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에 직면한 북아일랜드의 고민

영국과 북아일랜드 연방주의 정당의 애증관계

2020-01-31     크리스토프 질리슨 l 노르망디 캉 대학교 교수

브렉시트 반대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것은, 1968년에서 1998년 사이에 북아일랜드를 분열시킨 갈등상황의 부활일 것이다(15면 기사 참조). 구교도(가톨릭)에 대한 강경-노선을 고수하는 북아일랜드 극우파 민주연합당(DUP)으로 인해 영국은 유럽연합(EU)과의 브렉시트(영국의 EU탈퇴) 협상에서 난관을 겪고 있다.

 

인지도가 거의 없었던 북아일랜드 민주연합당(DUP)이 몇 달 전부터 브렉시트 협상으로 인해 주목받게 됐다. 2017년 총선 이후, 보수당과의 연정으로 영국의회 다수세력을 형성해온 10명의 DUP 의원들은 영국의 EU탈퇴에는 찬성하면서, 북아일랜드의 특수성을 고려한 모든 해결방안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는 1998년 성금요일협정(일명 굿프라이데이협정)으로 완화됐던 북아일랜드 내의 분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구교도와의 타협을 거부하다

2011년 인구조사에서 북아일랜드 신교도 수는 전체 인구의 절반(48%)에 달하는 87만 5,000명이었다.(1) 최초의 분리독립 요구가 분출된 이후, 종교 교파 간 대립을 통해 당파적 이득을 얻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시기에, 연방주의 정당들인 DUP와 얼스터연합당(UUP)이 신교도(개신교 또는 성공회)를 대표했다. 이들의 일차적 목표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존속하는 것이다. 반면, 구교도를 대표하면서 아일랜드와의 통일에 찬성하는 민족주의 정당에는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인 신페인당과 사회민주노동당(SDLP)이 있다. 

1905년에 설립된 UUP는 오랫동안 북아일랜드를 지배했다. 자유국 지위를 얻게 될 영국·아일랜드조약 직전, 북아일랜드 자치의회가 창설된 1921년부터 영국의 지배로 다시 돌아가 자치의회가 폐지된 1972년까지 50여 년간 UUP는 북아일랜드의 집권여당이었다. 선거 때마다 UUP는 신교도 투표의 과반수를 차지했고, 교파 간 갈등을 최우선 쟁점에 놓기 위해, 종교적 갈등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UUP 지도자들은 구교 전파를 반대할 목적으로 설립된, 영향력 있는 프리메이슨파 단체 ‘오렌지오더’ 출신이었다. 

1960년대, 개혁을 요구하면서 소수파인 구교도에 대한 차별을 끝내고자 하는 시민운동이 시작되자 UUP 내에서 균열이 나타났다. UUP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영국의 압력 하에 온건파는 북아일랜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급진파는 시위대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런 대립은 1971년 경쟁 정당인 DUP의 창설로 이어졌다. DUP는 장로교 목사인 이언 페이즐리가 설립했다. 그의 열변은 1960년대 말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분쟁’을 유발했고, 신교도 일부가 얼스터의용군(UVF)을 조직해서 구교도를 공격하도록 선동했다(아래 기사 참조). DUP는 구교도와의 그 어떤 타협도 거부했다. UUP보다 더 우파적 성향인 DUP는 신교도의 복합적 양상을 이용했다. 오랫동안 오렌지오더와 UUP 뒤에서 단결했던 신교도들은 사실상 서로 다른 성향의 두 그룹으로 분열됐다.

한 그룹은 17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식민지인 아일랜드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다. 그들 중 대다수가 장로교 신도에 노동자 계층이거나 소농(小農) 출신이다. 이들은 1971년부터 급진적인 정치 및 종교적 입장을 표방하는 DUP를 지지해왔다. 다른 그룹은 영국에서 온 식민지 거주자로, 장로교 신도들보다는 구교에 덜 적대적인 성공회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여유로운 중산층 출신으로 DUP보다 온건한 성향의 UUP를 지지했다. 1970년대 초반에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 UUP가 패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나타난 민족주의 정당과 연방주의 정당 사이의 대립보다, 각 진영에서의 온건파와 급진파 사이의 대립 양상이 두드러졌다.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의 ‘분쟁’을 종식시킨 1998년의 성금요일협정 이후, UUP는 패권을 상실했다. 그리고 DUP는 성금요일협정을 반대하는 유일한 정당으로 남았다. 2006년에 DUP는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무장해제와 같은 공공안전을 위한 약속을 받아내면서 세인트앤드루스 협정을 승인했다.(2) 1997년 북아일랜드 총선에서 UUP는 32.7%의 표를 얻었고, DUP는 13.6%의 표를 획득했다. 2005년부터 두 당의 득표율은 점점 더 뚜렷하게 역전하기 시작했고(UUP는 17.7%, DUP는 33.7%), 2017년에는 DUP가 유효표의 36%를 얻은 반면, UUP는 10.3%에 그쳤다.

 

처치하기 힘든 연정 파트너

패권 정당이라는 새로운 입지를 다지게 된 DUP는 이제 당의 창설 토대였던 전략을 재고해야 했다. 2003년까지 DUP의 전략은 정치권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신교도들의 여론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DUP는 보다 폭넓은 유권자 확보를 원했고, 이는 사회문제에 대한 격렬한 내부 갈등과 고통스러운 쇄신과정을 동반했다. 하지만 낙태 반대(산모의 생명이 위협받는 경우만은 제외) 등 당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사안에 대한 입장은 여전히 고수했다. 이와 관련해 DUP는 2019년 10월부터 영국 전역에서 낙태를 합법화한 하원의 결정에 반대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신교도 인구의 점진적 하락으로 인해 연방주의 정당들은 보다 열린 전략이 필요했고, 종교적 측면에서 분리된 통합주의 정책을 제안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UUP는 2005년에 오렌지오더와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DUP는 페이즐리 목사가 창설한 장로교 신도들을 넘어서서, 신교도 전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15년 알린 포스터가 DUP 대표로 선출됐다. 상당수의 새로운 당원들처럼 그녀도 UUP에서 옮겨왔다. 성공회 신자였던 알린 포스터는 벨파스트 퀸스 대학교 재학 중에 UUP에 입당했다. 그녀의 반민족주의 성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로 심한 부상을 입었고, 그녀 자신도 통학버스 폭탄테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여성당원은 28%에 불과한 DUP(UUP의 경우 34%)에서 그녀가 대표로 선출된 것은, 보다 현대적인 이미지를 표방하려는 당의 의지였을 것이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에서 환경부장관(2007~2008), 기업통상장관(2008~2015), 재정부장관(2015~2016)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증명한 알린 포스터는 2016년 총리로 선출됐다. 이후 그녀가 깊이 관여했던 신재생에너지 장려정책(Renewable Heat Incentive)이 세금우대 스캔들에 연루됐다. 이 정책 덕분에 그녀가 속한 정당의 당원들과 측근들이 이득을 봤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북아일랜드에서 5억 파운드(약 5억 8,000만 유로)에 달하는 세금이 낭비됐다. 

알린 포스터 전 총리는 책임을 전면 부인하며 스캔들의 독립적 수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방안도 거부했다. 이에 마틴 맥기네스 부총리(신페인당 소속)가 2017년 1월에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평화협정 규정에 따라 북아일랜드 공동정권이 중단됐다. 3년 가까이 지났으나 DUP와 신페인당은 여전히 어떤 협의에도 도달하지 못했고, 아일랜드 국회는 굳게 닫혀 있는 실정이다. 

2006년의 공동정권 출범이 DUP의 역사적 전환점이 됐지만, 모든 당원들이 이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최근 정치권에 등장해 전임자들과는 달리, 정치적 자산이 없는 알린 포스터 대표는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평화 프로세스를 약화시키게 됐다. 

브렉시트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DUP는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를 찬성하는 유일한 북아일랜드 정당이었다. 그런데 북아일랜드 유권자들의 56%가 영국의 EU잔류에 찬성했고, 이는 DUP가 유권자들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EU탈퇴 진영의 승리는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의 물리적 국경선을 없앤 성금요일협정에 따른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했다.

UUP로서는 경제적 실리를 위해 EU잔류를 지지했다. 북아일랜드는 공동농업정책(중농(中農) 수입의 85%를 차지함), 구조기금, 평화프로세스 강화를 위한 특별기금 등과 같은 유럽연합 주요 기금들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DUP는 지역경제에 미칠 영향으로 인한 불안을 최소화하면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야 했고, 그 결과 양립할 수 없는 세 가지 제안이 도출됐다. EU 단일시장 탈퇴, 영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모든 세관통제 거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의 ‘하드보더’(국경 통과 시 통행·통관 절차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 거부가 그것이다.

DUP의 전략은 단기적으로 성공했다. 2017년 6월 8일 총선에서 DUP는 북아일랜드 18개 지역구 중 10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반면 UUP는 단 한 개 지역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테레사 메이의 보수당은, 이제 영국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오른 DUP의 지지 없이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하게 됐다. 협상 끝에 DUP는 테레사 메이 신임안과 재정 법안에서 보수당을 지지하기로 약속했고, 그 대가로 북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5년간 10억 파운드의 공공지출경비 인상을 획득했다.

그 때부터 DUP는 국정운영 파트너인 보수당에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DUP는 영국 총리가 EU와 최종적으로 도달한 브렉시트 합의안에 3번이나 반대표를 던졌다. 테레사 메이 총리의 뒤를 잇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보리스 존슨은 DUP 전당대회에 참석하기까지 했다. 그는 북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에 다리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비롯해 연방주의자들에게 솔깃한 제안들을 늘어놓았다. 이런 성공은 DUP가 영국의 결정들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동안 북아일랜드 임시정부 부재를 상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DUP는 자신의 권력을 과대평가했다. 테레사 메이 전 총리의 EU합의안에 계속 반대표를 던진 결과, 결국 메이 총리는 2019년 5월에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존슨 신임 총리는 DUP 측에 불리한 EU탈퇴 합의안을 이끌어내었다. 왜냐하면 북아일랜드(EU잔류 예정)와 영국(EU탈퇴 예정) 사이에 세관통제를 적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DUP는 합의안에 반발했지만, 존슨 총리는 테레사 메이 전 총리와는 달랐다. 성가신 연정 파트너를 달래려고 고심하는 대신, 12월 12일 치러질 선거에서 과반석을 확보해 DUP와의 연정을 끝낼 심산이다. 

북아일랜드의 여러 정당들이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협약을 체결한 상황에서, 이번 선거는 DUP에 가혹한 결과를 가져올 지도 모른다. DUP를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DUP에 맞서서 성공할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거 후보자들을 사퇴시킬 것이다. 한 때 유럽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정당에 가혹한 현실이 닥칠지도 모른다. 

 

글·크리스토프 질리슨 Christophe Gillissen 
노르망디 캉 대학교 교수, 아일랜드학 전공 

번역·권정아
번역위원


(1) 이 숫자는 비록 교회에 충실히 다니는 신자는 아니지만(혹은 더 이상 아니지만), 신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포함한다. 
(2) 이 협정의 목표는 1998년의 ‘성금요일협정’이 시행되지 않아서 정지된 북아일랜드 행정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신페인당은 경찰 공권력의 합법성을 승인하고, 민주연합당은 민족주의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