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정치를 움직이는 영국의 ‘딥스테이트’

2020-01-31     다니엘 핀 l 저술가

정치권에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딥스테이트(Deep State. 민주주의 제도 밖의 숨은 권력 집단-역주)’가 그것이다. 본래 이 개념은 군사독재를 경험한 그리스나 터키 같은 국가에서 권위적인 국가기관과 권력화한 범죄조직, 극우 세력 간 이뤄지는 밀접한 관계를 가리켰다. 하지만 브렉시트 찬성 세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 세력이 이 개념을 사용하면서부터 이 같은 함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들이 말하는 ‘딥스테이트’란 사실상 선출된 권력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단순한 의미의 ‘국가’, 즉 행정 및 사법 관료로 이뤄진 ‘영구 정부(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 존재하는 정부 기관-역주)’에 지나지 않는다.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영국에서는 이 ‘딥스테이트’라는 개념이 실제 형태로 구현됐다. 이는 아일랜드 통합에 찬성하는 가톨릭 계열 민족주의 세력과 개신교 계열 ‘충성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충성파는 북아일랜드를 영국에 남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북아일랜드 분쟁 기간(1968~1998)에 영국의 치안부대는 민족주의 세력 수백 명을 살해한 이 무장단체들과 협력했다. 

우리는 오늘 많은 증거를 활용해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재구성할 것이다. 당시 이뤄졌던 결탁 행위의 규모는 스페인의 악명 높은 GAL을 능가한다(GAL은 바스크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ETA에 대응하기 위해 펠리페 곤잘레스(1982~1996) 사회주의 노동자당 정부의 후원하에 조직된 단체다).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났던 이 같은 결탁은, ‘딥스테이트’가 소송을 통해 ‘국가의 적’으로 간주된 이들을 얼마나 극심히 공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국 정부와의 투쟁 과정에서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 통일 아일랜드 건설을 목표로 하는 과격파 무장단체-역주) 및 여타 소규모 공화파 무장단체들은 2,057명을 살해했는데, 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으로 인한 전체 피해자(3,532명)의 58%에 달했다. 반면 1966년 결성된 UVF(Ulster Volunteer Force)와 1971년 결성된 UDA(Ulster Defence Association)를 위시한 충성파 무장단체(1)는 총 1,027명을 살해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비전투원을 공격 목표로 설정하는 데 있어 충성파 단체들은 훨씬 무자비했다. 분쟁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 중 약 절반은 충성파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IRA를 포함한 공화파의 테러로 인한 사망자 중 35%가 민간인이었고, 충성파의 경우 사망자 중 85%가 민간인이었다.(2)

어느 당이 집권하든 정부의 공식해명은 언제나 “치안부대는 IRA 및 충성파 전투원들 모두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해왔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치안부대가 충성파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두 가지 명백한 근거가 있다. 우선 IRA와 달리 충성파는 군인이나 경찰, 정치인을 공격 목표로 삼지 않았다. 다음으로 충성파는 각 지역의 연방주의 개신교 계열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동시에 각 치안부대가 모집한 신병 대다수 역시 이런 공동체 출신이었다. 즉, IRA와 영국 정부 간에는 최소한의 협력도 불가능했던 반면, 치안부대와 충성파 무장단체 간에는 ‘공동의 적’에 맞선 협력이 가능한, 잠재적 기반이 있었다.

정부 대변인은 이런 결탁에 대한 문제 제기를 모두 ‘IRA의 프로파간다’로 규정했다. IRA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당시 모든 민족주의자가 IRA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역주)가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많은 증거가 축적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설치됐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 같은 기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련의 공식 보고서를 통해 영국 정부와 충성파 무장단체 사이에 전반적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북아일랜드 분쟁 중 충성파 무장단체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행위를 수행했다. 1970년대 중반 폭력행위는 첫 번째 절정에 달했다. 1972~1976년, 개신교계 무장단체들에 의해 567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대다수가 가톨릭계 민간인이었다. 이어진 1980년대 전반은 비교적 잠잠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후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살해사건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충성파 무장단체들은 1983~1987년에 50명을 살해했다. 그리고 1988~1994년에는 무려 224명을 살해했다. 1992년 UVF와 UDA는 IRA보다도 많은 희생자를 냈고, 대부분 무작위로 선택된 가톨릭계 민간인이었다.

 

무장단체의 유일한 현대식 무기 공급처

정부 당국자들이 충성파 무장단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바로 UDA의 법적 지위였다(UDA는 1992년까지 합법조직이었다). 1972년, 영국 정부는 한 문서를 통해 UDA의 구성원이 UDR(Ulster Defence Regiment, 얼스터 방위연대. 1970년 발족된 영국 육군의 보병 연대. 얼스터는 영국이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정책을 수행할 때 개신교 신자들을 다수 이주시켰던 북아일랜드의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신교도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역주)을 통해 영국군에 입대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UDA는 불법단체가 아니며 UDA 가입 역시 군법에 규정된 범죄 구성요소가 아니다. 또한, UDA는 그 구성원을 모두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간주할 수 없는 거대조직이다. UDA 가입 이력을 이유로 UDR 대원을 제명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3) 

이듬해 나온 한 보안 문서는 UDR 구성원의 5~15%가 “무장단체와 연결돼 있으며 동시에 2개 단체에 소속된 경우도 많았다”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UDR 소속 군인들이 충성파 무장단체에 무기와 탄약을 넘겨주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충성파 무장단체들의 “유일한 현대식 무기 공급처”(4)였다는 것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78년 아일랜드 정부는 영국 정부의 무재판 구류 정책을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소했다. 정부 측 대리인은 청문회에서 정부가 공화파와 충성파 양쪽 모두에 동일하게 대응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정부 측은 충성파 무장단체들이 IRA처럼 체계적으로 훈련된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 북아일랜드 주둔 영국군 사령관인 해리 투조는 UDA가 “테러조직은 아니었으며 상당히 크고 전투적인 시위대라고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비공식적이기는 했지만, 영국 정부는 이내 그의 이런 논증이 탄탄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1970년대 이뤄진 이런 결탁에 관한 많은 연구가 ‘글레난 그룹(Glenanne Gang)’의 활동에 초점을 맞췄다. 충성파 민병대인 이들은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바 있다.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들 중에서도, 역사는 특히 1974년 모너핸과 더블린에서 34명의 희생자를 낸 폭탄 테러를 기억하고 있다. 이 민병대에는 영국 반테러 활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왕립 얼스터 경찰대(RUC)와 UDR의 현역 대원이 가입돼 있었다.

1998년 성 금요일에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에 따라 RUC는 북아일랜드 경찰국으로 전환됐다. 그 안에 있는 과거사수사팀이 현재 글레난 그룹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하고 있다. 수사팀은 글레난 그룹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을 때 이들을 제대로 기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RUC가 많은 비판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민족주의 공동체의 구성원과 희생자 가족들은, 수많은 사건에서 엄정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충성파 무장단체의 가톨릭계 민간인 테러가 계속됐고, 그 배후에 치안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수사팀은 이런 의혹을 반박할 수도, 해소할 수도 없었다. 이들의 수사는 당시 체계화된 조사전략이 부재했고 고의적인 누락 역시 심각했음을 밝혀냈다.”(5)

과거사수사팀은 치안부대와 충성파 무장단체 간 협력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 증거들은 정부 수뇌부에 “경종을 울렸어야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었다.”(6) 1970년대 후반 RUC 대원들은 가톨릭계 펍을 향한 테러에 가담했다. 탄환 분석을 통해 그간 글레난 그룹이 수많은 살해사건에 사용해 온 무기들이 경찰 화기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기존에 살인혐의로 기소됐던 경찰관 한 명을 제외한 모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데 그쳤다. 수사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판사는 피고인들을 “실수를 저지른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했다.(7)

 

정보원들의 실질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1970년대 말 영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을 꺼린 이유를 알 수 있다. 당시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에 대해 세운 반테러 정책은 ‘얼스터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IRA와의 싸움에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정치가들에게 분쟁 종식의 책임이 있다는 압박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지에서 새로 충원된 병력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결탁의 ‘명백한 증거들’이 대중에 공표될 경우, 영국 정부는 RUC와 UDR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치안정책을 유지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충성파 무장단체의 테러가 재개됐을 때, 그 중심에는 UDA 대원이었던 브라이언 넬슨이 있었다. 영국 육군의 비밀 첩보조직 FRU(Force Research Unit)의 요원이었던 그는 UDA의 치안 책임자가 됐다. 그의 존재는 1989년 2월 12일에 있었던 패트릭 피누케인(당시 IRA 용의자들을 변호했던 선임 변호사) 살해사건의 준비 과정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이 밝혀지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의 압력을 받은 검찰은 1992년 넬슨에 대한 유죄 판결에 동의했고, 그 대신 소송과정에서 반대 심문을 하지 않을 것을 보증했다.(8) 넬슨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4년 뒤 석방됐다. 당시 넬슨의 상관이었으며 그를 대신해 증언했던 고든 커(당시 FRU 총 책임자-역주)는 넬슨의 행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도덕적 책임감을 느낀다”고 진술하면서, 그를 “시스템에 매우 충성스러운”(9) 사람으로 묘사했다. 재판이 끝난 뒤, 고든 커의 증언은 UDA에서 넬슨이 수행한 활동에 대한 법원의 판단에 잘못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드러났다. 넬슨은 테러리스트 활동을 막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UDA에서 수행했던 FRU 첩보파일 재구성은, 테러리스트들이 공격 목표를 더 정확히 설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넬슨 사건은 치안부대의 정보원 관리에서 결정적인 허점을 드러냈다. 첩보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RUC 특수 지부는 2000년대까지도 충성파 무장단체 안에 수백 명의 정보원을 투입하고 있었다. 치안부대 옹호론자들은 정보원들이 제공하는 첩보가 테러범죄를 막는 데 기여하는 한, 일부 불법적 활동은 덮여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넬슨 같은 정보원들의 실제 임무가, 오히려 테러범죄를 돕는 것이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제 충성파 무장단체들의 폭력행위의 핵심에 치안부대의 공조가 있었다는 명확한 그림이 그려진다.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다가도 사건이 임박해서는 기묘하게도 철수하는 차량, 체포되기 전 미리 언질을 받은 정보원, 조사되지 않은 명백한 흔적, 감춰지거나 손상된 증거들.(10) 이런 폭로에 대해 영국 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이 같은 결탁이 일부의 소행일 뿐이며, RUC와 UDR의 일부 ‘도적 떼’ 같은 대원들이 첩보 파일을 충성파 무장단체에 팔아넘긴 뒤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며 꼬리를 잘랐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 수뇌부와 그 ‘일부’의 결탁에 대한 증거를 들이밀었을 때는 침묵을 지켰다. 각 부대가 작전 수행이 가능한 상황을 마련해준 것은 바로 군경 지도부였다. 또한, 이들의 정치적 후견인들 역시 런던에서 모든 정보를 받아보고 있었다. 이런 지휘 체계의 최상단에 있는 책임자들이 현장 상황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영국 정부는 피누케인 살해사건에 대한 완전한 공개적 조사의 개시에 대해 언제나 반대 입장으로 대응했다. 아마도 그들은 퍼즐 조각을 맞춰 완전한 그림을 재구성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 테다. 책임 소재에 대한 다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툼은 브렉시트라는 위기로 이미 불안정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을 더욱 동요시킬 뿐이다.  

 

 

글·다니엘 핀 Daniel Finn
저서로 『One Man’s Terrorist: A Political History of the IRA』가 있다.

번역·오규진 mrcrazyani@gmail.com
번역위원


(1) 두 단체 모두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투쟁 중단을 선언했으나 단체 자체는 존속하고 있다. 이들은 더 작은 규모지만 여전히 폭력과 범죄를 이어가고 있다.
(2) 기사에 인용된 모든 수치는 북아일랜드 분쟁을 전문으로 다루는 CAIN Bibliography 데이터베이스를 출처로 한다. https://cain.ulster.ac.uk
(3) Margaret Urwin, 『A State in Denial: British Collaboration with Loyalist Paramilitaries』, Mercier Press, Cork, 2016에서 인용
(4),(5),(6),(7) Anne Cadwallader, 『Lethal Allies: British Collusion in Ireland』, Mercier Press, 2013에서 인용
(8) Ian Cobain, 『The History Thieves: Secrets, Lies and the Shaping of a Modern Nation』, Portobello Books, London, 2016.
(9) <The Irish Times>, 1992년 1월 30일 및 2월 4일.
(10) Mark McGovern, 『Counterinsurgency and Collusion in Northern Ireland』, Pluto Press, London,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