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문어발식 언론의 귀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시나리오는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이 세 국가는 좌파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보수 성향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은 곳이다. 이들은 가까스로 정권을 잡자마자 전임자들이 민영언론의 독점적 영향력을 막기 위해 취한 언론정책을 무효화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레닌 모레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에, ‘표현의 자유’를 천명한 ‘차풀테펙 선언’을 승인했다. 이 선언문은 중남미의 주요언론사 사주들이 결성한 비정부기구 인터아메리칸 언론협회(SIP)가, 1994년에 주최한 지역회의에서 채택한 것이다. 70여 개 국가의 원수들이 비준한 이 선언문은 언론자유를 위한 10개의 ‘필수’ 원칙을 천명했다. 선언문은 “어떤 법도, 어떤 권력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중남미 보수주의의 성지인 마이애미에 본사를 둔 인터아메리칸 언론협회는, 모두가 염원했던 에콰도르 매체들과 키토 정부의 ‘화해’에 대한 환영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 두 세력은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집권 시기(2007~2015)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풀테펙 선언 속 표현의 자유는 국민이 아닌 언론 사주를 위한 자유로 변질됐다. 모레노 대통령은 코레아 전 대통령이 공영·비영리 부문을 강화한 2013년의 통신조직법을 폐지했다. 이를 시작으로, 모레노 정부는 관련 법안들의 효력을 종결시켰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아르헨티나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2015년 12월 취임한 지 몇 주 만에 서둘러 시청각통신 서비스 관련 법령을 개정했다. 이 법령은 2009년 좌파 성향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2007~2015) 대통령 정부가 구상한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까?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두 국가에서는 키르치네르 대통령과 코레아 대통령 집권 후 군사독재 시절 통용되던 구시대적이고 초보적인 규범들을 대체할 목적으로, 각 미디어에 라디오 주파수를 다시 할당하는 법령을 2013년 시행한 바 있었다. 이 법령은 라디오 주파수를 민영·공영·비영리 부분에 각각 1/3씩 할당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데, 보수 성향의 새 대통령들은 이를 문제 삼는 것이다.
언론사 사주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아르헨티나에서는 클라린 그룹이 약 250개에 달하는 언론기관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미디어의 60%를 차지한다. 에콰도르에서도 미디어의 약 90%(1)를 부호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주파수 재할당 법령에는 언론기관의 집중화를 막는 여러 조항이 포함됐다. 예를 들어 언론기관에 허용되는 시청각 면허의 수를 제한했다. 또한, 사업권 지속기간의 경우 아르헨티나는 10년(과거에는 15년), 에콰도르는 15년(과거에는 무기한)으로 지정했고, 계약기간 갱신도 1회로 제한했다. 다소 다른 점은, 법령의 적용 범위가 아르헨티나는 라디오와 TV에 국한되나, 에콰도르는 인쇄 매체까지 포함됐다.
법령에서는 통신을 ‘공익’ 활동(아르헨티나), 또는 ‘공공 서비스’ 활동(에콰도르)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가 성립되려면, 언론은 경제적 후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은 2013년 6월 19일 과야킬에서 개최된,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제1차 언론 정상회담 출범식에서 “정보는 상품이 아니라 권리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에콰도르에서 최대 규모로 손꼽히는 피친차 은행을 소유한 에가스 그룹은 텔레아마조나스 TV 채널을 포기해야 했다. 에콰도르 법령은 한 금융기관이 한 언론기관 자본의 6% 이상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2)
이에 언론사 사주들은 신성불가침한 ‘언론의 자유’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확대해석하며 반발했다. 이와 관련 “민영언론은 선거에서 좌파의 연승에 맞서기 위해 보수 우파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게 됐다”라고 브라질의 학자 에미르 사데르는 말한다.(3)
아르헨티나에서는 일간지 <클라린>에 부정적인 ‘기사’가 5번 이상 게재되면, 어떤 권력도 권좌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통설이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이어졌으나,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된 그의 부인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국내 물가 안정을 위해 콩 수출세를 인상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4) <클라린>지는 대토지 소유주인 농민들 편에 서서 강경한 반(反)키르치네르 운동을 펼쳤다.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 대통령 측은 “<클라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플래카드를 내세우며 반격에 나섰으나, 키르치네르의 지지율은 5개월 만에 56%에서 20%로 추락했다.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과 민영언론들은 언론 보도에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전직 대통령이 2010년 9월 30일 자신에 대한 쿠데타 시도에 맞서 민간인들로 붐비는 한 병원에 총격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5) 그러나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라파엘 코레아 측은 법의 심판을 받은 언론사 사주들을 차례차례 사면했지만, 공공연히 언론을 힐난함으로써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디어가 정치운동가 행세를 하면 정치색을 띤 대응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양쪽 국가들에서는 곧 수많은 논평들이 주요 언론 속으로 강물처럼 범람하며, 소위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고 평가되는 법안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신랄한 비판을 자제하는 논평가들도 등장했다. 아르헨티나의 대학교수인 마르틴 베세라는 아르헨티나 정권이 내놓은 일부 해법들의 공정성이 의심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클라린>이 법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추진한 구조조정안은 정부가 거부한 반면, 친 키르치네르 성향의 언론그룹 <텔레페>의 구조조정안은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승인된 사례를 꼽았다. 베세라는 이 정책에 ‘이중잣대’가 적용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원주의의 확산보다, <클라린>에 대한 복수가 먼저였던 것일까?
해석하기 나름인 ‘미디어 린치’
에콰도르에서는 26조에 적시된 ‘미디어 린치(lynch)’라는 개념과 관련해 의견이 분분하다. 파리 8대학 연구원 에리카 게바라는 “표현방식이 굉장히 모호해서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다”며 우려를 표했다. 문제의 조항은 “자연인 또는 법인을 폄훼해 정치적 신빙성을 훼손하는 (…) 정보의 확산을 금지”한다. 그러나 베세라는 “정보와 의견의 차이는 흑백을 명확히 결정할 수 없는 회색영역에 있다”고 본다. 즉, 변칙적 상황이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에콰도르 당국은, 민영언론에 대한 미디어 린치 고발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아마조나스의 보도에 대해서는 입장이 달랐다. 텔레아마조나스 채널은 2016년에 6개월간 인체에 무해함을 입증하지 않고 일반 의약품을 허가한 국가 공공계약 서비스를 고발했다. 에콰도르 당국은 이 경우를 미디어 린치로 보았다. 결국 텔레아마조나스의 보도가 잘못된 것이었다. 관련법 규정은 재범 시에만 벌금을 부과한다고 명시돼 있었으므로, 텔레아마조나스는 이 방송에 대해 공개 해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긴 했으나, 예정했던 개혁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클라린 그룹이 (이 법의 합헌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작한 법적 분쟁 탓에 법은 4년이 지나서 적용됐다. 마침내 이 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됐지만 클라린 그룹은 아직 법안을 적용할 정부의 의지가 부족하다고 봤다. 예컨대 주파수 재할당에서 입찰과정은 필수인데,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예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에콰도르에서는 입찰과정이 있기는 했으나, 준비가 미흡해 공화국 검사가 무효를 선언했다.
정보통신감독원(Supercom)은 정보통신 관련법의 적용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행정당국인데, 이 기관의 마지막 감독관이었던 카를로스 오초아는 “이 법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에게 “이 법이 효력을 상실했다”고 언급했다. 모레노 대통령이 라디오 주파수 재할당 관련법을 성급하게 개정했다는 것이다.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주파수를 민간영역에 56%, 공공영역에 10%, 그리고 나머지 34%는 비영리 목적의 미디어에 할당한다는 것이다. 에콰도르와 아르헨티나 두 나라에서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다. 미디어 콘텐츠의 60%는 항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안 준수를 보장해줄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관영매체의 실종, 문어발 미디어의 약진
관영매체 영역에서는 점차 진전이 보이지만,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2007년에 라파엘 코레아 전 대통령은 에콰도르 역사상 최초의 공영 TV 채널인 ‘에콰도르TV’를 법령으로 설립했다. 2008년 그는 파산한 대규모 은행들(국가에 채무가 있고, 1999년 에콰도르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영향을 받은)이 소유한 매체들을 넘겨받아, 공공 시청각 분야를 확대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브라질에서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데 시우바(2003~2010) 정부가 2007년에 관영매체들을 새롭게 재편성해 브라질 통신기업(EBC)을 창립했다.
에콰도르와 브라질에서 관영매체들은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광고도 국가가 담당한다. 브라질 통신기업에는 ‘콘셀류 쿠라도르’라는 자문기구가 있는데, 이 기구를 구성하는 22명의 위원 중 15명은 관련 분야 전문가가 아니며, 사회 각 분야의 대표자들이다. 이 기구의 임무는 방송 채널의 자율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에서도 공공성을 수호하는 직책이 마련됐는데(6), 아르헨티나에서는 시민들의 “질의, 고충, 고발을 접수하고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에콰도르에서는 “대중과 미디어의 대화를 장려하는” 기능을 한다.
그럼에도 관영매체들은 ‘권력의 시종’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한 채 제한된 시청자만을 충족시킬 뿐이다. 브라질에서는 TV브라질을 ‘TV룰라’라고도 부른다. 아르헨티나의 관영매체들(1953년에 관영매체를 창설한 이 분야의 선두 국가)만이 간신히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시청률의 일등공신은 ‘모두를 위한 축구’ 방송인데, 이 방송은 키르치네르-페르난데스 정부와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협력해 카날7 공영 채널에서 1부 리그 경기를 무료로 중계하는 프로그램이다.(7)
모레노 정부가 해임한 에콰도르TV의 전임 편집국장인 사비에 라소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영매체가 있었기에, 민영언론과 다른 담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베세라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받아친다. 베세라는 이런 식의 발상이 바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편견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그는 관영매체가 다원주의 실현을 위해 “갈등 없는 상황을 기대한답시고 민영언론의 공격에 대응하는 수준에 만족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는 결코 도래하지 않으리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관영매체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 불과한데, 뛰라고 요구하는 격”이라고 라소는 평가한다.
관영매체의 붕괴가 별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관영매체 자체의 결함 때문일까? 여하튼 이미 죽은 채 태어났으니 성장할 기회조차 없으리란 점만은 사실일 것이다. 새로 선출된 보수주의자들 내부에서는 마녀사냥을 조직해, ‘좌파’ 세력의 집필활동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의 전철을 밟아 브라질의 전 대통령 미셰우 테메르도, 이전 시대의 진보정부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관영매체 책임자들을 단숨에 민간부문 인사들로 대체했다. 동시에 재정압박 전략도 실시하고 있다.
카날7 공영 방송의 아나운서였으나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페드로 브리에게는, “자유주의자들은 전임자들이 넘겨준 ‘흰 코끼리’(8) 한 마리를 위해 공공통신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마크리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통신사인 텔렘의 직원 40%를 해고했고, 모레노 대통령은 관영매체소속 공무원 200명을 직위해제했다. 브리에게는 “사실상 관영매체는 사라졌다”고 결론지었다. 2018년 6월 29일, 마크리 대통령은 통신기업 텔레콤과 클라린의 합병을 승인했다. 이제까지 키르치네르주의가 막아온 관영매체의 붕괴를 드디어 문어발식 미디어가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문어발식 미디어는 ‘쿼드러플 플레이(유무선 전화, 인터넷 및 케이블 TV를 결합한 형태의 서비스)’라는 결합상품을 제공함으로써 원거리 통신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다.
이야말로, 베세라가 말한 “언론의 궁극적 집중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글·안-도미니크 코레아 Anne-Dominique Correa
저널리스트, 전 에콰도르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의 딸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Resumen Ejecutivo(실행 보고서)>, Superintendencia de Comunicación(정보통신감독원), 키토, 2018
(2) 에가스 그룹이 다양한 금융수법을 통해 방송사를 허위 매각한 것은 향후 밝혀질 것이다. 2019년에도 여전히 에가스는 TV채널을 운영 중이다.
(3) Emir Sader, <O Brasil que queremos(우리가 원하는 브라질)>, Laboratório de Políticas Públicas(공공정책 연구소), 리우데자네이루, 2016.
(4) Renaud Lambert, ‘Qui arrêtera le pendule argentin? 아르헨티나, 페론 유령 벗어날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9년 1월호.
(5) Maurice Lemoine, ‘État d’exception en Équateur(에콰도르의 예외적 상황)’, <La valise diplomatique>, 2010년 10월 1일, www.monde-diplomatique.fr
(6) 아르헨티나에서는 유일한 임명직이다. 에콰도르에서는 전국 규모의 각 매체에서 경쟁적으로 이 직책을 선발한다.
(7) 마크리 대통령은 2016년 7월 20일, 이 협력사업을 중단했다.
(8) 포부만 크고, 비용만 잔뜩 들며 승산이 없는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