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에서 아랍인으로 산다는 것

2019-12-31     라미아 우알랄루 l 기자

라틴 아메리카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차별받는 이들은 대개 흑인과 볼리비아, 페루 또는 콜롬비아 이주민들이다. 아랍인들은 정치·경제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나, 최근 종교적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현상을 설명하려면 이들이 라틴 아메리카로 오게 된 과정과,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레바논 출신의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의 대통령이 되다.” 

레바논 보수 일간지 <안나하르>의 2016년 9월 1일 자 기사에는 테메르 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줘야만 했던 지우마 호세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수백만의 브라질 국민이 쿠데타로 여길 만큼 탄핵이 부정으로 얼룩진 것도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레바논에서는, 수도에서 북쪽으로 70km 떨어진 브타부라 출신에, 1925년 상파울루로 떠난 농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운명에 대해 열광하는 편을 택했다. 300명이 거주하는 마을의 주요 도로는 이미 ‘브라질 부대통령 미셰우 타메르 가(街)’라고 명명돼 있었다. 

미셰우 테메르의 사촌인 시장은 파란색 페인트칠 한 번으로 판자 위에 포르투갈어와 아랍어로 쓰인 ‘부대통령’의 ‘부’자를 지웠다. 국가의 수장이 된 아랍 이주민의 아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카를로스 메넴, 1989~1999), 에콰도르(압달라 부카람, 1996~1997 그리고 하밀 마우아드, 1998~2000), 엘살바도르(엘리아스 안토니오 사카, 2004~2009), 온두라스(카를로스 플로레스 파쿠세, 1998~2002) 그리고 콜롬비아(훌리오 세사르 투르바이, 1978~1982) 등에서도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랍인 후손들은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정치계에서 자리를 잘 잡았으며, 학문 및 예술 분야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예로 들 수 있는 인물로는 브라질의 작가 라두안 나사르와 밀턴 몬테네그로, 아르헨티나의 배우 리카르도 다린이나 콜롬비아의 가수 샤키라가 있다.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멕시코에 공세를 퍼부을 때, 레바논인의 아들이자 미국 <포브스>지 선정 2017년 세계 갑부 6위인 카를로스 슬림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동포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페니키아 상인들의 후예

통합의 본보기일까? 리오 브라보 남쪽의 공식역사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의 아랍인들 즉, 19세기 말부터 유입된 이들은 마그레브 지역 출신들이 아니다. 대부분은 근동 지방에서 왔다. 그들은 출신과 지역의 역사에 따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는 ‘시리아-레바논인’, 멕시코와 에콰도르에서는 ‘레바논인’, 그리고 온두라스와 칠레에서는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도처에 퍼져있는 터키인들은 당시 이 지역을 점령했던 오스만 제국과 연관이 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브라질로 이주한 이들은 16만 명으로, 아르헨티나 이주민들보다 조금 적고 미국 이주민들의 절반에 불과하다”라고 파울로 가브리엘 힐루 다 로샤 핀토가 자세히 밝혔다.

핀토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이웃 도시 니테로이의 플루미넨시 연방 대학교에서 근동지역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그는 “브라질에서 아랍인들은 유럽인 다음으로, 이주민들 중 그 숫자로는 7번째다. 하지만 이곳이든,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든 이주 자체가 많지는 않다. 그래서 이들 이주민 각자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설명했다.

베이루트에서 출발했든 트리폴리에서 출발했든 레바논에 도착한 사람들 중 일부는 미국에 정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해운회사에 속아, 리우데자네이루, 산토스, 부에노스아이레스 또는 베라크루스에 내려야 했다. 그곳들도 아메리카 대륙에 속해있기는 했다. 노동력 유입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받아들였던 다른 이주민들과 달리, 극동 출신 이주민들은 경제 위기나 프랑스·영국의 식민지배를 피해 즉흥적으로 떠나온 이들이었다. 

이런 특수성 덕택에, 브라질에서는 새롭게 도착한 이주민들이 노동자를 노예 취급하는 커피 농장으로 보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시내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에 뛰어들었다. “6,00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지만, 멕시코에서는 레바논 사람들에 대해 페니키아 상인들의 후손이므로 이윤 창출에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한다”라고 캘리포니아 소노마 대학교 역사 교수이자, 『So Far from Allah, So Close to Mexico』의 저자인 테레사 알파로-벨캠프가 지적했다.(1) 실제로, 1926~1951년 등록된 아랍인 이주민 중 45%가 자신의 직업을 ‘상업’이라고 신고했다. 

이들의 밀집은 도시를 형성했다. 상파울루에서는 도심지의 한 가운데에 ‘3월 25일가(街)’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사아라(포르투갈어로 사하라)’를 형성했다. 페루에서는 이주민 중 2/3가 상업 수도 아레키파에 정착했으며, 온두라스에서는 산페드로술라 시내에 이들이 밀집했다. 에콰도르에서는 키토와 과야킬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의 강점은? 섬유다. 파와즈 가문은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 가장 멋진 상점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고, 호세 엘리아스 나메가 소유한 ‘터키의 꽃’은 아바나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니카라과 마나과의 ‘파리’ 상점들도 아랍 이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다. 핀토는 “기록에 의하면, 라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아랍인이면서도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친 비참한 신세였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장사에 대한 재능과 역량을 발휘해 상점을 열었고, 이후 기업과 은행으로 진출해 자녀들을 변호사, 의사, 정치인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농촌에서 온 이주민들이나 도시에서 온 이주민들이나 모두 중산층 출신이었다.”

이들 국가에서 농부는 이미 통화경제에 편입돼 있었으며, 도시에서 온 많은 이들의 직업이 의사, 기자, 변호사, 대학교수였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아랍 공동체의 두드러지는 사회적 신분 상승에 대한 공식 역사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과테말라 그리고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다는 점이다.” 핀토는 이렇게 덧붙이며 웃었다. 그 원인으로, 1924년 출간된 필리프 히티(전 베이루트 미국대학교 교수)의 저서 『아메리카의 시리아인들』에 의해 이 역사가 만들어졌고, 이후 지식인 네트워크에 의해 재조명되고 확산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종교적, 지리적, 정치적으로 매우 분할된 사회에 응집력을 부여하고자 함이었다.

소수인 무슬림과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이런 이야기는, 현지 주민들이 이주민들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아랍인은 민족적으로, 인종을 개량하고 문화를 높인 것으로 여겨지는 백인 유럽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황인’도 ‘흑인’도 아니다. 새로 들어온 이주민들은, 당시 모국을 지배하던 프랑스에서 발급한 여권을 가지고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많은 혼란을 빚어냈다. “터키인들은 지도층이 분류하던 인종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쫓겨나지도, 환영받지도 않는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었다”라고 핀토는 분석했다. 많은 이들이, 상업을 현대화하고 신용거래를 소개한 이주민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한편, 유력인사들이 지배하는 대부분의 농촌 사회에서는 이들을 음흉하고 돈벌이에 혈안 된 자들이라고 여긴다. 문화적인 차이는 외국인 혐오를 부추긴다. 레바논식 생식(生食) 때문에 아랍인들은 식인종이었다는 오해도 받았다. 1959년 12월 8일 브라질 남부 쿠리치바에서 발발한 ‘빗의 전쟁’처럼, 혐오는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 한 상인이 자신에게 빗을 하나 산 경찰에게 영수증 발급을 거절했다. 이 거래는 대부분 아랍 이주민들 소유였던 120개 상점에 대한 약탈과 파괴행위로 변질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은 통합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했다. 외모는 유럽인들과 비슷했던 그들은, 아랍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유럽인들과 동화되고자 했다. 이는 민족주의가 예민했던 시기인 1930~1940년대에 특히 두드러졌다. 아르헨티나에서 멕시코까지, 이들은 자녀들에게 더 이상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적·물질적 성공과 부분적인 문화적 적응은 이들이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사회에 수용될 수 있게 했다. 핀토는 설명했다. “일부는 가족의 전통을 통해, 일부는 아랍의 관습을 통해 스스로를 아랍인으로 인식한다. 작가, 영화배우 같은 이들은 자신의 출신을 영감의 원천으로 여긴다. 언어, 종교, 의복과 달리, 살아남은 유일한 문화적 요소는 음식이다.”

모든 라틴 아메리카 내 근동 이주민들은 아랍 여성 특유의 매력이나, 사막 유목민이었던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상업적 재능 등 아랍의 고정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살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하는 방법들

핀토에 의하면, 이곳 지식인들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나태하고 비합리적인 민족으로서의 아랍인들을 묘사하는 것과, 이베리아 반도에서 긴 세월 이어진 아랍인들의 삶을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일부로 만드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해당 공동체 사회의 엘리트들은 오리엔탈리즘을 자신들과의 ‘다름’을 설명할 문화로 채택했다. 대표적으로 발명된 전통인 벨리댄스는 시리아-레바논 센터가 주최하는 행사들 중에서 늘 등장하는 요소다. 

이런 아랍 엘리트 클럽들은 주요 대도시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 클럽들은 멕시코시티, 과달라하라, 베라크루스, 메리다, 몬테레이에서 멋들어진 건물 안에 있다. 테레사 알파로-벨캠프는 이 클럽들에 대해, “유력인사들이 멕시코인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기업 분야에서 레바논 문화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성공했고, 그 성공을 설명해주는 자신들의 뿌리를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1996년, 억만장자 카를로스 슬림이 아민 게마옐과 바시르 게마예 전 대통령들의 조카인 수마야 도미트 게마옐과 결혼할 때 아무도 그 결혼에 대해 비방하지 않았다. 브라질의 카니발도 마찬가지다. 카니발은 유희적인 방식으로 통합을 나타내며(카니발처럼 브라질적인 게 있을까?), 이상적인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한다. 남자들은 베두인을, 여자들은 오스만제국 술탄의 궁전에서 바로 나온듯한 하렘의 여인들을 가장하며 뽐낸다. 이들은 마르치아도 부르는데, 이 카니발의 ‘짧은 행진곡’들은 상상 속의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1940년 레바논 이주민 후손인 다비느 나세르와 안토니오 나사라가 작곡한 <알라-라 오>라는 곡은 대상(大商)의 유목 생활, 사막과 이슬람을 삼바 리듬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곡은 오늘날까지도 명곡으로 인정받는다.

모하메드 엘 하지는 1991년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이후, 신속하게 자리를 잡기 위해 무지가 섞인 이런 오리엔탈리즘을 활용했다. 그는 “나는 늘 내가 모로코인이라고 소개했지만, 내가 만났던 대학교 교수들조차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모로코와 인도를 혼동했다”라며 웃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몰랐다. 덕분에 나는 흑인, 원주민 출신 라틴 아메리카인(볼리비아인, 파라과이인, 페루인 등), 노르데스치인들을 소외시키는 브라질 사회의 암묵적인 (민족적, 지리적, 사회적) 위계를 피해 가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브라질 사회 내의 지위는 사회적 수준과 지리적 출신의 결합에서 생겨난다”고도 말했다. 라바트의 일간지 <로피니옹>의 전직 기자는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학교(UFRJ)의 커뮤니케이션 전공 교수가 됐다. 그의 딸에 대해 말하자면, “모로코인 아버지를 가진 브라질 여성이다. 여기에서는 유럽처럼 ‘2세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랍인은 테러리스트다?

이 나라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발견하며 기뻐했던 엘 하지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테러 이후 시선이 바뀐 것을 느꼈다. 최근 사우바도르 다바이아에서 박사 논문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그는 논문 지도교수의 농담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지도교수는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며, 그에게 언제 폭탄을 던질 것인지 물었기 때문이다.  

“아랍인을 테러리스트로 여기는 이런 인식이 브라질에서 빠르게 확산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아랍 출신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진 분위기 때문에 이슬람은 종종 위험한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UFRJ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이며 브라질 200년 이주 역사를 바라보는 여론에 대해 박사 논문을 쓴 구스타브 바레토가 평가했다. 

이슬람 종교는 이 지역에서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극소수에 불과하다.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기구에 의하면, 이 대륙에 600만 명의 무슬림이 있고 이 중 아르헨티나에는 70만 명(인구 4,300만 명당 한 명), 브라질에는 150만 명(인구 2억 600만 명당 한 명), 베네수엘라에는 12만 명(인구 3,100만 명당 한 명) 그리고 멕시코에는 11만 5,000명(인구 1억 2,200만 명당 한 명)이 있다. 

‘아랍인은 곧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가장 강한 곳이 ‘3국 접경 구역’이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고 파라과이 국경이 맞닿은 이 구역은 늘 밀수입의 천국이었고, 미국 당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곳을 ‘테러세력 범위’로 지정했다. 이어서, 1970년대 이후 레바논 내전 기간에 이곳으로 온 두 번째 아랍 이주민들의 물결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대다수가 무슬림이었으며, 위성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해 아랍어와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까지 브라질 정부는 이슬람 혐오 분위기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렇지 않다. 특히 파라과이 정부는, 아랍 출신 시민들에 대한 임의 구금을 확대하고 있다.” UFRJ의 인류학자 페르난도 라보시가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지역에서 이슬람 거부 현상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특히, 베일이라는 이슬람 표식을 드러낸 여성들에 대한 공격이 증가했다. 

2016년 7월, UFRJ의 물리 연구소의 교수들은 알제리계 프랑스인 동료 교수 아들렌 히쉐르의 추방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교수는 2012년 프랑스에서 테러리즘 관련 유죄선고를 받았다. 교수의 전자우편함을 조사한 결과, 그가 알카에다 이슬람 마그레브 지부의 간부로 추정되는 어떤 이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는 2년 반의 수감 생활 후 석방됐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추방하는 데 브라질이 쏟은 열성은 전대미문의 수준이었다.

언론(유럽과 미국의 편견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거대 언론)의 압박 외에도, 엘 하지는 이런 태도 변화의 원인을 복음주의자들의 세력향상, 특히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이들 복음주의자 대표들의 부상에 있다고 본다. 90여 명의 브라질 국회의원들이 복음주의 단체가입 사실을 밝혔고, 외교정책 변화를 요구하면서 브라질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층 온건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나섰다. 

“많은 복음주의자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성지와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혼재하는데, 이런 혼동은 아랍인들과 무슬림에 대한 적대적 견해를 두드러지게 한다”라고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2014년 7월 하느님의 나라 세계 교회(UCKG)가 상파울루에 세운 솔로몬의 성전 개관식 날, 이스라엘 국가가 브라질 국가에 뒤이어 나왔다는 사실도 상기시켰다. 일부 복음주의 활동가들은 물론, 가톨릭에서도 이제 모든 것 특히 이슬람에 대항해 ‘기독교 정체성’을 옹호하고 있다.

 

 

글·라미아 우알랄루 Lamia Oualalou
중남미 전문 기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Theresa Alfaro-Velcamp, 『So Far from Allah, So Close to Mexico: Middle Eastern Immigrants in Modern Mexico』,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