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포그롬’, 서구가 외면한 대학살

반유대주의로 번진 반공주의

2020-01-31     장자크 마리 l 역사학자

2019년 1월 21일,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부총리와 문화부 장관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 개최 장소는 1918~1920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군대 총사령관을 지낸 시몬 페틀류라의 이름을 딴 거리 페틀류라가 2-4번지다. 거리 한쪽 벽면에는 그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몬 페틀류라는 우크라이나의 국가 영웅이다. 지난해 10월 14일에는 키예프 남서부 비니차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페틀류라는 유대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포그롬(Pogrom: 반유대주의 폭동과 박해)’에 대한 책임이 있는 문제의 인물이다. 유대인 대학살은 대부분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좌파를 지칭)와 반혁명세력인 백위대(또는 러시아 백군)가 대립한 러시아 내전 중에 발생했다. 백위대는 볼셰비키 혁명이 유대인의 음모였으며, 모든 유대인의 배후에는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여겼다. 

이런 고정관념은 러시아, 벨라루스, 그리고 주로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발생한 총 1,500여 건의 포그롬으로 확대돼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1) 전투에는 안톤 데니킨 장군이 이끈 자원군과 ‘붉은군대’ 외에도 페틀류라의 민족주의 군대와 1919년 3~4월부터 반란 농민 무장세력이 ‘녹색군’으로 참가했다. 이 내전은 오래된 반유대주의를 촉발했다. 십자포화가 한창이던 우크라이나의 포그롬은 10만 명의 사상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병사들은 주거지를 약탈했고, 50만 명이 거지와 부랑자로 전락했다. 이들 병사는 대부분 1919년 2월 15~16일에 프로스코우로프(오늘날의 크멜니츠키) 마을을 공락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소재 러시아 적십자 포그롬 피해지원부 관계자 말에 의하면 페틀류라 민족주의 군대 병사들은 거주지에 강제로 침입해 군도를 빼 들고, 유대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히 살해했다. (…) 그밖에 지하실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들은 수류탄에 맞아 사망했다.(2) 앨버트 런던 기자는 이미 그 전날 페틀류라 군사령관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벽보로 내걸고 주민들을 위협했다고 보도했다. “무정부주의 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바다. 떠돌이 민족 유대인들은 특히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3)

포그롬은 곧 수도 키예프로 확대됐다. 1918년 1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 우크라이나 수도는 13차례나 함락됐다. 1919년 8월 29일, 페틀류라 부대는 수도에 진입하자마자 유대인 수백 명을 학살해 거리와 주택가 계단이 온통 시체로 뒤덮였다. 그 이튿날은 자원군이 진군해 도시를 포위했다. 키예프행 열차에서는 데니킨 장군의 군대 편에 선 극악무도한 극단주의자들이 승객들에게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도록 강요했다. 이런 기도를 모르는 유대인들은 열차에서 쫓겨나거나 고문을 당했고, 선로에 그대로 던져졌다. 그렇게 선로 주변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널렸다.

한편, 유대인들은 재앙처럼 번져나가는 반유대주의의 그늘에서 좀체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포그롬을 주도한 것은 페틀류라의 군대였다. 이들이 저지른 포그롬이 전체의 39.9%를 차지했다. 31.7%는 다수의 우크라이나 무장세력으로 구성된 녹색군이, 17.2%는 데니킨 군대가, 2.6%는 폴란드군이, 그리고 8.6%는 통제를 벗어나 독단행동을 한 붉은군대의 소행이었다.(4)

 

상투적 수사가 부른 치명적 파장

내전의 열기 속에서, 종종 강제로 투입되는 군인들은 시간이 지나 진영을 바꾸기도 했다. 제정 러시아 시기에 상대적 자치권을 대가로 국경지대 우크라이나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카자크들이 이에 해당한다. 한때 붉은군대 기병대로 활약했던 아타만(카자크 족장)은 격노한 농민들을 모아 ‘녹색군대’를 조직하고, 마을의 중앙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을 벌였다. 그 와중에 농민들은 그저 넋을 잃은 채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읊조렸다. 

5월 초, 아타만 니키포르 그리고리예프도 붉은 군대와 결별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을 비난했다. 즈나멘카에서는 그의 군대가 기차를 가로막고 유대인 승객 200명을 사살했다. 이 부대는 달리는 열차를 멈추고 200여 명의 유대인 승객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5월 중순, 사흘 동안 그들이 엘리자베스그라드(오늘날의 키로보흐라드)에서 살해한 유대인의 수는 무려 3,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5월 말에는 붉은군대가 진군해 이들 군대를 격파했다.

군대 상부에서는 유대인 학살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진영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우선 백위대 장교들은 살인 행각을 독려했고 군인들은 유대인을 살해할 때마다 상여금을 받았다. 반면 붉은군대 지도부는 그런 행위를 징벌했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포그롬을 저지른 열댓 명의 카자크를 총살형에 처했다. 1920년,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블라디미르에서 포그롬을 준비하던 붉은군대의 병사 24명을 3개월간 구금했다. 1918년 7월 27일, 레닌은 포그롬과 포그롬에 가담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모든 소비에트 연방정부에 반유대주의와 포그롬 운동을 뿌리 뽑도록 엄격한 조처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에 대한 정교회의 오랜 증오감은 유대인 혐오에 대한 자양분이 됐다. 세기 초, 검은백인단은 보드카에 취한 군중과 성가대를 선동해 유대인을 상대로 파괴, 강간,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그 후 군대는 반유대주의 폭동을 방관하거나 수위를 조절하고자 소극적으로만 개입하는 데 그쳤고, 대부분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질서와 사유재산 복구 차원에서 조처를 하곤 했다. 민중들은 1905년의 혁명으로 독재로부터 일정 부분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형성됐고, 설상가상 여기에 니콜라이 2세가 그 공식을 제시한 셈이 됐다.

1905년 10월 17일 자 편지에서 ‘유대인 집단’에 대한 병적 증오에 사로잡힌 니콜라이 2세는 포그롬을 정당화했다(러시아 정교회는 2000년에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을 성자로 시성함). 그는 “사람들이 혁명가와 사회주의자들의 부패와 무책임한 태도에 분개하고 있다. 그런 이들은 십중팔구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모든 분노가 이 혐오스러운 유대인들을 향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로 반유대주의 폭동이 발생했다”라고 기술했다.(6)

10월 혁명 이후, 반혁명적 반유대주의가 전개됐다. 이제 유대인들은 볼셰비키나 공산주의자와 동일시돼 ‘사회질서를 내부로부터 전복시키려는 이질적 집단’으로 인식됐다. 백위대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선전운동에서 ‘혁명적’, ‘볼셰비키’, ‘유대인’ 이 세 단어는 동일시됐다. 급기야 이 표현은 상투적 수사로 굳어졌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유대교 랍비가 신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카자크의 아타만 쉬르카를 찾은 적이 있다. 이때 아타만 쉬르카는 “나는 당신이 볼셰비키라는 것을 알고 있소. 모든 빌어먹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당신네 신자들도 볼셰비키라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 내가 당신들을 모조리 쓸어 없애버릴 테니 그렇게 아시오”라고 일갈했다. 쉬르카의 병사들도 유대인 희생자들을 향해 고함쳤다. “모든 유대인을 처치하자. 이 자들 모두 볼셰비키다.” 카자크의 또 다른 아타만 팔리엔코 역시 “모든 떠돌이 유대인은 결국 모두 볼셰비키다”라고 못 박았다.(7)

이런 혼란은 치명적인 소문을 낳았다. 지토미르에서 붉은군대가 철수한 후, 정치경찰이 일반인 24명을 총살했는데, 이 소식은 기독교인 1,700명이 처형됐다는 뜬소문으로 와전돼 또 한 차례 유대인을 향한 분노가 촉발됐다.(8) 이때 벌어진 학살은 장장 닷새에 걸쳐 지속했고 묘지에 인접한 시체안치소 건물은 노인과 여성, 아동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다.(9)

자원군의 선전정보기관 OSVAG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볼셰비즘,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를 비롯한 모든 피해의 대가를 유대인들이 치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10) 이 기관은 ‘전 세계를 정복하려는 유대인들의 망상’이 담긴, ‘유대-프리메이슨 회의록’이라 불리는 시온 장로 의정서를 재발행하기도 했다. 시온 장로 의정서는 1903년 러시아 제국 내무성 산하의 비밀경찰기관 공안질서수호국 출신 요원 두 명이 포그롬을 정당화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위서다.

 

“트로츠키 대신 대가를 치르는 것”

가해자들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너희들은 지금 트로츠키 대신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외치곤 했다. 당시 트로츠키를 묘사한 풍자 삽화에는 갖가지 판박이 표현이 모두 동원되곤 했다. 그는 피 묻은 입술과 구부러진 코를 가진 흡사 흡혈귀 같은 외모로, 크렘린의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의 목 주위에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었다. 바닥에는 해골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산이나 카를 마르크스 동상 발치 아래에서 트로츠키는 러시아 처녀를 칼로 찌르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었다.

백위대는 선전활동에서 트로츠키뿐 아니라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유대인 이름을 자주 언급했다. 소수의 유대인이 마치 혁명세력의 전체인 양, 나무로 숲을 가리는 셈이었다. 러시아 시오니즘의 경제학자 보리스 브라우츠쿠스는 “유대인들은 몰수된 공장과 토지를 넘겨받은 농민들의 혁명운동과는 무관했다”라고 기술했다.(11) 부유한 유대인들은 되려 백위대에 자금을 지원했고, 은행가 아브라함 할페린은 카자크 알렉세이 케일에게 80만 루블을 지원하기도 했다. 1918년 2월 오데사에서 소집된 우크라이나 랍비 의회는 소련의 권력을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같은 달, ‘유대인 사회주의 및 세속 운동 분트(Bund)’ 총회가 키예프에서 열려, 찬성 762표, 반대 11표, 기권 7표로 볼셰비키의 행동을 규탄하기로 의결하기도 했다. 

1918~1919년 크림반도 반 볼셰비키 정부의 일원이자 크림반도 유대인 공동체 연합회장을 지낸 시오니즘 운동 지도자 다니일 파스마닉은 “자원군이 투쟁에서 대단한 영웅주의와 희생정신을 발휘했다”라면서 “백위대의 단점과 과오를 알고 있지만, 그들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2)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유대인에게 죽음을 선포하거나 ‘떠돌이 유대인들’을 전부 학살하겠다고 선언한 군대에 말이다.

서구 국가에서는 혁명을 타도하고자 원정군을 파견해 백위대를 지원했다. 이에 몇몇 유대인 단체는 이들 서구 국가 여론을 환기하려 애썼다. <유대인 주간(Evreiskaia Nedelia)>은 1918년 1월 18일부터 매주 우크라이나에 만연한 ‘유대인 박해’를 비난했다. 1919년 1월 여러 유대인 정당이 모여 창설한 포그롬 희생자 중앙위원회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상세한 목록을 작성, 이를 다시 책자로 만들어 각지의 적십자사 지부와 해외 유대인 단체에 배포했다.

유럽과 미국의 격앙된 반응을 접한 포그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은폐하려 들었다. 훗날 페틀류라는 “유대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계속 총을 쐈던 이들은 우리가 아닌 볼셰비키”라고 둘러댔다.(13) 그리고 “나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포그롬이나 약탈, 대량살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조차 모른다”라고 덧붙였다.(14)

1930년대에 백위대와 나치의 ‘볼셰비즘 타도’를 주창했던 알렉세이 본 램페 장군은 포그롬을 유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순 약탈이었다고 일축했고, 정복당한 도시에 물자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주민들이 모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위대가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유대인을 공격대상으로 삼은 포그롬, 즉 유대인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조직적인 행동도 없었다고 주장했다.(15)

1919년 8월 8일, 유대인 대표단은 데니킨 장군에게 포그롬 행위를 공개적으로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교묘히 모면했다. 백위대에 호의적인 바실리 막라코프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는 포그롬이 유럽과 미국 등의 공여국에 나쁜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윈스턴 처칠도 데니킨 장군에게 그의 군대가 지배하는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살해되는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충고했는데, 유대인들에게 동정심을 느껴서라기보다는 소련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결속시키고자 하는 이유였다.(16)

그러나 데니킨 장군은 ‘유대-볼셰비즘-프리메이슨’ 음모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장교단을 감히 설득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모호하고 형식적인 조치만 취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국, 프랑스, 미국 등 다른 국가 정부들은 백위대 앞으로 정치적·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끊임없이 제공했다.

막라코프는 “포그롬에 대해 구두 경고를 내리고 두세 가지 법령만 만들면 동맹국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볼셰비키 반정부 장관 바실리 마클라코프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더 적게 관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이득이 된다”라고 부연했다.(17) 1926년 5월 25일, 사무엘 슈바르츠는 파리에서 포그롬 희생자들에 대한 보복으로 페틀류라를 살해했다. 막라코프는 페틀류라를 평소 ‘포그롬주의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살인범을 재판하는 자리에서 프랑스의 앙리 프로이베르크 장군은 “페틀류라는 항상 프랑스의 측근으로 역할을 했고, 프랑스 점령군과 가장 긴밀한 방식으로 협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라고 증언했다.(18)  

 

 

글·장자크 마리 Jean-Jacques Marie 
역사학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2) Lidia Miliakova(편집), Nicolas Werth(편집), 『Le Livre des pogroms. Antichambre d’un génocide. Ukraine, Russie, Biélorussie, 1917-1922, 포그롬의 서(書). 대량 학살의 대기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1917~1922』, Calmann-Lévy – Mémorial de la Shoah, 파리, 2010.
(3) Albert Londres, 『Grands reportages à l’étranger 주요외신』, Flammarion, 파리, 2017.
(4),(7),(13) Lidia Miliakova et Nicolas Werth, 『Le Livre des pogroms 포그롬의 서(書)』, op. cit.
(5) Izvestia, ‘L’Antisémitisme en Russie. De Catherine II à Poutine 러시아의 반유대주의. 예카테리나 2세부터 푸틴까지’, 모스크바, 1918년 7월 27일.
(6) Vassili Choulguine, 『Ce qui en eux ne nous plaît pas 우리가 그들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것』(러시아어), Khors, 상트페테르부르크, 1992.
(8) 정치경찰은 볼셰비키 정권의 적과 대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9) Livchits, 포그롬 피해 지원 중앙위원회 대표의 보고서, Lidia Miliakova et Nicolas Werth, 『Le Livre des pogroms 포그롬의 서(書)』에서 인용
(10),(11) Oleg Boudnitsky, ‘Les Juifs et la révolution russe 유대인과 러시아 혁명’(러시아어), Gesharim, 모스크바, 1999.
(12) Daniel Pasmanik, 『Les Années révolutionnaires en Crimée 크림반도의 혁명기』 (러시아어), Société anonyme imprimerie de Navarre, 파리, 1926.
(14) Simon Petlioura,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총사령관 Le commandant en chef prisonnier d’espoirs chimériques’(러시아어), Letny Sad,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pe, 2008.
(15) Alexei von Lampe, <Possiev>, 1981, 제3호, 모스크바, 1981.
(16),(17) Oleg Boudnitski, 『Les Juifs russes entre les rouges et les blancs 적백내전 사이의 러시아 유대인』(러시아어), Rosspen, 모스크바, 2005.
(18) Alain Desroches, 『우크라이나의 문제와 시몬 페틀류라. 화염과 잿더미』, Nouvelles Éditions latines, 파리,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