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이후의 혁명, 이집트 노동자들 일어서다
[Spécial] 재스민 혁명, 연출과 캐스팅
여러 건의 파업은 지난 1월 25일 이집트 봉기의 전조였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 뒤 노동자들은 생활조건 개선과 집회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다 됐으니 그만 좀 해야지! 축제를 계속할 수는 없잖아! 나라를 바로 세우고 모두 일해야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던 모하메드 파리드 사아드가 거리를 막는 사람들을 보며 분통을 터뜨린다. 사람들 때문에 차가 지나갈 수 없으니 짜증이 난 것이다. 사람들은 노래하고 각종 악기를 두드리며 기나긴 밤의 축제를 끝내고 있다. 지난 2월 12일 새벽, 이집트가 30년 기나긴 밤에서 깨어난 날이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전날 샤름 알셰이크 공항으로 떠났고, 권력은 군부에 이양되었다. 시위대가 요구한 대로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제 혁명은 끝난 듯하다.
정치혁명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요구
사아드는 카이로의 가난한 동네에 있는 공업용 풀 공장을 운영한다. 혁명이 끝난 이날 아침, 사아드가 공장에 도착했을 때 노동자 15명은 이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노동자 대다수가 여성이다. 사아드는 이번 혁명으로 이제 이집트가 전보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도 책임감이 강해지고 부패도 줄어들 것이라 확신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다. 전에는 위생과 노동조건을 검사하는 국가 감독관에게 돈을 쥐어줘야 했다. 사아드의 공장 노동자들 역시 독재정권이 물러나 기뻐하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현재 약 500이집트파운드인 월급에 자못 불만이다. 좌파 운동가들이 요구한 최저 월급 1200이집트파운드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소설 <택시>(1)의 저자 칼레드 알 카미시가 언급한 대로 임금 인상은 이번 혁명의 요구사항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번 혁명은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이집트의 정치 민주화, 무바라크의 하야, 헌법 개정, 의회 해산과 진정한 선거제도 확립이었죠.” 하지만 카시미는 사회보장운동, 특히 최근 노동자들의 파업 역시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최근 사회운동, 노동자 파업에는 정치적 요구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요구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2011년 혁명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지난 2월 11일 금요일 타흐리르 광장에서 몇 m 떨어진 카페.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전, 지식인들이 기도를 마치고 이집트 상황을 토론하고 있다. 50대 소아과 의사 알라아 슈크랄라가 큰 소리로 신문을 읽고 있다. 그는 과거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여러 비정부기구 소속으로 사회운동을 했다. 슈크랄라는 파업에 들어간 공장과 회사 리스트를 나열했다. 철도운송 노동자, 농업부 노동자, 버스회사 노동자, 그리고 각종 크고 작은 기업들이 파업에 나섰다. 2월 9일, 좌파 단체 10여 곳이 사회 정의와 적절한 최저임금, 일터의 민주화, 노조의 자유 등을 요구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참여를 호소한 뒤 벌어지는 움직임이다. 이들의 호소는 정열적인 목소리를 타고 퍼져간다. “이집트 노동자들이여, 여러분은 국민 대혁명의 일원입니다. 최근 여러분이 참여한 투쟁이 이번 혁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변호사이자 이집트 경제사회 권리 센터장인 칼레드 알리는 “지난 1월 25일 투쟁을 일으킨 것은 노동자들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투쟁을 조직할 정도로 체계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고 정치적 요구뿐만 아니라 경제·사회적 요구를 하면서 이번 이집트 혁명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한다.
페이스북으로 연락하며 혁명을 주도한 중산층 젊은이를 가리켜 언론은 ‘혁명의 영웅’이라고 묘사했다. 30살 엔지니어로서 2008년 4월 6일 사회운동을 주도한 아메드 마헤르는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혁명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혁명과 별 관계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2008년 4월, 마헤르가 주도한 사회운동은 정치적 주장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시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실제로 마헤르는 2009년부터 매년 1월 25일(경찰의 날)에 시위를 조직해 정치 자유화를 요구했다. 지난 1월 25일은 결정적인 날이었다.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이 만나다
‘4월 6일 운동’은 2008년 4월 6일 이집트 최대 공장 ‘미스르 티사주&필라튀르’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시위에서 시작되었다.(2) 카이로 젊은이들은 노동자들을 만나 페이스북에 ‘4월 6일 청년운동’ 커뮤니티를 만들기로 했다. 이 커뮤니티는 처음에 사회적 요구보다는 민주주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최근 몇 해 동안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노동자들이 일어나 비판과 요구를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칼레드 알리는 “지난해 이집트에서는 하루에 적어도 3건의 시위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노동자로 일하다 노조와 노동자를 위한 지원센터장을 맡은 카말 아바스는 “사회운동을 통해 파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지난 2월 16일, 군부가 텔레비전과 휴대전화로 ‘시위를 그만두라’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미스르 티사주&필라튀르 공장 노동자들은 일손을 멈췄다. 노동자들은 공장에 텐트를 치고 잤으며 벽에는 요구사항을 적은 현수막을 걸었다. 이들의 첫 번째 요구 사항은 부패한 길라니 사장의 사퇴였다. 그 밖에 임금 인상, 주택 제공, 노동 조건 개선 등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회사 내부에서 극심한 불평등을 겪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회사 간부에게는 주택을 무상으로 제공하지만 노동자들은 도심에서 아파트를 빌려야 했다.
경찰들도 임금 인상 요구 시위
실제로 최고행정재판소에 속한 행정분쟁법원은 지난해 3월 30일 “정부가 최저월급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해야 한다”(3)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신문이 말하는 이른바 ‘월급 전쟁’(4)이 나타나게 되었다. 정부가 이 판결을 따르지 않자, 최저월급을 1200이집트파운드로 정하는 문제를 놓고 노사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2월 19일, 며칠간의 파업 끝에 경영진과 군사령관, 노동자 대표가 협상 자리를 마련했다. 군사령관이 첫 번째 발표를 하자 노동자들의 환호가 터져나왔다. 회사 대표가 물러나고 대신 노동자들의 존경을 받는 아메드 마헤르가 대표직을 맡는다는 내용이었다. 유급 파업과 임금 인상도 고려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마헤르를 헹가래치며 환호했다. 노동자들은 4월 6일 청년운동에 대해 잘 모르며 자신들이 벌이는 사회운동은 이집트를 뒤흔든 시민혁명과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 해도 시민혁명이 없었으면 노동자들의 파업도 없었을 것이다.
무바라크의 하야로 사회운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혁명이 끝난 뒤 사람들은 빠르게 거리를 청소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공장마다, 부처마다, 회사마다 제각각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직원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혁명 기간에 석유·가스·철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우체국 직원, 응급차 운전자 등으로 파업과 시위를 늘려갔다. 회사, 공장 혹은 정부 부처 책임자에게는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경찰관들도 카이로 도심의 내무부 앞과 대도시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 이집트 국민은 부가 재분배될 것으로 기대하며, 그 기대를 알리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 우리의 돈이 어디 있는지 말해줘”라는 구호가 들린다.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신문의 토론 코너를 통해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아직 때가 아니지만 부가 점차 재분배될 것이라고 한다. 경제학자 두 명은 “노동자의 파업… 이집트 경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다”라고 강조한다.(5)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경고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혁명 후 사람들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집트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2010년 전까지만 해도 파업이 전혀 일어나지 않던 분야에서도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에즈에서 수십km 떨어진 거대 산업 지대에 위치한 공기업 나스르 아스미다는 살충제를 생산하는 업체로, 규모가 크고 잘나가는 곳처럼 보인다. 이곳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여러 채의 주택과 병원 하나가 있고, 월급은 1200이집트파운드를 넘는다. 하지만 2월 13일, 이 회사 직원 2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단, 생산은 멈추지 않은 채. 우선 이들의 요구 사항은 부패에 연루된 회사 대표 아델 알 모지가 재판받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좀더 현대적인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구한다.
기술자 나빌 파미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혁명이 있기 전에는 정부 소속 보안 요원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시위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있으니까요. 전에는 공장의 이사진 대표를 만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만날 수 있게 되었죠. 시민혁명 전에는 발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 사회문제를 마음껏 말하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집트에서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고, 노동자는 경영진에게 뭔가 응답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경영진이 묵묵부답이었다.
2월 19일, 이집트 경제·사회권 센터의 변호사들은 국가 살림을 관리하는 군사정권에 최저임금을 정하고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법정 최저임금을 이집트 헌법에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이죠.” 칼레드 알 카미시가 말했다.
글•라파엘 켐프 Raphaël Kempf
법률가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 2>(공역·2010) 등이 있다.
<각주>
(1) 영어 번역본: 칼레드 알 카미시, <택시>, Aflame Books, 런던, 2008.
(2) 조엘 베냉, ‘공복의 이집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5월.
(3) 행정분쟁법원, 2010년 3월 30일, 청원서 n.21606/63.
(4) <알 마스리 알 요움>, 카이로, 2010년 4월 6일.
(5) <알아흐람>, 카이로, 2010년 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