배하려는 현재의 독일을 비판하는 표현-역주)이 민주주의를 해쳤다”고 비난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대통령 자리를 ‘새로운’ 페탱(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협력해 비시 정권을 장악했으나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음, 마크롱을 비유-역주)이 차지했다고 해서 영국인들이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수상의 공식 관저-역주)에 ‘새로운’ 체임벌린(1937~1940년 영국의 총리, 평화를 위해 나치 독일에 유화정책을 펴고 뮌헨 협정에 서명했으나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비판받은 인물. 결국 악인에게 단호하지 못한 정치인들을 비판할 때 쓰는 표현이 됨, 보리스 존슨 총리를 비유-역주)을 맞이한 사실을 기뻐할 상황은 아니다.(…)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우리가 새로운 드골(프랑스의 군사 지도자로 총리, 대통령 역임. 집권 후 나치 협력자들을 숙청했으며, ‘위대한 프랑스’와 자주적 외교를 지향함-역주)을 원하듯 영국에서 우리는 새로운 윈스턴 처칠(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 영국을 나치독일로부터 지켜내고 히틀러의 유럽 정복을 막는 데 일조함-역주)을 원한다.”

 

“좌우 분열을 넘어 집결하라”

7월 23일, UPR은 보리스 존슨이 영국 보수당의 새 대표와 신임 총리가 된 것을, “3년이 넘게 지속된 지지부진함을 끝내고” 드디어 브렉시트로 나아갈 길을 열어준 “역사적 사건”이라며 환영했다. 그리고 약 두 달 뒤, 존슨이 영국 국회의원들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지자 UPR은 그것이 국민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쿠데타”라고 규탄했다.

2007년 창당된 UPR은 프랑스가 유럽연합, 유로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기를 원한다. 로마조약 체결 50주년 기념일인 3월 25일 채택된 UPR당의 헌장은 “다시금 프랑스의 독립을 이루고, 프랑스의 자유를 프랑스의 국민에게 돌려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UPR은 국가의 주권과 민중의 주권을 속박하는 유럽연합 법을 규탄하며, 한 국가가 독자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날 수 있도록 한 제50조의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UPR은 그 목표를 위해 “모든 프랑스인에게, 당분간 좌우를 초월해 하나로 뭉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은 세금 제도, 지역발전 불균형, 퇴직연금, 이민, 환경 등의 문제에 대해 끝도 없이 논쟁하고, 분열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주제들은 부차적인, 하위의 문제들이다. 왜냐하면 유럽중앙은행(BCE)의 지도자들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위원들이 이와 관련한 주요 결정들을 이미 내렸기 때문이다.” 내무부 장관이 프랑스적 다양성의 한 범주로 분류한 UPR은 스스로를 과도(過度) 정당으로 소개한다. “프랑스가 해방되면, 각자 자신의 정치 집단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좌우 분열은 자연스럽게 재편성될 것이며 한층 명확하고 타당해질 것”이라고 UPR은 자신 있게 말한다.(1)

기업 경영자들은 독일 나치 지배하에 구성돼 프랑스 사회 모델로 자리 잡은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CNR)’를 없애고자 애썼다. 그러나 UPR은 이들과는 반대로, 냉전 기간 오랜 공백기를 가졌다가 1990년대 중반에 다시 나타난 CNR을 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UPR은 CNR을 2017년 운명의 선거를 위한 ‘국가해방 공약’의 모델로 삼기까지 했다. UPR은 이 공약을 통해 완전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고, 에너지(EDF, Enedis, Engie), 통신(Orange), 언론(TF1, TDF), 고속도로 개발 사업, 상하수도 회사를 일부 또는 전부 국영화해 국가의 중앙집권력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UPR은 전문성에 집착하며, 암흑 속 투쟁가들보다 화이트칼라들에게 더 우호적이다. 또한, 1990년대 들어 한때 배제됐던 드골파의 관습과 상징들에 가치를 부여했다.(2) UPR의 아슬리노는 1985년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해 금융 감사원(IGF)에서 일한 이력이 있다. 1993년에는 에두아르 말라뒤르 정부에서 산업·무역부 장관을 지낸 극단자유주의자 제라르 롱게 장관 사무실에서 일했다.

 

‘사회주의적 방임주의’에 맞서

샤를 드골의 초상화와 프랑스·UN·국제프랑코포니기구의 깃발로 장식된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아슬리노는 자신의 이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정당화했다. “집권당이 바뀌면서 나의 정치 이력에도 변화가 생겼다.” 2년 뒤, 알랭 쥐페가 새로이 구성한 내각에서 아슬리노는 프랑수아즈 드파나피유 관광부 장관과 함께 일하다가, 에르베 드샤레트 외교부 장관을 따르기 시작했다. 1997년 의회가 해산된 후, 아슬리노는 IGF로 복귀했다.

아슬리노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의 정치통합과 경제 및 통화 통합을 위한 유럽통합조약-역주)이 체결된 1992년부터 주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197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시몬 베유가 이끌었던 당, UDF(l’Union pour la démocratie française: 프랑스민주주의연합)에 투표했고, 필리프 세갱(신드골주의 정치인으로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반대함-역주)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1992년 12월 20일 국민투표에서) 찬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과도한 선거운동을 하는 언론에 격분했다.”(3)

2001년, 아슬리노는 샤를 파스콰 전 내무부 장관의 ‘프랑스연합당(RPF)’에 가입해 전국사무소 구성원이자 조사 책임자, 그리고 대변인으로 일했다. 그는 “정당에 가입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2000~2004년 오드센 지방의회에서 파스콰 의원실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아슬리노는 2001년 시의회 선거 때, 파리 19구에서 당내 첫 번째 후보로 지명된 후 파리 시의원이 됐다. 그는 선거기간에 마약밀거래·맹견·매춘·경찰관 부족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6년 동안의 사회적 방임주의”를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2004년에는 니콜라 사르코지에 의해 경제 재정부의 경제정보국 총괄 대표로 임명됐고, 2년간 대중운동연합(UMP)에 몸담았다. 그 후 아슬리노는 유럽의회의원인 폴마리 쿠토(후에 극우파가 된 인물)가 2003년에 설립한 ‘프랑스독립주권연합(RIF)’을 잠시 거쳤다가 2007년 UPR을 창당했다. RPF에서 RIF로 이탈했던 아슬리노의 이력은 보수우파, 자국 주권론자들의 이력과 궤를 함께한다.

“나는 UPR에 우파적 요소가 3가지 있다고 본다. RPR(공화국연합)을 연상시키는 당명, 나의 정장 차림 그리고 20년의 내 이력이다. 물론 그 밖에도 우파적 요소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 ENA 졸업생의 상투적 어법에서는 자크 시라크식의 유럽회의주의(유럽통합에 반대하는 이념이나 사상-역주)가 묻어났다. 자크 시라크는 1978년 “외국의 정당”, “독일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유럽이 아닌 유럽”, “포기밖에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조국의 쇠퇴”를 비판했었다. 하지만 아슬리노의 연설에는 필리프 세갱의 법률만능주의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났다.

1992년 마스트리흐트에서 장피에르 슈벤느망이 입후보했던 2002년 대선까지, 유럽통합에 대항하는 자국 주권주의는 행복한 세계화의 신화가 흐려짐에 따라 프랑스 정치계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자국 주권주의를 주장하는 정당들 가운데서 아슬리노의 정당이 가장 두드러진다. 플로리앙 필리포의 ‘애국자당’이나 니콜라 뒤퐁에냥의 ‘약진하는 프랑스’당은 이민자들이나 무슬림을 비난하는 반면, UPR은 이 주제들에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UPR은 이민문제위원회를 신설해 반발을 샀지만, 이 위원회에서 성과를 발표한 적은 아직 없다.

오랫동안 소규모 정당으로 존재했던 UPR은 12년 만에 3만 8,000명이 가입한 정당이 됐다. 당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2017년,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투표가 치러지고 몇 달이 지난 후, 아슬리노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다. 그는 587건의 지지 서명(프랑스 대선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선출직 공직자 신분의 추천인 500명 이상으로부터 지지 서명을 받아야 함-역주)을 받는 데 성공했고(2012년에는 17표에 그쳤다), 이 중 절반이 북서부 지역에서 나왔다. 2014년부터 UPR에 합류한 몬트리올 출신의 엔지니어 마농 슈발리에는 “개인적 안온함보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 그해 안식년에 들어가 자비로 피카르디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슬리노에 대한 지지 약속을 받으러 다녔다.

“현장에서는 내가 직접 부딪쳐야 했다. 800명의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중 300명을 만났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아슬리노를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아슬리노를 알지 못했다.” 이 여인은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것이 프랑스로 하여금 프랑스어권 세계를 열게 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했고, “주민이 300명 이하인 코뮌의 무소속 의원들로서 무소속이고, 기존 정당들에 환멸을 느끼는 이들로부터” 35건의 지지 서명을 받아냈다.

 

“프랑스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사람”

UPR 당원들의 평균연령은 46세, 남성이 85%를 차지한다. 또한, 당원들 중 85%가 “UPR이 최초로 가입한 정당”이라고 답변했다.(4) 우리는 취재 중에 다양한 옛 유권자들과 기권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 다수가 과거에 우파 지지자였다가 UPR에 가입했다.(5) 인터뷰에 응해 준 이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상인, 캠핑장 운영자, 실업자, 기업 경영감독관, 기자, 금융 및 부동산 중개인, 대학생, 전기기사, 엔지니어(다수) 등이 있었다. 그러나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대체로 온라인 게시물을 읽거나 아슬리노의 집회 영상을 보고 당에 가입했다. 기존 언론을 불신하는 이들은 대안 채널을 선호한다. RT채널(구 러시아 TV)이나 티비리베르떼, 스푸트니크 멀티미디어 통신, 올리비에 베뤼이에(Les Crise)나 에티엔 슈아르(Le Plan C)류의 블로그, 정당과 다소 거리를 두는 유튜브 채널들(Trouble Fait, Penseur Sauvage, Thinkerview) 등이다.

UPR당은 2012년부터 매년 가을 정당 연수를 개최해왔다. 아니 라크루아리즈, 에마뉘엘 토드, 장 브리크몽, 코랄리 드롬 등의 인사들도 연수에 한 번 이상 참석했다.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상당히 많은 UPR은 유튜브 채널(구독자 수 11만 4,900명)도 보유하고 있고, 얼마 전부터는 UPRTV라는 TV채널도 개국했다. 정당의 모토처럼 “언론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약진하는 정당”은 다른 모든 ‘군소 후보들’처럼 ‘위대한 기자들’의 멸시에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럽 사람들을 위해 UPRTV를 만들었다. 현재 15명의 당원이 채널을 관리한다”고 소셜미디어 담당 파비앵 세마가 설명했다. UPRTV에서는 뉴스와 주간 뉴스 리뷰 외에도 아슬리노의 이동 소식, 인터뷰, 담화를 내보내고 있는데, 아슬리노가 진행하는 문화 프로그램도 곧 방송될 수 있다. 인터넷 덕분에 중앙집권화는 더 확고해진 듯하다.

전국사무소, 지역 대표, 도 대표를 두고 있는 UPR은 조직화된 정당이다. 낮은 득표율(2017년 대선 시 0.92%) 때문에 선거운동 비용을 환불받지 못한 UPR은, 30유로씩 당비를 내는 당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6) 당비를 많이 내는 당원들에게는 상을 주는데, 슈발리에도 묵직한 금메달을 받았다. 아슬리노는 당원들 앞에서 슈발리에에게 메달을 수여하며 “특별히 파리 조폐국에서 만든 메달”이라고 강조했다. 메달의 앞면에는 UPR당의 로고인 1프랑 동전 이미지가, 뒷면에는 ‘UPR-마농 슈발리에-2017년 대선’이라고 새겨져 있다. 적극적 행동주의로 유명한 UPR 당원들은 전당대회에 모여 당의 규약에 투표하고 국내 대표를 선출한다. 하지만 이들은 당의 주요 전략적‧정치적 방향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당 홈페이지에는, “창당 헌장이 2007년 3월 작성된 이후 단 한 번도 수정된 적이 없다”고 자랑스럽게 기술돼 있다. 당의 강령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일반 당원들은 협의나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경제문제 담당 샤를앙리 갈루아, 유럽중앙은행 경제학자 출신으로 통화문제를 담당하는 뱅상 브루소 두 보좌관에 둘러싸인 아슬리노는 당의 핵심이다. 당에서는 아슬리노의 교육자적 능력, 날카롭게 증거를 제시하는 방식, 날짜, 법 조항, 수치와 라틴어 격언 등을 다루는 명석함, 심지어 진부하고 부자연스럽지만 의원들의 케케묵은 말투에 비해 진지해 보이는 말투와 태도까지 높이 평가한다. 이 고위 공직자의 바르고 공정한 태도 역시 칭찬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어떤 개인적 야망과 악의도 없이 미덕과 진리를 위해 헌신했으며, 특권층임에도 국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다가 사기업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라며 치켜세운다. UPR에서는 아슬리노가 없을 때도 그를 “아슬리노 님”이라고 부르고, 그를 선구자로 여긴다.

2019년 3월 8일, 마르세유 북부.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자신을 마치 루이 16세처럼 생각하던 그 사람.” UPR 대표와 ‘노란조끼’ 시위대의 집결 장소에 우리를 데려다주던 장클로드 디브가 차 앞자리에서 물었다. “발라뒤르!” 운전 중이던 마크 앙토니티가 바로 대답했다. “그래 발라뒤르! 아슬리노 대표님은 그와는 달라. 대표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다”라고 디브가 대답했다.

각각 69세와 65세로 화물 트럭기사 그리고 연대노동소득(RSA)(소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부 지원금-역주)을 받는 음악가로 일했던 이 두 당원은 부슈뒤론 지방에 존재하는 1,000여 명의 UPR 당원 중 일부다. 오랫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앙토니티는,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 “미국의 내정간섭과 NATO의 불법 전쟁”을 규탄하던 아슬리노의 ‘논리적인 연설’에 매료돼 당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앙토니티는 당 홈페이지를 관리하면서 홈페이지 내에 온라인 도서관도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마이클 파렌티의 에세이 『To Kill a Nation: The Attack on Yugoslavia』나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프로파간다』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작은 강연실에 들어온 아슬리노는, 그를 기다리던 250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디브와 앙토니티처럼 그들 대부분이 당원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노란조끼 차림이었고, 매주 토요일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이었다. 대형마트에서 판촉사원으로 일했던 제니 미랑다는 포르드부와 마르티그 항의 시위 때 큰 몫을 했다. 70여 명의 동료 시위대와 함께 작은 초소를 세우고 밤낮으로 원형교차로를 지킨 것이다. “UPR이 ‘노란조끼’ 시위대의 활동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UPR은 유럽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인식 수준을 높였다”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항상 우파에게 투표를 해왔던 그녀가 2007년 UPR에 가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2005년 5월 29일 국민투표에서 국민 54.67%가 유럽헌법조약을 거부했음에도, 사르코지가 프랑스인들의 표심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에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가 내가 처음으로 가입한 정당이며, ‘노란조끼’가 내가 처음으로 참여한 시위다.” 노란조끼 시위대 행렬에 UPR의 당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제니 미랑다도 속해있던 인터넷 소모임 너머로 시위대의 의견을 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그 기회를 인지하고 있던 UPRTV는 <‘노란조끼’ 시위대의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을 편성하기도 했다.

UPR은 오랫동안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둬왔다. 2018년 3월 22일, 2018년과 2019년 5월 1일에 프랑스 국영철도(SNCF)를 옹호하는 시위행렬에 참여했지만, 노조와는 연대가 없었고 노동자들의 운동에는 무관심했다. 당원들이 가장 많이 지켜본, 프랑스의 역사에 대한 3시간 15분에 걸친 강연에서 아슬리노는 인민전선의 경험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가 프랑스와 유럽을 지배하는가?’라는 또 다른 강연에서 아슬리노는 68혁명(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들이 연합해 벌인 대규모 사회변혁운동-역주)이, 미 중앙정보부(CIA)와 록펠러 재단(석유재벌 존 록펠러의 자선단체-역주)이 총학생회를 매수해 공화국의 정권을 뒤흔들기 위해 벌인 사건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슬리노는 68혁명이라는 저항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요구와 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은 완전히 가려버린 채 “68혁명이, 미국인들이 2000년대에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실행했던 것 같은 첫 번째 ‘색깔혁명’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역사학자들이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UPR의 대표는 중산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중산층의 반역에만 주목한 아슬리노는, “프랑스인들은, 중산층 엘리트들이 프랑스를 배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아슬리노는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 대해 무관심하다. 임금 노동자의 종속관계 문제를 해결하거나,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혁명이 프랑스인들을 도시의 왕으로 만들었으나 기업의 노예로 전락시켰다”(7)는 말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우파의 우울증은 호소력을 지닌다

우리를 집에서 맞이해준 UPR당의 사회문제 담당자 크리스틴 아누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RPR과 RPF의 당원이었다가 UPR과 ‘약진하는 공화국(2014년 ‘약진하는 프랑스’로 바뀜)의 창당멤버였으며, 현재 리지유의 부시장인 그녀는 즉각적으로 유럽연합의 횡포를 비난했다. 당 홈페이지의 약력 소개란에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술돼 있다. “세르비아계의 아버지와 프랑스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그녀는, 1914년 동맹을 맺은 세르비아처럼 프랑스도 주권과 독립성을 가진 강대국일 때 비로소 진정한 프랑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속한 당의 사회정책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따라서, 그녀가 노동법 폐지나 월 1,300유로인 최저임금 인상을 부르짖을 일은 없어 보인다.

<르피가로>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구독자이며, ‘노란조끼’ 시위대와 함께 원형교차로에 나서는 아누는 드골을 “질서 옹호자이자 반항적인 사람”이라 칭송하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사회 발전이 멈췄다. 나는 자본주의 덕분에 이뤄진 발전을 경험한 세대다. 그러나 현재는 발전이 멈췄다.(…) 더 이상 계급투쟁은 없고, 세계화 모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국가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자본과 노동이 서로 협력할 때만 프랑스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권리들을 부여해야 하는지 묻자, 그녀는 바로 답했다. “새로운 권리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많은 권리가 있지 않은가. 참여경제와 노동자 상여금을 보강해야 한다.”

국가 주요부처 출신 고위관료가 이끄는 UPR은 대규모 현대화 움직임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당원들 사이에서 ‘영광의 30년(1946~1975년, 프랑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역주)’ 신화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일이 거의 없다. 굳이 평가한다면, 생산제일주의 신조 속에 제5공화국의 제왕 정치가 뒤따랐고, 이로 인해 사회적·환경적 후유증이 생겨났다는 정도가 일부 당원들의 비판적 인식이다. 주주자본주의와 범 대서양주의, 성공한 유럽 통합주의로 신뢰를 잃은 자칭 드골주의 계승자들은 승리자의 진영에 합류했다. 그러나 시장 절대주의가 흔들리고 있는 만큼 국가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열망은 새로운 형태의 도약을 부르고 있다. UPR의 출현은 우파의 우울증을 드러내는 여러 징후 중 하나지만, 그들의 우울증은 여전히 호소력을 지닌다.

 

글·알랑 포플라르  Allan Popelard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L’UPR veut-elle abolir le clivage gauche-droite? UPR은 좌우
분열을 없애길 바라나?’, 2013년 1월 9일, www.upr.fr
(2) François Denord, ‘Et la droite française devint libérale 그리고
프랑스 우파는 자유주의가 됐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
어판, 2008년 3월호.
(3) Serge Halimi, ‘Maastricht, décideurs et délinquants 마스트리흐트, 결정권자들과 범죄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2년 10월호.
(4) 당에서 제공한 수치 2018년 12월 31일, www.upr.fr
(5) UPR에서는 당원 대부분이 좌파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6) 대학생, 실업자, 연대노동소득(RSA)수령자들은 단 10유로만 지불한다.
(7)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9.3.~1914.7.31. 프랑스의 정치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