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무책임성은 공화국의 적
10월 14일부터 프랑스 보수주의 언론인이자,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의 칼럼니스트 에릭 제무르가 뉴스채널 <CNews>의 주간방송 프로그램에서 헤드라인을 담당하게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에릭 제무르가 이슬람 혐오 발언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형에 처하자, <CNews>(당시 채널명은 <i-Télé>였음)는 그를 해고했다. 심지어 에릭 제무르는 <CNews>에 입사하기 직전, 9월 17일 이슬람 혐오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다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CNews>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
<CNews>는 에릭 제무르가 화려하게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이슬람과 프랑스 공화국의 난투극’이라는 자극적인 주제로 방송을 했고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것에 성공했다. 제무르가 이 방송에서 ‘오늘의 이슈, 히잡’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지 않았고, TV 방송은 그 정도 악행은 허용해줬다. 그리고 <CNews>의 시청률은 무려 3배로 치솟았다.
좌측에는 레비, 우측에는 제무르
제무르는 언론인들 중에서도 언변이 탁월하며, 문장력도 돋보인다. 하지만 그의 도발적인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이가 업계에서는 많지 않다. 그래서 제무르는 별다른 언행을 하지 않고 있어도, ‘무례하다’라는 비난을 산다.
제무르는 책도 출간했는데, 판매실적이 제법 좋은 것도 있다(2014년 출판된 『프랑스의 자살』은 5만 부가 팔렸다). 현재 지지율이 저조한 프랑스 우파는 제무르가 우파의 나침판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작년 1월 30일 프랑스 공화당(LR) 의원과 당 대표가 당 주최 초청 인사 강연, ‘생각의 만남’에 그를 초청했을 때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로랑 보키에 전 당 대표는 제무르에게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일부 극우파는 제무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당 대표 마린 르 펜은, “제무르는 좌파적 성향이 있다”라며, 반기지 않고 있다.
도발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연일 미디어에 오르는 좌파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경우처럼, 이번에는 미디어가 우파 ‘제무르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미디어는 오래전부터 화재성 있는 인물을 찾았다. 사고와 행동이 거침없고 박식하며, 무엇보다 과하다 싶을 만큼 단호한 면이 있어야 했다. 40년 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입증해 주듯, 이런 특징을 갖춘 자라면 끊임없이 막말을 해댈 수 있다. 적도, 논쟁 상대도 선택할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이 정한 ‘사회 이슈’에 이목을 집중시켜 경제문제 등, 다른 문제들은 덮어버릴 능력이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무르는 우리에게 “페미니스트는 ‘이성애 백인 남성 말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 편에 섰던 프랑스 군인, 필리프 페탱은 사실 프랑스의 유대인을 구한 것”이며, “프랑스의 좌파 언론은 불필요한 중언부언을 일삼을 뿐”이라고 알려줬다. 그렇다면 프랑스 언론은 모두 좌파인가? 제무르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CNews>와 그가 내전을 주장하는 장면도 생방송으로 전파한 뉴스채널 LCI 외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1)
아무튼 <르 피가로>의 편집장은 이렇게 유명해진 칼럼니스트를 보고 뿌듯한 모양인지, 다음과 같은 말로 제무르를 치켜세웠다. “제무르야말로 우리 모두의 걱정과 근심을 대변해주는 용감한 작가다. 그는 다치고 무기력해진 프랑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정곡을 찌르고 있다. 언론인이란 자고로 개인의 관점에서 뉴스를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던 알베르 롱드르는, 바로 이런 태도야말로 언론인의 자세라고 말했다.”(2)
‘카산드라’를 대적하기 위한 병법서
하지만 역사학자 제라르 누아리엘은 용감하게도 프랑스에서 위기감을 조성 중인 ‘카산드라’(제무르)를 대적하기 위한 ‘병법서’를 집필했다.(3) 제무르를 공격하는 이 책에서, 누아리엘은 이슬람, 페미니즘,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찬 제무르와 1886년 ‘유대인의 프랑스(La france juive)’라는 유대인 혐오 글을 써서 인기몰이를 했던 반유대주의 작가 에두아르 드루몽을 비교했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이 주목을 끌었던 배경에는 유사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우선, 대중을 끌어야 하는 언론의 특성이 있다. 1870~1940년,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 ‘언론의 자유’에 대한 법이 제정되면서 쏟아져 나온 저가 신문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독자를 모집했을 때처럼, TV 방송이 민영화되고 방송사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이들 간에 경쟁은 치열해졌고 인터넷까지 가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캔들, 선동, 논쟁’은 이목을 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됐다.
그리고 누아리엘은 노조를 포함해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견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1880년대 사회적 혁신을 주저했던 급진 정당이 집권했고, 이 정권은 정치적 투쟁을 종교적 문제로 국한하려 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제무르가 급부상하고 있는 이 시점에, 노동권은 이미 ‘이민은 프랑스 전체가 함께 대면해야 하는 사회적인 문제’라고 설득할 힘을 잃었다. 이제 ‘이민 노동자’는 단지 ‘이민자’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이민문제를 프랑스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슬림’의 문제로 치부해 버렸다. 이렇게 ‘사회적 문제’를 ‘종교적 싸움’으로 변질시키는 방식을 드루몽과 제무르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모방해, 드루몽은 유대인을, 그리고 제무르는 무슬림을, 부정부패를 일삼고 프랑스를 전복하려 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보수 천주교만이 프랑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무르는 천주교를 따르며 백인을 위한 유럽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번지고 있는 다문화주의와 탈기독교화라는 망상에 대적해, 시민평화를 수호하고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유럽을 옹호하겠다”라고 밝혔다.(4) 제무르는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며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에 찬성하다가, 이들이 이민자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자, 돌연 노란 조끼 운동은 극좌파에 의해 조작됐으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며 등을 돌린다.
프랑스 좌파 작가이자 언론인 프랑스와 베고도는 “제무르는 전 세계인을 포용하려는 부르주아지를 비난할 때만 ‘민족애’를 들먹인다. 그리고 사회적 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제무르는 그와 같은 열망으로 인종차별주의적 신념을 가진 서민층만 옹호할 뿐이다”라며 비난했다.(5)
‘제무르 현상’, 공화국의 위기 신호
혐오적 발언들은 실제로 ‘말이 씨가 될’ 가능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반유대주의가 팽배했을 때, 유대인들은 결집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더욱 단결했으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1897년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 드레이퓌스 사건에 대해 공산주의자 역사학자였던 아나톨 르로이 볼리외는 “유대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한다고 비난하던 바로 그들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동화를 막아버렸다”라고 비난했다. 제무르가 무슬림을 프랑스에 주둔하는 ‘점령군’과 같다면서, ‘이슬람 권력이 득세하고 할랄을 받아들인 프랑스’와, ‘이슬람과 아랍의 연대’를 맹렬히 비난하는 오늘날, 19세기 말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할 수도 있다.
혐오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민족주의자들만 국민 일부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국민 전체의 탓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다. 누아리엘에 의하면, PIR(공화국원주민당)과 같은 소규모 투쟁단체들도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극우파처럼 출신, 인종, 종교에 집착하면서 ‘우려먹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로 인해 여론조사기관과 뉴스 채널은 쉼 없이 공화국, 공동체주의, 히잡, 집단기도, 부르카, 할랄, 부르키니를 들먹이며, 소모적인 논쟁이 끝없이 이어진다.
프랑스 철학가 미카엘 푀셀은 이렇게 무의미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를 19세기 말이 아니라, 우파와 중도좌파 성향의 장관을 함께 임용했던 에두아르 달라이제 정권이 집권했던 1938년의 시대상에서 찾으려 한다. 푀셀은 단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진리만 확인시켜 주려는 게 아니라, ‘역사의 교훈을 통해 현재를 진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6) 그런데 그의 연구방법은 1938년 한 해 발행된 일간지를 자료로 분석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다소 오류가 있다.
예를 들어 양차 대전 사이에 급진주의자들의 동맹은 좌파에서 무너지기 시작해, 우파에서도 무너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동맹이 강화된 경우도 있었다. 1923년(좌파 카르텔 설립)과 1934~1935년(극우정당 국민전선 창당)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푀셀의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당시에는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을 위한 운동이 활발했다)의 득세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경제적 자유주의는 옹호하되, 개인의 자유는 억압하는 ‘전제주의적 자유주의’가 확산했을 때, 일반적으로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도 득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그리고 전제주의적 자유주의는 마치 외국인 혐오와 반유대주의보다는 관대하다는 점을 내세울 수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 정부가 경찰의 폭력을 묵인하고 대중의 자유를 억압하며, 이민에 관한 논쟁을 부각하는 시점에, 푀셀의 분석은 눈여겨 볼만하다. 푀셀은 “공화국의 적은 바로 공화국이 민주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제무르 현상’은 바로 위기가 가깝다는 징조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Eric Zemmour, ‘우파 협정’, LCI, 2019년 9월 28일.
(2) Vincent Trémolet de Villers, ‘Quand Cassandre alerte les Français 카산드라가 프랑스에 경고를 보내고 있다,’ <Le figaro Magazine>, Paris, 2016년 9월 2일.
(3) Gérard Noiriel, 『Le venin dans la plume. Edouard Drumont, Eric Zemmour et la part sombre de la République 독을 담아 쓰는 글. 에두아르 드루몽, 에릭 제무르, 공화국의 어두운 이면』, La Découverte, Paris, 2019.
(4) <Le Figaro Magazine>, 2015년 10월 30일.
(5) François Bégaudeau, 『Histoire de la bêtise 허튼짓거리의 역사』, Pauvert, Paris, 2019.
(6) Michaël Foessel, 『Récidive, 반복되는 과오』, 프랑스 대학 출판사, Paris, 2019.
(7) 푀셀에 의하면, 1938년 당시 프랑스로 이주해온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독일에서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혐오 감정은 서로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