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어부들
어업은 프랑스에서 가장 위험한 산업 분야다. 매년 10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낼 만큼 가혹한 노동조건에 내몰린 많은 선원들은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어떤 이들은 마약에서 도피처를 찾기도 한다. 자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움을 겪는 선원들을, 피니스테르(Finistère: 프랑스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지역. 지명은 ‘땅끝’을 뜻하는 라틴어 ‘Finis Terræ’에서 유래함-역주)에서 만나봤다.
지시는 묵묵하게 이뤄졌다.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엔진만이 털털거리며 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바다 한가운데, 배 바로 옆에서는 정어리 한 무리가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노란 작업복 차림의 선원 6명이 커피잔을 내려놓은 후, 장화를 신고 갑판으로 달려나갔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시작해!” 선장인 토마 아몽이 선교(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건너질러 다리처럼 만든 것-역주)에서 외쳤다. 선원들은 즉각 정어리잡이용 붉은색 대형 그물을 바다에 던졌다. 항구에서 막 출항한 ‘워 로그 3호’는 속도를 올리며, 콩카르노 만에 반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피니스테르 지역 선원 약 2,500명의 일상은 이런 지긋지긋한 고기잡이 생활의 반복이다(실제 활동 중인 선원과 어선을 기준으로 할 때, 피니스테르 지역은 브르타뉴 어업 분야의 50%를 점유하고 있다). 몇 분 만에 그물은 물고기들로 가득 찼다. 그물을 당겨 물고기를 배에 올리느라 선원들의 몸은 굽어졌고 팔뚝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일을 신속하게 끝내기 위해,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배의 앞과 뒤에서 3명의 선원들이 찬물을 뿌리며 긴장한 얼굴로 작업을 이어나갔다.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는 작은 실수도 큰 사고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초췌한 표정으로 알랑 다우달은 무려 4t이나 나가는 연심(鉛心)로프를 끌어당겼다. 그가 몇 번 손짓하자, 동료들은 물에 젖은 300m 규모의 그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어린 선원은 배 뒤에서 그물에 연결된 10여 개의 부표를 하나씩 회수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물과 함께 정어리 떼가 바다 표면으로 끌려와,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선 앞쪽에 설치된 크레인에 연결된 커다란 뜰채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300kg에 달하는 정어리들을 들어 올렸다. 파닥거리며 물을 뚝뚝 흘리던 정어리들은 곧 선창 아래 얼음에 파묻히는 신세가 됐다. 선원들은 같은 작업을 반복했고, 어선에는 콩카르노 지역의 2월 할당량인 정어리 3t이 실렸다. 여름이 되면 할당량은 10t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어로 작업은 보통 전날 오후 2시에 시작해 다음 날 오전에 끝나지만, 투망 작업은 쉼 없이 계속된다.
전체 직종 평균의 13배에 달하는 사망률
“언제 출항할지는 알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요.” 배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다우달이 말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30대의 다우달은, 금발 미녀의 나신 사진이 당당하게 걸려 있는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에는 정말 고생했다니까요.” 그날 밤 작업은 한층 고됐다. ‘워 로그 3호’의 선원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콩카르노만의 여러 섬 뒤편에서 전갱이 떼를 잡았다. 그러다가 새벽 5시가 돼서야 항구로 돌아왔다. 선창이 꽉 차면 배는 뭍으로 돌아오고, 선원들은 물고기를 하역하고 정리한 후 경매장으로 가져간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시각, 비로소 도시는 기지개를 켠다.
뱃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하나 있다. 다우달이 설명했다. “우리는 배 위에서의 삶, 망망대해에서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해요. 배에서의 일은 배에 남겨둬야 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말해 줬다. “감출 만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는 18세에 선박기관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기 시작했다. 다른 신입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트롤어선을 타고 원양어업에 나섰다. 출어기간 약 2주 동안, 선상에서의 작업은 끝날 줄 몰랐다. 내장 제거, 세척, 냉동보관, 정리… 생선은 몇 톤이나 됐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50kg 나가는 아귀도 있었는데, 겨우겨우 옮기고 나서 갑판으로 돌아가면 물고기가 허리춤까지 쌓여 있어요. 정말 지긋지긋했죠.”
스코틀랜드 서쪽의 매서운 바람은 때때로 갑판에 결빙을 만든다. 이제는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가 슬쩍 말했다. “추위도 추위였지만, 가장 힘든 건 두려움이었어요.” 몇 미터나 되는 파도가 요동치는 배를 집어삼키곤 했던 2주간의 첫 출어 때, 그는 크게 앓았고 체중이 7kg이나 빠졌다. “뭍에서 한참을 떨어져 나왔을 때,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어요.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당장 돌아가고 싶어!’ 뭐, 물론 돌아가기는 글렀으니 입 다물고 일할 수밖에요.” 갑판에는 생선의 머리와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선원들은 항상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다. “항상 뭔가 붙잡을 만한 것을 찾아야 해요. 선원이라면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일이죠.”
정부 조사에 의하면, 현재 어업에 종사하는 선원 1만 5,000명 중에서 매년 1,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다. 2016년 어업 분야의 사고 빈도수는 심지어 건설업(공공부문과 민간 부분 포함)에 비해서도 23% 높았으며, 사망률도 최고였다. 어업 분야의 사망률은 프랑스 전체 직종 평균 사망률의 13배에 달했으며, 건설업 부문에 비해서도 5배 높았다.(1) 선원들은 종종 몸의 균형을 잃거나 어망에 발이 걸려서, 또는 파도에 휩쓸려서 추락한다. 이런 추락사고는, 가끔씩 일어나는 난파사고와 함께 선원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선원 건강지원국 최고 의료 책임자인 티에리 소바주는 각 담당 구역의 선원들을 진료하는 환경연대부 소속 촉탁의사 약 50명을 감독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결과를 내놓았다. “경제적 압박에 내몰린 선원들은 타 직종 종사자들에 비해 많은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선주와 선원 모두 어획량에 비례해 보수를 받기 때문입니다. 많이 잡아야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계속 고기잡이를 나가야 합니다. 선원들이 피로에 시달리든, 며칠 동안 바다에서 작업을 계속했든, 잠을 두 시간밖에 못 잤든, 물고기가 있는 한 작업은 계속됩니다.” 게다가 그들은 통증이 있어도 병가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마르세유에서 여러 해 일한 바 있는 이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말이다.
정신을 바닥까지 갉아먹는 트라우마
다우달은 털어놓았다. “지옥 같은 한 달을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 생각이 정신을 갉아먹는다고요. 어쨌든 일은 제대로 해야 하니까요. 문제는 돈이죠.” 어업 종사자의 수입은 나쁘지는 않다. 다우달의 평균 연 수입은 세후 약 3만 유로(한화로 약 3,950만 원), 전체 어업종사자의 연평균수입은 세전 약 3만 5,000유로(한화로 약 4,600만 원)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크다.
낡은 어선은 사고위험을 높인다. 젊은 선주들은 새 어선을 살 비용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선원들이 30년이 넘은 어선을 타고 일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신형장비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다. 해난사고조사국장인 장-뤽 르리부는 말했다. “선원들은 종종 갑판 위에서 새로운 장비들 때문에 당황합니다. 위험 상황을 피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낡은 어선들이 항해 지원 장비들을 장착할 경우, 신형 어선에 장착한 것처럼 쾌적하지 않습니다. 낡은 어선은 방음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박 내 소음은 선원들의 휴식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선원들이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쌓인 피로는 사고를 유발합니다.”
프랑수아 쿠르탕은 “이 직업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16세에 18m짜리 참치잡이 배의 견습 선원이 된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다. 그는 곧 랍스터와 왕가리비 위주의 갑각류 어획을 주로 하게 됐다. 그는 치열하게 일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일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함께 일하던 선주가 사망했다. 새로운 선주는 그와 합이 잘 맞지 않았다. “온갖 갈등이 쌓여서 일이 되지 않았어요.” 결국 그에게 한계가 왔다. 의사는 그에게 ‘번아웃 증후군’과 ‘심각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다른 배를 타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쿠르탕은 새 출발을 기대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선주가 혼자 배를 몰고 나갔습니다. 그날 날씨가 안 좋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어요. 자살이었던 걸까요? 우리가 아는 건 그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모든 걸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더 일찍 그만뒀어야 했어요. 이 모든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생각을 어쩔 수 없어요.” 그는 은퇴를 11년 남기고 2014년 선원 일을 그만뒀고, 굴 양식업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트라우마 상황을 자주 떠올린다. 낭트, 불로뉴쉬르메르, 생나자르에서 관련 연구를 수행한 임상심리학자 카미유 제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업종사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비율은 군인, 소방관과 비슷한 수준의 고위험군입니다. 그들은 작업 내내 사고, 익사체, 해난, 심지어 해적 행위 등에 반복적으로 처하는데, 이것이 트라우마를 만듭니다.”
이런 심리적 충격은 억압된 채 있다가 나중에야 증상을 통해 나타난다. 그 증상에는 우울증, 편집증, 심혈관 질환이나 근골격계 질환 같은 신체적 질병이 포함된다. 카미유 제고는 설명했다. “선원들은 집에 가서도 좀처럼 말을 하지 않습니다. 집은 가족들의 공간이고, 가족들은 집에 불안을 끌고 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선원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몇 년 동안 방치하는 것입니다.”
마약, 그리고 ‘만선의 밤’에 중독되다
그중 대다수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 선원건강지원국이 대서양 연안 지역을 대상으로 2013년 실시한 조사에서, 선원 1,000명 중 28%가 대마초 양성 반응을, 4.5%는 코카인 양성 반응을 보였다. 45세의 마티유(가명)는 현재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잘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삶이 통째로 망가지는 경험을 했다. 23세 때, 암스테르담에서 주말을 보내던 그는 호기심에 코카인에 손을 대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 코카인을 사러, 딜러에게 갔더니 헤로인밖에 없다는 겁니다. 헤로인을 했더니 갑자기 모든 근심거리가 다 사라지더군요.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피로, 통증 전부 다요.” 그 뒤로 그는 주말이면 암스테르담에 왔고, 딜러는 열차 플랫폼에서 그에게 약을 전달했다. 어떤 때는 먼저 하선한 선원들이, 뒤이어 도착할 동료들의 몫까지 사기도 했다.
마티유는 말했다. “바닷일이라는 게 참 어려워요. 옛날 사람들이 해냈던 수준에 맞춰야 하고, 남자다움도 보여줘야 하죠. 하지만 우리는 사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아이들에 불과해요.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그저 겉으로만 강인한 척하는 수밖에요.” 배에서는 그래도 수부텍스(마약 치료제)로 금단증상을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뭍에서는 헤로인 없이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바다에서 돌아오면 영 기력이 없어져요. 그때 한 번 하고 나면 또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거죠.” 그는 목요일에 하선해서 월요일에 다시 승선할 때까지 한숨도 못 잘 때가 많았다고 했다. 술과 약물로 버텼던 것이다.
로리앙 시에 있는 ‘모르비앙 약물중독 예방 및 치료 지원센터’의 조정관인 크리스틴 라티미에는 말했다. “선원들은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청년들이 쉽게 자극에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990년대 프랑스의 여러 항구에서 헤로인이 유행하는 것을 봤다. 선상 사고에 책임이 있는 선주들은 이런 마약 소비에 우려를 표했고, 의사들은 왕진 중에 마약검사를 강화했다. 라티미에는 설명했다. “어로 활동 중 선원들은 아주 강한 신경생물학적 자극을 경험합니다. 반면 그들이 뭍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일종의 하향 단계에 있게 됩니다. 어떤 것에도 흥미를 잃는 것이지요. 이때 코카인이 자극을 재현하고, 뒤이어 헤로인과 대마초가 공허감을 완화하고 고통을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딜러들은 마티유 같은 청년들을 잘도 찾아낸다. 그들은 한 번에 수천 유로를 벌면서도 부양가족은 없다. 라미티에가 덧붙였다. “도박으로 치면 ‘잭팟’ 같은 겁니다. 1만 유로 상당의 귀족돔이나 랍스터를 잡았던 밤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원들을 보면, 잭팟을 터뜨린 도박꾼과 비슷한 흥분상태를 보입니다.” 마티유는 마약 때문에 결국 빚을 지고 말았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직접 마약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체포돼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기간, 그는 마약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출소 뒤 그는 이사를 했고, 기존의 인간관계를 모두 끊어버렸다. 4년 후 그는 약물중독 치료제까지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었다. 4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그는, 청년들이 건강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의 인생역정을 들려주고 있다. 물론 그 자신도 알고 있다. “제대로 된 선원은 항상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남획방지라는 목표하에 어업계는 30년에 걸쳐 거듭 폐선계획을 실행해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절반 정도의 어선을 폐기했다. 길비넥 지역 수산위원회 전 회장이자 선원이었던 로베르 부게옹에 의하면, 2000년대에 이뤄진 폐선 작업은 보상금이 과다했기에, 오히려 낡은 어선을 폐기하는 데는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비난조로 말했다. “아직도 기억이 나네요. 고작 2년 된 어선을 폐기하면서, 80만 유로(한화로 약 10억 5,000만 원)를 받아 간 선주도 있었어요. 세금도 내지 않고요!” 부게옹은 그 선주의 자녀세대가 새로운 어업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1세기에 적합한, 훨씬 안전하고 쾌적한 어업을 말이다.
브렉시트가 이뤄지면, 프랑스어선은 영국 해역에 접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프랑스 어획량의 30%는 영국 해역에서 나온다. 한층 커진 불확실성 속에서, 어업은 더 이상 매력적인 산업이 아니다. 선원 6명 중 1명은 2020년까지 은퇴할 예정이다. 과연 누가 그들의 뒤를 이을 것인가?
글·알리스 레이보 Alice Raybaud
기자.
번역·오규진 mrcrazyani@gmail.com
번역위원
(1) Jean-Baptiste Malet, ‘Le vieux monde et la mer 노쇠한 세상과 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7월호·한국어판 201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