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이름으로… 시험대 선 무슬림형제단

[Spécial] 재스민 혁명, 연출과 캐스팅

2011-03-11     질베르 아슈카르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은 지난 2월 말 ‘자유정의당’을 창당하기로 결정했다. 정당으로 변신한 뒤 주요 정치세력으로서 이집트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이집트 봉기는 종교 중립적이고 민주적 성격의 연합세력(정당, 단체, 인터넷 네트워크)에 의해 주도됐다. 이슬람주의 운동세력도 집단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이 세력에 가담했지만 봉기 전부터 주변부에 머무른 다른 단체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회혁명의 전통적 주도세력인 대중정당이나 혁명적 전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1989년 동유럽의 반정부 그룹들에 더 가까웠다.

튀니지의 이슬람주의 운동이 신중한 태도를 보인 건 정권의 가혹한 탄압 때문이었다. 그만큼 튀니지 엔나다(Ennahda)의 행동반경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몸을 사리는 건 역설적이게도 군사정권이 그 정당을 합법화해줬기 때문이다.

1970년 9월 가말 압델 나세르가 사망한 뒤 정권을 잡은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주의자와 극좌파를 견제하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의 정치무대 복귀를 추진했다. 무슬림형제단은 반나세르주의자가 추진하던 경제개방(Infitah)을 적극 지지했다. 사회적인 관점으로 보면 무슬림형제단 내부에 이집트 신흥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화된 것을 뜻했다. 반면 이들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정권의 부정부패에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이런 양면성 덕분에 프티 부르주아지를 주 지지층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반동적·종교적 정치운동으로 탄생했고 지금도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집트의 정치·문화 제도를 이슬람화하고 샤리아(이슬람교 율법)를 국가의 법적 토대로 삼는 게 이들의 목표다. “이슬람이 해결책이다”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요약해준다. 한편 이들의 존재는 급진적·폭력적 성격을 띠는 근본주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다트 역시 사회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반대에 맞서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다. 1979년 이란 혁명 발발 뒤 6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는다. 반대 여론을 의식한 그는 이듬해 샤리아를 ‘모든 입법의 근본 원칙’으로 삼는 새 헌법을 도입한다. 이는 이집트의 기독교 소수파의 존재를 무시한 처사였다. 그러나 사다트는 새 헌법 도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집트 평화조약에 대한 무슬림형제단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슬람주의 세력, 왜 머뭇거렸나?

사다트는 이 시점부터 무슬림형제단에 등을 돌린다. 1981년 급진적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기 몇 달 전, 그는 무슬림형제단 조직원의 대대적인 체포를 단행한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호스니 무바라크는 무슬림형제단 구속자들을 석방한다. 무바라크는 재임 초기에는 사다트와 대조적인 온건하고 검소한 이미지를 내세우려 노력했다. 그는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무슬림형제단과 타협했다. 사다트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한 ‘감시하의 자유 허용’ 방식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1991년 걸프전 당시 이집트가 미국 주도의 연합군을 지원하면서 무바라크 정권과 무슬림형제단은 긴장관계에 들어선다. 이 갈등을 계기로 미국 및 미국을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중동의 온건 수니파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세력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의 골이 패게 된다. 알제리, 이집트, 튀니지의 이슬람 대중정당들은 후자 편으로 기울었다. 그동안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온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력에도 이 세력은 전쟁반대 운동에 나선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단절은 1990년대 이 세력들에 대한 다양한 탄압으로 귀결됐다(미국과 유럽은 이들에 대한 탄압을 지지했다).

지난 10년간 무슬림형제단 내부에서는 소심하고 보수적인 노쇠한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소장파 간부들 간에 대립이 격화돼왔다. 무슬림형제단이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동시에 민주적·민족주의적 저항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케파야(‘이제 그만’이라는 뜻) 운동에 참여한 것이 한 예다. 케파야 운동은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에 대한 연대로 출발해, 2003년 이라크전쟁 반대운동을 거쳐 권력세습을 추구하던 이집트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부상했다.

무바라크의 ‘형제단’ 회유

무슬림형제단은 2002년 터키의 보수 이슬람 정당인 정의개발당(AKP)이 선거를 통해 집권하자 크게 고무됐다. 그때까지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1992년 1월 알제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선거가 중단되고, 1997년 터키에서 군부의 압력으로 네지메틴 에르바칸이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하자 정치권력이 군부의 통제를 받는 국가에서 의회를 통한 권력 창출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된 터였다.

터키 정의개발당의 성공은 이런 인식에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 새로운 경향에 지지를 표명했다. 2004년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의 구실(대량살상무기 보유)이 무색해지자 ‘민주주의 보급’을 핑계로 내세운다. 미 행정부에서는 터키의 성공에 고무돼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에 좀더 개방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2005년 선거에서 복수정당에 선거 참여를 보장하고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야당에 좀더 많은 의석을 양보했다. 이로써 무바라크는 무슬림형제단이 자유선거 도입의 가장 큰 수혜자임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몇 달 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하마스가 승리를 거두자 부시 정부는 중동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에 ‘민주주의를 보급하겠다’는 뜻을 접었다.

정권 심기 살피며 제도권으로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버락 오바마는 2009년 6월 4일 카이로에서 중동 지역의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한다. 그의 연설과 무바라크를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는 이집트 반정부 투쟁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잠시 망설인 끝에 지난해 2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를 중심으로 결성된 자유주의 성향의 ‘변화를 위한 이집트 국민연합’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무슬림형제단은 11~12월 총선을 보이콧하자는 자유주의 반대세력의 제안을 무시하고 1차 선거에 참여한다. 기존 의석수를 상당수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2차 선거를 보이콧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존 의석수가 88석에 달했던 무슬림형제단은 이 선거에서 단 1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선거 결과가 또다시 여당의 압승으로 귀결되자 이집트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이집트는 전체 국민의 44%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반면, 출세욕과 탐욕에 사로잡힌 부르주아는 석유로 돈을 번 걸프만의 왕조들만큼이나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는 나라다. 이집트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그 불똥은 튀니지에서 왔다.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반정부 성향의 단체와 네트워크는 지난 1월 25일 모두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번에도 정권의 눈치를 보며 시위 행렬에 가담하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부터 반정부 투쟁에 조직적으로 결합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체제의 중요한 핵인 군부가 상황 정리에 나설 것을 예견하고 군부를 찬양하는 발언을 반복했다.

무바라크가 부통령으로 임명한 전 정보부 국장 오마르 슐레이만은 반정부 세력에게 대화를 제안한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슐레이만의 대화 제의를 받아들인다. 무슬림형제단은 사태 초반부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정권의 협상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시위대를 이끌던 젊은이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마침내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자 무슬림형제단은 군사평의회에 지지를 보내는 한편, 정치범을 석방하고 비상조치를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합법적인 정당으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우리가 바라는 건 민주주의”

무슬림형제단은 결국 이집트 사태 초기부터 워싱턴이 반복적으로 촉구했던 ‘평화적 정권이양’의 편에 선 것이다. 그 일환으로 정권 장악 의도가 없고 단지 민주적 권리를 누리는 게 목적임을 분명히 했다.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자 중 한 명인 에삼 엘에리안은 2월 9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향후 정권이양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려는 의도가 없다. 우리는 9월 대선에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민주적인 민간 정부가 들어서길 원한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삶에서 종교를 단호하게 배척하는 미국이나 유럽식의 자유주의적, 종교중립적 민주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밝혔다.(1)

같은 날 카이로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이 추구하는 체제는 이란처럼 종교인이 다스리는 “종교국가 형태가 아니라 종교에 기초한 시민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2) 그가 기자회견에서 아랍어로 언급한 ‘marja’iyya’는 의회에서 의결된 법이 이슬람교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고 경우에 따라 입법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종교적 기관이다. 이 제도는 2007년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못하던 터였다. 이 정치 프로그램은 여성이나 비이슬람 신자에게 대통령 출마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집트 군부는 무슬림형제단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인 소비 살레를 개헌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국회의원 출신의 변호사는 종교 중립을 비판하는 책을 쓴 바 있다. 개헌위원회 위원장으로는 퇴직 법관 타레크 알비슈리가 임명됐다. 그는 나세르주의에 영감을 받은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이다. 이들은 이집트의 이슬람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샤리아에 기초한 입법을 주장해왔다. 지난 2월 18일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셰이크 유세프 알카르다위는 대규모로 운집한 시위대에 시위를 중단하고 군부에 정권이양을 위한 시간을 주자고 촉구했다.

민중 저항 급진화 땐 군부가 손내밀 것

이런 식으로 워싱턴의 지원 아래 군부가 주도하는 ‘평화적 정권이양’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하는 이 방식은 1980~83년 터키의 상황과 비슷하다. 이를테면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당에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고 군부와 협력해 국정을 운영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터키 모델’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이집트 군부는 터키 군부와 달리 종교 중립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에 집착하지 않는 만큼 이 모델은 이집트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과 군부의 협력은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은 터키의 정의개발당처럼 이슬람교 근대화를 추진하지도 않을뿐더러, 팔레스타인에 대한 그들의 입장 때문에 계속 미국의 불신과 이스라엘의 적대감을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5일 이집트가 보여준 혁명적 잠재력이 완전히 힘을 잃지 않은 상황에서, 무바라크 퇴진 이후 더욱 거세진 사회적 저항의 물결은 이들 세력이 급진화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4면 기사 참조). 그럴 경우, 이집트에 새로운 좌파 세력이 등장하고 미국과 미국에 협조적인 이집트 군부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차악의 선택으로 무슬림형제단을 지목할 수도 있다.

글•질베르 아슈카르 Gilbert Achcar 
<아랍인과 쇼아: 이야기 속의 이스라엘-아랍 전쟁>(Sindbad-Actes Sud·아를·2009) 저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Essam El-Errian, ‘What the Muslim Brothers Want’, <The New York Times>, 2011년 2월 9일자.
(2) ‘Al-Ikhwan al-Muslimun: Narfud al-Dawla al-Diniyya li annaha dud al-Islam’, <Ikhwan> online, 2011년 2월 9일, www.ikhwanonl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