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들이 연구를 두려워할 때

2011-03-10     하워드 S. 베커

사회과학 연구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무엇인가? 연구자들이 정계·법조계·재계에서 각종 압력을 받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안일주의에 빠진 학계, 기존 질서의 지각변동을 꺼리는 대학 책임자들이 자행하는 더 음험한 형태의 검열도 존재한다.

터키의 여성 사회학자 피나르 셀렉은 거리의 아이들, 성전환자, 군복무제, 쿠르드족 문제 등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다가 그 대가를 호되게 치렀다. 셀렉은 1998년 이스탄불의 ‘이집트 바자르’에서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2년6개월 동안 구금되어 고문당했고, 지난 2월 9일 법원에서 세 번째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6년과 2008년에 열린 공판에서 재판부는 가스통이 우발적으로 폭발하면서 사고가 발생했으며, 셀렉을 범인으로 지목한 이들의 증언은 고문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셀렉의 석방을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벌인 서구 동료 학자들은 적어도 이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서구 학자들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더 교묘한 형태의 검열이 이들의 자유를 통제한다.

민감한 주제에 따라붙는 위장 검열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자. ‘자신의 연구 결과, 특정 학교에서는 학생이 도대체 배우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이다. 혹은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이 해당 학교의 운영방식에 있으며, 조직의 양상은 학교라기보다 교도소에 가깝다는 요지의 좀더 가혹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이다. 이런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려 할 때, 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대학 학술지라면 해당 논문이 방법론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견해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 엄격한 통계 틀을 사용해야 했다거나, 표본에 대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 등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논문의 결론이 덜 논쟁적이면 같은 학술지라도 이런 비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엄격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과학적 기준 적용이라는 허울 뒤로 자행하는 검열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교육계에서 권력을 쥔 인사나 기관이 자신의 귀에 거슬리거나 공개를 원치 않는 내용을 증명한 연구자에게 내리는 징벌이나 다름없다.

물론 연구 분야마다 수십 종의 학술지가 존재하므로 한 곳에서 퇴짜를 맞은 논문이라도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결과를 야기하는 보복도 있다. 이를테면 향후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연구과제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구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곤경에 처하거나, 설문에 응답하고 관찰 대상이 되어주며 자료를 제공해줄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반면에 좀더 신중한 연구자들은 제재를 가할 만한 기관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서 연구를 자유롭게 진행한다.

통제 수법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학계에서 종종 폭로되며, 자주 사용되지 못한다. 하지만 좀더 음험한, 그렇기에 좀더 위험한 다른 형태의 검열이 순수하고 당당한 명칭 뒤에 숨어 자행되고 있다.

인문과학 연구를 불가능하게 하다

그중 최악은 아마 ‘인간 피험자 보호’일 것이다. 이 용어는 의학 연구 분야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무관심하거나 파렴치한 의사에게서 개인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가령 암이 전염병인지 아닌지 연구하려 할 때, 건강한 사람에게 암세포를 주입하고 결과를 보면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것일까? 실험의 본질을 알고 나면 당사자들이 이를 거부할 테니 당연한 노릇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의를 했든 안 했든 과학에는 이런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며, 이들에게 진실을 말할지 결정하는 것은 연구자들의 몫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례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북미에서는 이런 유형의 남용과 그로 인한 파문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 관련 기관이 대학과 연구소(대부분 대학 부설)를 상대로 의무 조항을 제정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모든 과학 연구는 대학교수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상세한 절차와 정확한 심사 기준은 각 기관의 재량에 맡겼다.

이처럼 훌륭한 초기의 취지로 탄생한 것이 ‘인간대상실험심사위원회’(Human Subjects Review Board)라는 희한한 조직이다. 모든 학술 기관이 이런 위원회를 두지 않으며 모든 위원회가 동일한 권한을 누리지도 않는다. 대체로 교수들이 주도권을 쥐고 연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위원회를 이끈다. 하지만 위원회 상당수는 미국 및 캐나다의 학자와 정부가 생각한 것 이상의 암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위원회의 심사 절차는 이를 전면적으로 도입한다면 모든 인문과학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의 형태와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특히 실제 상황에서 사회구조를 관찰하는 학문인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은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생활 터전이나 노동 현장 가운데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려는 모든 연구자는, 원칙적으로 관찰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그 대상자에게 설명한 뒤 서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나는 1950년대에 3년 동안 의대생들의 생활을 연구한 적이 있다. 당시 이런 규정이 있었다면 나는 모든 환자와 병원 관계자들, 즉 수백 명의 사람에게 내가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힌 다음 ‘사전동의’(Informed Consent)를 받아야 했다. 그랬다면 연구도 할 수 없고, 그 결과물도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1)

규정을 엄정하고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오늘날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사회과학 연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적용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수많은 서류를 제출하고 활동 내용을 명확하게 기술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규정들도 준수할 것을 서약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저 연구 대상을 존중하겠다고 대충 약속만 하면 원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 짐작했겠지만 각자 누리는 자유의 정도는 기관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생과 박사과정생은 늘 시달리며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제출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반면에 많은 저서를 발표했고 연구 지원금을 받은 경력이 있는 교수는 이런 절차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기관이 기대하는 유형의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음을 이미 증명해 보였으므로 기껏해야 자신의 동료와 그저 그런 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굳이 설득할 필요 없다.

이같은 대우의 차이를 납득하려면 학술기관이 실제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기관을 원활하게 운영하는 데 필수인 연구기금을 확보하고, 연구 대상자의 신체적·정신적 온전성을 해칠 경우 우려되는 파문을 방지해야 한다. 또 원한을 사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기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며, 기관 및 그 지도부에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관심은 연구 윤리가 아니라 ‘돈’

이미 간파했겠지만 이런 요구사항은 지극히 간접적 방식으로 연구 대상자를 보호할 따름이다. 가령 대학들은 소속 심리학 교수가 연구를 구실로 정신적으로 유약한 학생들을 골라 성관계나 논문 대필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학교 이름이 텔레비전 뉴스에서 언급되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다. 또한 일부 연구 결과 공개로 피해입거나 조롱받거나 사생활 보호권을 침해당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에게 소송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이런 위험은 소송이 극도로 일상화된 미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지만 다른 사회에도 역시 존재한다. 어떤 출판물이 개인 또는 기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정보를 담고 있을 때 당사자가 고소하겠다며 위협하는 일은 허다하다. 이를테면 어느 기업의 직원 또는 경영진이 저지른 횡령에 과학적으로 엄정한 분석을 두고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고소할 수 있다. 특히 기업의 고위 책임자라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런 의무 요건은 연구자 활동을 갈수록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더욱 심각한 영향을 초래한다. 즉, 연구에 가하는 제약과 제한이 당연시되는 학문 풍토를 조성한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은 연구를 조직의 필요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 결국 이런 요구 사항을 모든 연구활동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령 미국 대학의 사회학 박사과정생들은 위원회 심사를 연구의 일상으로 여기며 넘어야 할 어려운 과정 정도로 생각한다. 심사위원회로 인해 자신의 직관대로 연구할 수 없다는 점은 간과한 채 말이다.

현재의 제약을 미래 연구자들도 받아들인다면 사회과학 연구의 앞날은 무척 암울하다. 학술기관의 눈에 낯설거나 수상하게 보이는 사상을 탐구할 가능성을 차단당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혁신을 이룩하는 데 방해받는 이들의 모습은 대외 홍보 전문가에 불과할 것이다. 대학과 연구소의 수장들에게는 윤리 규정 제정이 훌륭한 발상으로 보이겠지만, 이는 정작 이 기관들이 보호하고 발전을 도모해야 할 지식에는 매우 현실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글•하워드 S. 베커 Howard S. Becker
저서로 <어떻게 사회를 논해야 하는가>(Comment parler de la société·La Découverte·Paris·2009)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Howard S. Becker, Blanche Geer, Everett C.Hughes, Anselem Strausse, <Boys in white: Student Culture in Medical Schoo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박스기사] 진실 추구를 겁내는 자들

<무슨 권리로 연구를 하는가? 사회과학 연구에 대한 위협>
Sylvain Laurens, Fredéric Neyrat, Editions du Croquant, Bellecombe-en-Bourges, 320쪽, 22유로, 2010.

이 책의 주제는 연구와 그 결과 발표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연구자들의 단순한 문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위협은 정치적·경제적 권력으로 구속을 자행하며 갈수록 빈번히 법적 해결을 모색하는 이들이 포진한 상부에서 비롯된다. 즉, 자신들이 추진하거나 승인한 연구 결과까지 통제하려는 관료적 위계질서의 고위층이 근원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위협은 자신이 응한 면담이 어떻게 이용될지, 과연 익명성이 보장될지 염려하는 평범한 조사 대상자들과 더불어 하부에서 비롯된다. 영국 대학은 생물의학 분야를 본떠서 연구 윤리를 감독하는 기관연구심사위원회(IRB·Institutional Review Board)를 두고 있으며, 프랑스 대학은 윤리위원회 설립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필요 없이 그저 연구할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이처럼 윤리적·정신적 질서 속에 모든 것을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두려워한다. 사회과학 연구 앞에 놓인 장애물은 진실 추구를 겁내는 위기 사회의 우려스러운 변화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