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과 칼자루, 기로 위에 선 아랍 군부

[Spécial] 재스민 혁명, 연출과 캐스팅

2011-03-10     살람 카와키비, 바스마 코드마니

쿠르디스탄이나 이라크 내 기타 지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가 가차 없이 진압됐다. 바레인에서는 국왕에 맞서 국민이 팽팽한 대치 상태에 있다. 예멘에서 알제리, 모로코에서 요르단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의와 민주화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이다. 벤 알리 전 튀니지 대통령의 국외 도피와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퇴출이 양국의 민중운동에 종지부를 찍기는커녕, 오히려 아랍 세계 대중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튀니지는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충만하다(16~17면). 이집트에서는 노동자들의 개혁 요구가 한창인 가운데, 무슬림형제단이 ‘순조로운 체제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14~15면). 리비아에서는 여전히 부족들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11면 상자 기사). 한편 지난 몇십 년간 국가의 주축을 이뤄온 군은 국가 보안기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독재권력과 국민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랍 세계에서 ‘군대’는 군사 쿠데타, 비상사태, 국가기밀, 감시와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군대가 정치제도 발달의 기원이며 정치제도를 수호하는 사회제도임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국가의 구원자와 국민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했다. 군대는 국가안보를 위한 한 축을 구성하고 있고, 공권력의 마지막 보루다. 하지만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나타났듯이, 군대가 경찰력과 경계를 긋고 시위대의 요구를 정당한 것으로 판단해 군 명령권자이자 과거 군 스스로 옹호했던 국가수반에게 등을 돌렸다. 도대체 지난 몇십 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시민사회가 군대의 개입을 열렬히 환영하게 되었는가? 튀니지에서도 그렇고, 18일 만에 무바라크 정권을 몰아낸 이집트 혁명에서도 이런 현상은 확인됐다. <<원문 보기>>

시민사회가 군을 환영하는 이유
독립 뒤 국가 건설기 동안 군대가 차지한 역사적 비중을 알기에 아랍 세계 지도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군 출신이든 아니든 군대가 야기할 수 있는 위협을 심각하게 여겼다. 그 결과 정치 지도자들은 군에 경제적 특혜를 부여하는 대가로 군대를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고 무력화하려 했다. 이집트는 미국이 재정 원조를 통해 군대 무력화 정책을 폈고, 장군급에게 상응하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장군들은 덕분에 쇼핑센터를 짓고, 사막 한가운데 도시를 건설했으며, 해변 리조트 건설 허가를 얻어냈다. 기존 카이로의 소수 특권층에게만 출입이 허용되던 클럽에도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이집트 전역에 걸쳐 요직에 앉아 있거나, 공기업 수장이나 정부 부처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국가수반들은 고위 공직자가 수장을 맡는 안보기구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체계를 발달시켰다. 수장을 맡은 고위 공직자의 임무는 본연의 국가 수호에서 체제 수호로 변모해갔다. 이런 변화는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특히 국가수반이 군인 출신인 경우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안보기구들은 통상 치안 유지와 국가정보 서비스 기능을 담당하며, 시민 활동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기관들의 비대화는 당연지사다. 안보의 기본 법칙에 맞게 안보기구 간의 상호 감시도 수행하니 말이다. 그 결과 이집트에서 안보기구들의 정원은 군 병력의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군 병력이 50만 명인 반면 안보기구들의 정원은 140만 명에 달한다. 또한 알제리에서처럼 두 기관이 하나로 통합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배적 통치기구였던 군

정권의 강권적인 기능을 담당한 안보기구들은 실질적인 정치 운영자가 되었다.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것도 이들이다. 파업 중인 노동자, 실업자, 주거권이나 토지소유권을 요구하는 시위자도 이들이 상대한다. 종교집단 간 관계를 관리하는 것도 이들이며, 정부나 종교층 권력이 원하는 규율을 시행하거나 표현의 자유에 한계선을 규정하는 것도 이들이다.

다른 기관에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미 옛일이 되었다. 대신 ‘무카바라트’(Mukhabarat)라 불리는 안보기구들이 직접 시민을 상대로 공사(公事)를 관리·운영하는 행태가 최근 10년간 전례 없는 발전을 거듭했다. 이 기관들은 이제 전면에서 활동하며, 기관장들의 말은 이들의 엄청난 권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안보, 안보지요.”(1) 한 이집트 내무부 고위 공직자의 말이다. “모든 것이 저희 소관입니다. 시나이 사막의 새들이 됐건, 사막에 숨어 있는 알카에다이건, 카이로의 모스크이건, 알렉산드리아의 모스크이건 간에 말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의 사고까지 통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근본주의 근절이라는 명목으로 ‘지적 안보’라는 개념을 수립했다.

그 결과 정치 지도층은 두 발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안보기구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으니 말이다. 안보기구가 세력을 확장할수록 정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 수단의 정치학자인 하이다르 이브라힘이 말한 ‘안보정치’(2)라는 용어는 이런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차례차례 아랍 국가들에 불어닥친 소요사태는 바로 이렇게 쇠락해버린 정치제도를 보여준다. 객관적인 잣대로 봤을 때, 대부분의 국가가 실패한 사례에 해당되기 때문에 군대가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다.

아랍 국가 내 안보기구들의 특성을 보면 민주화 이전 남미나 동유럽, 남유럽이 겪던 안보체제와 별반 차이가 없다.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방패 역할을 하며, 규모나 조직구조상 복잡성의 차이는 있으나 철저하게 폐쇄적인 조직이다. 처벌에서 자유로우며, 조직의 운영 방식도 동일하다. 가차 없는 공포의 법칙을 적용한다는 점도 그렇다. 이 거대한 감시조직이 최우선시하는 목표가 두려움을 유발하고 시민이 결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지만, 조직 내에도 두려움은 도사리고 있다. 조직 내 계급구조가 파벌 간 경쟁에 따라 쉽게 변하며 다양화되기 때문에 계급을 막론하고 두려움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올해 초 마그레브(아프리카 서북부)에서 마슈렉(아프리카 동부) 지역을 아우른 대규모 소요사태는 그동안 국가권력기구 내부에 존재하던 폐쇄구조를 파괴해버렸다. 예상치 못한 주역인 국민은 (폐쇄구조 속에 감추어져 있던) 대립을 전면에 드러냈고, 파벌 간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몰고 갔다. 국민은 결국 권력체제에 ‘시위대에 발포할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딜레마를 던져주었다.

시위대 발포 여부 놓고 분열

안보체계가 질서를 잃으면서 공권력의 다른 부분도 혼란에 빠졌다. 집권당, 경제특권층,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군대를 포함해서 말이다. 시민봉기는 국가에 봉사하는 기구와 체제에 편승하는 기구를 구별해내는 계기였고, 군대는 국가에 봉사하는 대표적인 기구로 떠오른 것이다. 그동안 군대는 치안유지 임무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체제 전환의 수호자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군과 안보기구 사이에는 실제 많은 교류가 있다. 이집트의 오마르 슐레이만 장군이나 알제리의 무하메드 테으픽 메디에네 장군같이, 일반적으로 군 정보 수장이 양 기관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이 정치기구의 요직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튀니지군과 이집트군이 시민봉기의 결과에 미친 영향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먼저 튀니지는 군인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아랍 정치 지도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벤 알리도 군복 입은 자들의 야심을 두려워했다. 벤 알리는 1987년 대통령에 오르자 군대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고 병력을 감축하는 한편, 상당수의 군 지도층을 경질했다. 전말이 밝혀지지 않은 2002년의 헬기 추락과 그로 인한 압델라지즈 스킥 장군 및 고위 간부들의 사망 사건은 정권과 군 사이의 의혹만 증폭시켰다.(2) 튀니지의 군대는 벤 알리 정권 이전인 부르기바 정권 시절(1957~87)부터 이미 오랜 기간 정권에서 소외돼 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문에 개입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정권의 부패와도 관련 없었다.

군 내부에서도 체제 불만 증가

반면 이집트의 군은 자유장교단의 1952년 혁명부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망 당시 재산이 고작 85이집트파운드에 불과하던 청빈한 가말 압델 나세르 장군은 이집트 및 아랍 지역 전체를 위한 사회·경제 개발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 이념은 큰 인기를 얻었고, 나세르의 검열 정책과 여러 정치적 실책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했다. 나세르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안와르 사다트 역시 군인 출신으로, 기생적인 신흥 부르주아층에 유리한 경제 자유화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군의 충성을 확보한 반면 군에 부패 관행을 들여왔다. 1973년 이스라엘과 치른 키푸르 전쟁이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약 체결로 ‘승리’로 끝나면서 그 공을 군에서 탈취했고, 군을 권력에서 소외시키려 경제적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최근 10년간 무바라크에 대한 군의 반감은 점점 커졌다. 무바라크가 부통령 지명을 거부하면서 국가의 앞날에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했고, 군은 그를 비난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가말에게 권력을 승계하려 한 것도 불만의 요소였다. 군이 보기에 가말은 후계자가 될 어떤 정당성도 없었다.(4) 그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경우 군대는 더 이상 ‘왕을 책봉하는 역할’을 못할 것이다. 가말의 측근인 소수 기업가들의 부정 축재에 대한 무바라크의 방관도 불만을 증폭시켰다.

무바라크 체제 붕괴가 임박하면서 대립은 표면화됐다. 무바라크를 계속 지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임을 강요해야 하는가 사이에서 군은 점점 지지 철회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군이 직접 나서 대통령을 사임시키는 역할을 맡는 데는 주저하는 듯했다. 미국은 신중하되 모순된 측면이 있었지만, 무바라크가 퇴출되는 한이 있어도 이집트의 체제 안정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무바라크 퇴출 직전인 지난 2월 10일과 11일 하루 동안 군이 무바라크 정권의 상징물인 대통령궁과 국회 내 시위대의 난입을 제재하지 않으면서 시위는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시위가 정권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비쳤다. 정권이 무너지고, 군은 ‘왕을 책봉하는 역할’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책봉만이 아닌 민주주의 체제 발전을 통한 정치체제 전체를 재정립하는 역할을 맡았다. 군의 개입은 국민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체제 전환 과정에 혹시 있을지 모를 이스라엘이나 미국, 이란 같은 다른 아랍 국가들의 개입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왕 책봉’ 역할 해왔던 알제리 군부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는 군대 개입의 성격 면에서 차이가 크다. 튀니지 군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우방국인 미국의 지지 아래 벤 알리에게 사임 압력을 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집트 군이 소요사태 초기에 개입한 것은 치안유지를 위해서였다. 무바라크 지지 집단이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을 공격할 때도 개입하지 않았다. 물론 이집트 군이 시민에게 발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다른 집단이 시민을 공격하는 것 또한 막지 않았다. 몰락해가는 정권을 버리되, 체제만은 보존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알제리는 우아리 부메디엔 대통령(1965~78) 정권 때 군 정보부가 창설되면서 군 참모의 정치적 역할이 확고해졌다. 알제리의 ‘왕을 책봉하는 역할’은 바로 군 정보부가 맡고 있었다. 크나큰 재앙이었던 1991년의 실패만 제외한다면, 군 정보부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던 각 정권의 말기마다 개입해 체제를 유지했다. 1999년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것도 군이었다. 그러나 정보부는 무하마드 라마리 참모총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4년 부테플리카의 재선을 지지했고, 이는 군과 정보부 대립의 신호탄이었다. 무스타파 모하메드가 썼듯이,(5) “2004년은 정보부의 독립성이 확고해진 해였고, 군에 대한 우위를 입증한 해였다.” 부테플리카가 재선하면서 국가기관을 손에 쥐고 있는 정보부를 정치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미약한 희망조차 사라졌다. 정보부의 독점권력이라는 장해물을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군이 정치에서 물러나면 체제에 공백을 가져오리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군이 민주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군과 안보기관 간의 교착으로 이들은 철저히 불투명한 조직이 되었다. 아무런 제재 없이 정치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안보정치’의 이상적인 모델이라 볼 수 있는 알제리와 같은 체제에서 정부 고위 지도층과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는 거의 정치를 하지 않는다. 또한 평화적인 야당의 부재는 변화가 권력 내부에서 나오는 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정치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들의 기득권에 불리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올 리 만무하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것처럼, ‘국민’이 주역이 되어 체제를 무너뜨리는 상황에 희망을 거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에게 발포해야 하는가’라는 치명적인 선택의 순간을 군대와 안보기구에 던져주기 때문이다.

리비아도 체제 투명성이 결여됐지만, 지난 30여 년간 군은 소외돼 있었고, 대신 ‘혁명위원회’가 권력을 쥐고 있었다. 군의 정치적 야욕을 초기에 차단하려 군 기지를 하나같이 사막 한가운데 두었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시위 군중에 대한 가혹한 진압을 결정하면서 군에서는 명령 거부가 잇따랐고, 군의 실세인 아부 바크르 유네스 자베르 장군은 자택에 감금됐다. 카다피가 그에 충성하는 특수조직으로 구성한 안보기구를 강화하고 아프리카 용병을 고용한 것을 보면, 독재자는 그들의 국민만 못 믿는 것이 아니라 군대마저 불신함을 알 수 있다.

시민사회-군 협약 뒤 권력 이양될 것

이집트와 튀니지 혁명 뒤, 군은 시민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는 조건을 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현재까지 군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이집트는 시민봉기가 발발하자, 군대가 하나의 통합된 국가기구로서 내부적 합의를 본 뒤 개입에 나섰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독재적인 성향의 군 내부 집단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정한 선을 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6) 무엇보다 군은 시민정부에 대한 권력이양 절차의 완료 시기를 정하도록 종용받고 있다.

시민정부에 대한 권력이양은 이미 많은 사례에서 나타났듯이, 시민사회와 군 사이의 협약이라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이 협약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보복으로부터 군을 보호할 것이다.(7) 알제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 군이 어떤 변화를 결정하더라도, 협상 과정에서 군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보장한다는 조건이 포함될 것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글•살람 카와키비 Salam Kawakibi
바스마 코드마니 Bassma Kodmani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2008년 3월 아랍개혁이니셔티브가 주최하고 시민사회와 안보기구 대표들이 참여해 관련 분야의 개혁을 논한 정치포럼에서였다.
(2) 하이다르 이브라힘, <Al amnocratiya fil sudan>, ‘안보정치’를 다룬 공동 저작물로 아랍어와 영어로 출간할 예정이다. 아랍개혁이니셔티브, 2011년 11월 예정.
(3) 일간지 <알사바>에 따르면, 재수사가 시작될 것이라 한다. 튀니스, 2011년 1월 22일.
(4) 비르지니 콜롱비에, ‘이집트: 그날 이전, 그리고 그날 이후’, <Arab Reform Brief>, 2011년 2월, www.arab-reform.net.
(5) 무스타파 모하메드, <국가, 안보, 개혁: 알제리>, 출간 예정.
(6) 암르 압델라흐만, ‘군을 왜 두려워하는가?’, <Al-Masri Al-Youm>, 카이로, 2011년 2월 17일, www.almasryalyoum.com/en.
(7) 스테판 브와사르, 아르멜 앙데르, 준비에브 베르도, <군부 체제하의 남미>, Vingtième siècle, 105호, 파리, 2010년 1~3월호, p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