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치즘으로 진화한 유대-볼셰비즘의 신화

혼돈의 역사, 반공주의가 반유대주의로 번질 때

2019-12-31     폴 헤인브링크 l 럿거스대학교 역사학 교수

제레미 코빈부터 장 뤽 멜랑숑에 이르기까지, 좌파를 겨냥한 반유대주의 공세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붉은 깃발은 오늘날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 증오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과거에는 공산주의가 곧 유대인들의 음모로 통하던 시기가 있었다. 10월 혁명 이후의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과대 망상적 사고는 유대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로 이어졌고, 유럽 국가들은 이 참극에 침묵으로 동조했다.

 

11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 이는 지난 2018년 10월 2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한 유대교회당에서 로버트 보워스가 저지른 총기 테러 사건의 결과다. 로버트 보워스는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인종차별 메시지를 SNS에 수차례 게재했다.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도를 포함해 달갑지 않은 이민자들을 미국으로 유입시켜, 백인사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이었다. 

2017년 8월, 미국 신나치주의자들은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모여 “유대인은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지 않을 것(The Jews will not replace us)”이라는 구호를 연호했다(프랑스 극우파의 주장 “당신은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지 않을 것”에서 빌린 말). 스칸디나비아, 영국, 폴란드 및 그리스에서는 몇몇 집단이 나서서 유대인 소유 언론과 전 세계에 퍼져있는 유대인 자유주의 동맹이 개발도상국민들의 유럽 이주를 조장해 이주민으로 유럽인을 대체하려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공산주의는 유대인들의 창조물”

현재 반유대주의 음모론은 유대인들을 이민의 선동자, 즉 국가와 가족의 가치를 파괴하는 집단으로 그리고 있다. 과거 ‘유대인의 음모’에 대한 공포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20세기에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것은 유대-볼셰비즘 신화로, 주류사상과 언론이 급진좌파에 반유대주의의 딱지를 붙이려 만들어낸 허상이다.

이 ‘공포소설’의 옹호자들은 공산주의를 범죄화하고, 이를 유대인들이 창조해낸 발상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혁명가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권력을 전 세계에 확장시켰으며, 반유대주의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1914~1918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동유럽제국 붕괴에 따른 혼란 속에서도 유대-볼셰비키 신화는 러시아 반혁명 백군과 우크라이나 정부에 충성하는 무장단체들 사이에서, 꺼지기는커녕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 결과, 유대인 18만 명이 목숨을 잃고 50만 명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에서는 볼셰비키 정권이 덧없이 붕괴한 후 반혁명론자들이 3천여 명을 살해하는 백색테러(혁명파에 대한 반혁명파의 보복)를 일으켰는데, 희생자의 절반은 유대인이었다. 공포에 질린 서유럽과 미국은 동유럽에서 피신한 유대인들이 ‘혁명 바이러스’를 퍼뜨릴까 노심초사했고, 급기야 국경폐쇄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아돌프 히틀러는 소비에트 연방을 ‘유대-볼셰비키 대국’이라고 묘사하며, 당시 나치가 패권을 쥐려 했던 (문화국들로 이뤄진) 유럽에 근본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가진 국가라고 비방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에 선전포고했을 때, 나치는 선제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자비한 유대인 볼셰비키들이 이끄는 동양의 야만인 무리의 유럽 공격을 막고자 하는 것”이라고 선전을 벌였다. 대륙의 생존은 독일의 승리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발상은 점령당한 소비에트 연방의 유대인 공동체를 대거 말살하는 동기로 작용했고, 이후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하는 신호탄이 됐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나치 협력자들은 히틀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집단학살에 가담했다.

이들, 가해자들은 유대-볼셰비즘의 신화를 정말 신뢰한 것일까?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레온 트로츠키의 본명은 레프 다보비치 브론스타인이 아니던가? 저명한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물론, 1919년부터 1926년까지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을 지낸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를 비롯해 혁명 이론가 로자 룩셈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주요 혁명가들은 모두 유대인계였다는 점만 봐도 명백하다. 또, 양차 대전 사이, 유럽 언론인들은 유대인들이 많은 공산당 내에서 중책을 점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혁명통치평의회 48명 중 30명이 유대인이었다는 집계결과도 있다.(1)

이런 근거는 유대-볼셰비즘 신화에 마치 진실이 담겨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통계치는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지만, 공산주의 운동에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1920년대 폴란드 공산당의 20~40%는 유대인이었으나, 폴란드 유대인 중 공산당을 지지하는 비율을 7%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지속해서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은 미래에 대해, 다양한 비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많은 유대인이 공산주의보다는 시온주의나 분트주의,(2) 혹은 사회주의 등의 이념과 사상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또한, 대다수 유대인에게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종교를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도덕적 비용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국가주의의 발흥에 힘입어 국가에 헌신하려는 이들도 있었고, 종교적 신념 등에 의해 정치를 멀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근대성은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줬다. 따라서 공산주의자가 된 유대인들에게만 편향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하다.

 

포드도 전파한 ‘시온의정서’의 효과

물론 음모론자들에게 이성적인 사고는 관심 밖의 영역이다. 루마니아의 한 공무원은 1941년 베사라비아(현재의 몰도바)에서 철수한 붉은 군대와 유대인의 협력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이 보고서에 기술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라며 분개했다. 이 보고서는 “볼셰비키에 동조한 유대인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라고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볼셰비즘의 신화는 검증이나 반증이 필요한 논란거리가 아니다. 때로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유대인을 음해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제기된 수많은 음모론 중 하나다.

반유대주의적 망상 속에서 ‘공산주의자 유대인’이란 ‘유대인 은행가’ 상(像)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유대인 은행가의 원형은 독일-유대계 혈통의 국제적 금융 재정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고정관념은 중세 이래 유럽문화에서 줄곧 이어져 온 주제인 무질서와 악(惡)에 유대인을 결부시키고 있다. 결국, 유대-볼셰비즘을 주제로 삼은 음모론은 과거부터 이어진 우화에서 모티프만 변형시킨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1917년 이후, 혁명의 위협에 직면해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지배 계층의 위기의식은 1903년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려 만든 위서인 시온의정서가 널리 전파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때 제기된 각종 주장은 오늘날에도 일부 반유대주의 웹사이트를 떠돌고 있다. 당시 미국 자동차 제조업자 헨리 포드는 자기 소유의 주간지 <디어본 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에 시온의정서를 게재했다. 이 글은 이후 재번역돼 유럽에 소개됐는데, 그 출처가 영미권이라는 점에서 더 큰 신뢰를 얻었다. 

헝가리 보수 지식인 세실 토르메이는 볼셰비키 준군사조직 헝가리소비에트 공화국 국방인민위원 티보르 서무에이를 마치 사형집행인처럼 묘사하며 “증오에 찬 비밀결사 조직원, 그는 특히 엄격하게 종교의식을 준수하는 동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광신도적인 종파에 속한다”라고 주장했다.(3)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이전부터 유대-프리메이슨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극우 가톨릭 언론이 유대민족을 세속적 공화정 문화와 결부시키면서, 상상 속 유대인 혁명가를 타락한 무리의 목록에 추가했을 정도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초기에 유대인 문제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하는 단서로 이 의정서를 활용했고, 반 공산주의자들은 사방에서 소련에서 유대인들이 행했다는 테러 혐의 등에 관한 괴담을 퍼뜨렸다. 그들은 유대-볼셰비키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을 배경으로, 순수인종주의, 사회질서 및 유럽 문명에 대한 엄청난 이론을 쏟아냈다.

 

출판업계로 번진 반유대주의 망상증

유대-볼셰비즘에 관한 과대망상증의 활용은 정치 분야에 그치지 않았다. 출판업계에서도 일종의 수익보증 수표로 통하기에 이른다. 많은 언론인과 작가들이 유대-볼셰비키에 관한 선정적인 이야기를 찾아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타임스>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로버트 윌튼은 1918년 유럽으로 돌아와 파리에서 『러시아의 고통』이라는 제목으로 혁명의 원인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는 영국과 미국에서 먼저 출판됐고 2년 후에는 프랑스어 번역본이 출간됐다. 

이 책에서 윌튼은 볼셰비즘이 러시아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혁명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잘못 해석해 러시아에 전파한 결과이며, 유대인들이 만든 계략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편다. 영국에서 대중적인 호기심을 자극해 인기를 구가한 그의 여러 작품 중에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로마노프 가(家)의 최후를 다룬 작품도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황제 일가에 대한 처형을 유대인 의식에 따른 살인 행위로 분석하기도 했다.

한편, 음모론자 네스타 웹스터는 젊은 윈스턴 처칠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처칠은 팔레스타인 땅에 나라를 건국한 시오니즘의 힘에 경탄하면서도 프랑스 혁명에 가담했다고 알려진 유대인들의 역할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웹스터 여사가 능수능란하게 서술했듯, 유대인들은 일말의 기회도 놓치지 않고 거대한 제국 러시아를 휘어잡았다”라고 기술했다.(4)

이 음모론자들은 저 멀리 외국에서 일어난 대격변과 다가오는 위협을 연관지으며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특히 새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 정부를 피해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피신해온 이민자들은 청자의 구미에 맞춰 볼셰비키 유대인들이 저지른 박해에 관한 과대망상적 허구를 풀어내곤 했다. 이렇게 유럽 전역에 전파된 반유대 사상은 유대-볼셰비즘의 망령을 신뢰할만한 사실인 양 보이게 했다. 이후 이런 각종 유언비어는 국경을 통제하고 유대인의 혁명 테러의 위협을 근절하는 실질적인 정책에도 영감을 줬다.

 

좌파진영에도 영향을 준 ‘신화’

아울러, 이렇게 형성된 유대-볼셰비키 신화는 좌파진영에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1945년 이후, 각국에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들은 국민의 의혹을 마주해야 했다. 먼저 헝가리에서는 마티아스 라코시 공산당 서기장과 그의 오른팔 격인 에르뇌 게로와 미할리 파르카스, 그리고 강력한 권한을 쥔 요제프 레바이 문화부 장관, 이 4명의 당 지도자가 모두 유대계였다. 이들이야말로 유대인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었다. 루마니아에서는 195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하나인 아나 파우커 외무장관도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1952년 ‘시온주의 음모’로 당내에서 숙청됐고 대중의 뇌리에 ‘치마 입은 스탈린’이라는 증오 섞인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5)

공산당 지도부는 이런 의혹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국민과 마찬가지로 당 내부에서 불거진 반유대주의 징후를 외면한다. 지도부는 ‘기생적’이고 ‘비생산적인’ 중상 모략가들로부터 ‘정직한 노동자’를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 선동을 펼쳤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반유대주의자들, 그리고 악명 높은 나치 협력자들이 선거인 명부에 포함돼 있다”라고 주장했다. 전 루마니아 철위대의 파시스트 군단을 사면한 파커는 당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특히 노동자계층 사이에서 반유대주의자가 많았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당은 유대인 비밀 조직에 매수돼 있다는 비난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비판은 당 내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뿌리 없는 세계주의(유대인)’를 박해한 스탈린 통치(1949~1953)가 끝난 후에도, 시온주의 혐의는 위성국가의 공산당 내에서 정치적 반대자들의 냉소적 무기로 널리 이용됐다. 1968년, 폴란드에서는 반체제 학생(그중 일부는 유대인이었다)을 시온주의 요원으로 부르며 악마시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 집단학살 이후 폴란드 사회에 남아있던 집단적 히스테리에 불을 질렀으며, 유대인 2만여 명이 폴란드에서 추방됐다. 그렇게 해서 1970년에는 폴란드에 남아있는 유대인 인구가 1만여 명으로 줄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당이 붕괴한 이후 유대-볼셰비즘 문제는 국가 차원의 추모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유대-볼셰비즘 신화 형성에 사용된 각종 이념적 지표는, 형태만 달리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0년대에 반동우파는 유대-볼셰비즘 위협에 대항해 기독교 유럽에 방벽을 쌓으려 했다. 최근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유대-볼셰비즘이 이슬람화된 서유럽, 즉 ‘유라비아(Eurabia)’라는 망령을 퇴치할 해독제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윌리엄 피어스(우익 운동가 윌리엄 루터 피어스의 가명)는 자신의 소설 『터너 일기 The Turner Diaries』(1978)에서 흑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전 세계의 백인사회를 파괴한다는 이야기를 펼쳤다. 오늘날 열렬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터너 일기』 등 과거 문헌에서 영감을 얻어, 무슬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유대-볼셰비즘의 신화는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유대인 음모의 근원이 되는 과대망상증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글·폴 헤인브링크 Paul Hanebrink
럿거스대학교 역사학 교수(New Jersey). 『A Specter Haunting Europe: 
The Myth of Judeo-Bolshevism(유럽을 떠도는 유령: 유대-볼셰비즘 신
화)』(Belknap Press, 케임브리지, 2018)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William O. McCagg, ‘Jews in revolutions: The Hungarian experience 혁명 속 유대인. 헝가리의 사례’, <Journal of Social History>, 제2권, 1.6호, 페어팩스-옥스퍼드, 1972년 가을(1호).
(2) Bundisme, 광범위한 사회주의 투쟁의 일부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비종교적 유대인 조직 ‘Bund’의 사상.
(3) Cecile Tormay, 『An Outlaw’s Diary 무법자 일기』, Philip Allan and co, 런던, 1923.
(4) Winston S. Churchill, ‘시오니즘 대 볼셰비즘. 유대인의 영혼을 위한 투쟁’, Illustrated Sunday Herald, 런던, 1920년 2월 8일.
(5) Robert Levy, Ana Pauker, 『The Rise and Fall of a Jewish Communist 유대인 공산주의의 흥망성쇠』,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버클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