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세계적 아이콘' 부활하다

2008-12-01     니콜 펠레그랭 | 역사학자·인류학자

프랑스에서 1791년 9월 14일 발간된 〈여성 인권과 시민권 선언〉의 저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2007년 대선 때 여성들의 표를 찾아 나섰던 여성 후보도 아니다.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팡테옹에 여성 작가를 입성시키는 것이 꿈인 소수의 페미니스트들과 남녀 역사학자들도 아니다.

저서 『선언』 재출간 거듭, ‘진정한 남녀평등’ 주장

올랭프(프랑스혁명 시기 여성의 참정권 부여를 주장한 여성운동가‒역주)의 글 중 가장 많이 인용된 글은 1789년에 쓴 『선언』 조항이다. 그녀는 “여성은 단두대에 설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설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원칙을 공포하고 적용했다. 이 구절은 극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선언』 텍스트의 나머지 부분을 여성스럽게 손질한 탓에 더욱 그렇다. 남성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모든 권리를 주자는 주장은 구체적이며, 신선하고 강력하며 유머러스했다. 이는 전반적인 사회관계를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계몽 시대에 시작돼 현재도 시대적 당위성이 있는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 줬다.

올랭프 드 구주는 『선언』에 서명(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뜻)을 한 후 왕비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선언』은 1840년에 일부 발췌 출간된 적은 있지만, 1986년 브누아트 그루에 의해 처음으로 전문이 발간됐다. 그녀의 책자는 1792년부터 번역돼 나오기 시작한 영국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의 『여성의 권리옹호』와 달리 당대에는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에 비해 형식에 있어서 진보성이 뒤떨어졌다. 『선언』 출간 2년 후인 1793년 11월 3일 올랭프는 ‘지역 분권주의자 및 반反 로베스피에르주의자’로 몰려 단두대의 이슬로 스러졌다. 여러 번의 재편집, 재출간을 거치면서, 이 책자는 올랭프 드 구주라고 불리는 미망인 오브리(올랭프는 루이‒이브 오브리와 결혼해 아들 피에르를 낳지만, 이듬해 남편과 사별했다‒역주), 즉 마리 구주(올랭프의 원래 이름)를 페미니즘의 세계적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질곡의 운명과 선구자적 영광을 한 몸에

그러나 프랑스에선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그녀의 명성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프랑스 역사상 비극적인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두 번째 여성(마리 앙투아네트가 조금 먼저 처형당했다)으로 기록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런 진기록이 질곡의 운명을 산 한 여성의 다른 모든 영광을 순식간에 퇴색시켜 버렸다.


그녀는 귀족 아버지와 몽토방의 푸줏간 주인의 부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나서 일찍 과부가 된 후 파리로 상경했다. 이 오크 지방 출신의 여성은 자서전 작가, 혹평에 시달리는 연극 작가, ‘악명 높은’ 반노예주의자로서, 포스터와 신문을 통해 자기 생각을 설파할 줄 알았던 혁신적인 저술가였다. 그녀는 흑인 노예법 철폐, 헌법과 조세 개혁,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위기에 처한 군주 구명 운동, 남녀 모두에게 이혼과 교육의 권리 부여 등을 외쳤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인 『선언』 제1조에서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면서 법적 · 사회적 평등의 의미를 설파했다.“법은 전반적인 의지 표현이어야 한다, 모든 남녀 시민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대리인들을 통해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법은 모든 이에게 똑같아야 한다. 법 앞에서는 모든 남녀 시민이 평등하기 때문에, 그들의 장점과 재능을 제외한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오로지 능력에 따라 그들에게 합당한 존엄성, 지위, 공적인 직업을 줘야 한다.”(『선언』 제4조)

폭넓은 저술로 역사에 대한 본원적 질문

그녀의 삶과 이념은 재출간된 그녀의 여러 희곡 작품들과 각종 발표문(〈여성들 편에서〉, 〈천일야화〉, 〈축제〉 등) 덕분에 이제 잘 알려졌다. 대학들에서는 조앙 스코트, 엘레니 바리카스, 크리스틴 포레, 가브리엘 베르디에, 카트린 마송 등이 그녀의 독특한 작품들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올랭프의 유작들은 예측 불가한 요소들이 많고, 페미니스트의 적敵이라는 악명까지 얻어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강한 발언권을 발휘하며 남성이 지녀야 할 재능을 지녔다는 이유로, 그녀와 같은 여성들은 당시 ‘드센 여장부’로 통했다. 이런 선입견에다 사회적 · 경제적인 불이익까지 가중되면서, 이 여성들은 소외당하거나, 아니면 하피harpie(죽은 사람의 영혼을 나르는 존재로서 얼굴과 상반신은 추녀, 날개 · 꼬리 · 발톱은 새) 취급을 받거나 박해받곤 하였다.

선각적 여성해방운동 투사로 유명한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나 프랑스 혁명기의 작가인 롤랑 부인(1754~1793)도 신체적 · 도덕적으로 자행된 그러한 왜곡을 피해가진 못했다.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떠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동료 여성 작가들은 올랭프가 여성권익에 관한 정치적 성찰에 이바지했고, 소수자(여성과 노예)들을 위해 큰 공을 세웠음을 인정했다.

당대 가장 용감한 여성

그러나 플로라 트리스탕은 1843년 〈노동연맹〉에서 “여성의 권리를 원칙으로 인정한 첫 여성이 있었나?”라고 자문했다. 앞서간 여성 선구자들에 대한 부인인지 경멸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페미니즘 물결들은 이와 비슷한 ‘망각’을 드러냈다.

19세기에 올랭프에게서 여성 혐오증을 느낀 이들은 모질고 어리석은 어투로 그녀를 비난했다. “영웅적이고 어리석다”(공쿠르 형제)라거나, “개혁 과대망상증을 앓는 환자”(의사 귀이루아)라거나, 심지어 “기분 좋지 않은 날엔 미쳐버리고, 기분 좋은 날엔 남의 흥을 깨는 여자”(레오폴드 라쿠르)라는 등의 험담이 그런 것들이다.

21세기 초인 요즘도, 이른바 균형 잡힌 시각이랍시고 예전과 흡사하게 그녀를 에둘러 왜곡하고 있다. 구주라는 이름은 프랑스 문단에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활동가로서 당대의 왜곡된 사회상과 심각한 성차별을 다루는 토론이 있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자벨 드 샤리에르, 제르맨느 드 스타엘, 스테파니 드 장리스, 콩스탕스 피프레, 루이즈 드 케라리오 등 재능 있는 많은 여성 작가들도 자주 그녀의 가치를 망각한다.

그러나 구주는 미덕과 ‘자연’의 가면을 쓴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감히 공개적으로 도전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글·니콜 펠레그랭
역사학자 · 인류학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으로, 16~19세기 여성성과 남녀 차별에 관한 연구 작업을 해왔으며, 특히 잔 다르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