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분열시키는 프랑코 독재 정권의 망령

2020-01-31     폴린 페레노 외

지난해 11월, 스페인 총선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복스가 제3당으로 약진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노동당이 전체 350석 가운데 120석을 차지해 1당을 지켰으나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단독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는, 이른바 ‘헝 의회(Hung Parliament)’가 탄생했다. 이번 총선에서 극우정당 복스는 15% 득표율로 52석을 획득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24석 확보로 처음 원내 진입한 뒤 약 7개월 만에 의석수가 2배로 늘어난 것이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잔영이 여전히 분열을 조장하는 가운데 복스당은 포퓰리즘 극우 노선으로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버스는 마지막 커브를 돌아 ‘전몰자의 계곡’ 앞뜰에 도착했다. 기념관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150m 높이의 십자가가 도로를 굽어보고 있다. 과다라마 산맥의 소나무와 시스투스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당 내부에는 300m 길이의 지하 무덤이 있다. 이곳에 프랑코 체제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린 기념관 ‘전몰자의 계곡’이 조성돼 있고, 또한 프랑코 총통의 묘지도 있다. 마드리드 북서쪽에 있는 이 건축물은 프랑코 총통이 내전을 벌인 두 진영 간 ‘화해’의 상징으로 조성했다. 

1940~50년대, 공화파 포로 수천 명은 자신들이 당한 수모의 상징을 바위에 새기는 노역에 동원됐다. 이곳 성당에서는 미사가 열리고, 당시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나치식 경례를 한 채 행진하며, 버스를 타고 방문하는 관광객은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한다. 파시스트 상징물이 그득한 이곳, 3만 3,000명이 묻힌 최대 집단매장지인 이 기념물의 역사를 알려주는 게시판은 하나도 없다.

 

“무력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유일한 나라”

이에 대해, 많은 프랑스인은 군사정권의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스페인 최고법원은 2019년 9월 24일,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가 2018년 6월부터 추진한 프랑코 카우디요(스페인어권 국가에서 정치군사 지도자에게 붙이는 칭호-역주)의 유해이장 계획을 승인했다. 사회노동당(PSOE)이 여러 달 주저했고 국민당(PP), 가톨릭교회, 극우단체가 유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프랑코 총통 유족의 상소가 기각되면서 2019년 11월 10일로 예정된 총선거 이전에 총통의 유해를 이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2019년 10월 24일, 프랑코 장군의 묘지는 이전됐다.

하지만 전몰자의 계곡 내 총통의 영묘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과거사 청산 단체는 스페인 내전(1936~1939년)과 군사정권의 피해자들이 최소 10만 명에서 많게는 11만 4,000명까지 집단매장지에 묻혀 있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프랑코 총통에 대한 찬양의 열기는 그의 사망기념일인 11월 20일, 그리고 카탈루냐 독립 반대 집회 수백 곳에서 여전히 뜨겁다. 

2018년 12월의 안달루시아 지방의회 선거와 2019년 4월의 스페인 하원 선거에서 극우 정당 복스의 후보자가 선출되면서 역사적 기억을 둘러싼 분쟁에 불씨를 지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원이자 복스당 원내대표인 로드리고 알론소 페르난데스는 “스페인이 두 진영을 편파적으로 대하고 있다”라면서 “무너진 자들을 순교자로, 무너뜨린 이들을 악마로 묘사한다”라고 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재단(FFF)도 같은 의견이다. 이 재단은 프랑코 장군의 사망 1년 후 “프랑코 총통과 1936년부터 1977년까지 스페인의 운명을 개척한 정부의 유산, 사상, 명예를 기리고 알리기 위해 설립됐다.” 마드리드 소재 건물에서 만난 후안 치차로 오르테가 재단장이 설명했다. 

흉상, 거대 초상화, 독수리 문장이 찍힌 프랑코 정권 시대 국기 등이 전시돼 마치 군사정권의 부귀영화를 기리는 박물관과 같은 이곳에서 퇴역 해병대 장군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부관을 역임했고 (프랑코 장군처럼)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한 오르테가 재단장은, 자신이 실천한 정치사상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은 무력으로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유일한 나라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일을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적 기억을 운운하는 대다수의 단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레닌 시대의 마르크스주의가 주로 활용하던 무기였지요.”

극우파 입장에서는, 공화파들의 무분별하고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과 프랑코 정권의 조직적, 체계적, 대대적인 억압 사이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친프랑코 정권 세력이 자연 발생적으로 재등장한 것은 아니다. 보니파시오 산체스 역사적기억복원협회(ARMH) 대변인은 “스페인은 권력의 모든 층위에서 조직적으로 망각을 조장했다”라고 지적했다. 1975년 11월 프랑코 장군이 사망하면서 시작돼 1982년 10월 총선에서 스페인사회당(PSOE)이 우파 정당(1)을 상대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을 내린 민주주의 체제 전환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양대 진영은 스페인 공산당(PCE)의 지지를 받아 민주화가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힘쓰면서 1936년 7월 17일 발발한 군사 쿠데타로 붕괴한 공화국, 쿠데타로 촉발된 내전과, 이어진 40년의 군부 독재 시절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냈다. 

10년 넘게 투옥 생활을 했던 마르셀리노 카마초 공산당 의원은 민주화로 인해 각 진영은 사면법에 찬성한 1977년 10월 15일부로 자기들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게 됐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사면법이 “국가적 화해 정책의 주춧돌”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공산당은 전쟁 피해자들과 원한을 같이 묻었다”(2)라고 덧붙였다.

 

‘국가적 기억상실증’, 독재정권의 존재 부인

민주화의 주역인 스페인사회당(PSOE)은 가급적 마찰이 없는 ‘화해’를 이뤄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가령 1985년에는 마드리드 아토차역 근처에서 나폴레옹 군대에 총살당한 스페인 전투병들을 기리는 1808년 5월 3일 학살자 기념비를 ‘스페인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기념비로 공식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군대가 행진하고, 팔랑헤당과 공화당 출신의 두 퇴역군인이 서로 얼싸안았다. 20년이 지난 2004년 10월 12일에는 국경일을 맞아 사회주의 정부를 이끄는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르클레르 사단 소속이었던 공화당원과 프랑코 장군이 동부 전선 전투를 위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지원한 스페인 의용대 푸른 사단 소속 단원이 함께하는 행진을 기획했다.

“이런 정황으로 프랑코주의가 집단 무의식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라고 후안 미겔 바케로는 개탄했다. 공화파의 기억이 부재한 상황은 독재정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이 재등장하게끔 했고, 언론은 이를 ‘기억상실증’이라 명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단체가 2000년을 기점으로 폭넓게 진행한 유해발굴 작업은 집단매장지의 현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법무부가 집계한 2,400여 개의 집단매장지 중 2000~2018년 발굴된 것은 740개에 불과하다. 

노동총동맹(CGT)(3)과 연계된 ‘사회사 기억 회복을 위한 안달루시아 작업단(RMHSA)’ 소속 세실리오 고르디요는 “2000년대 세비야에서는 파시스트들 이전에 공화파들이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우파들이 소문을 퍼트렸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유해발굴 작업은 “유족에게 유골을 찾아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매장됐는지 알아내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현재 PCE당이 주도하는 좌익연합(Izquierda Unida)은 과거사 청산 움직임에 힘을 싣고 있다. 알베르토 가르손 좌익연합 대변인은 2018년 6월 29일 국회에 ‘민주적인 기억과 프랑코 정권 및 체제 전환기의 희생자를 위한 보상 법안’을 발의했다. 최근 활발한 이런 움직임은 급진 좌파 전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정치권의 알력 관계 변화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2008년 경제 위기와 PP당(4)의 무더기 부패 스캔들(수가 적긴 하지만 스페인사회당(PSOE)도 마찬가지)은 체제 전환기부터 자리 잡은 양당체제를 약화시켰다. 2014년에 창당된 포데모스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과거사 청산 단체가 암암리에 긴 호흡으로 추진해온 활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과거사 청산 활동의 기점으로 언급되는 2000년에 프리아란사 델 비에르소(레온주)에서 집단매장지가 발굴되면서 ARMH가 설립됐고, 그 후로 수많은 단체가 지난한 투쟁을 함께 해오고 있다. “계속 기억돼야 합니다.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인터뷰 당시 바르셀로나시의 역사적 기억 복원 계획 위원이었던 리카르드 빈예스 역사학자는 강조했다. 1976년에 합법적 단체로 인정받은 ‘프랑코 정권 시대 정치 사범들의 카탈루냐 협회’(Acepf)는 역사적 기억 보존의 좋은 사례다.

안토니아 호베르 Acepf 집행위원은 “우리 단체는 출소자들이 적극적으로 수감자들을 지원하던 연대 모임에서 출발했다”라고 설명했다.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프랑코 정권에 맞선 저항 운동 세력들이 우리와 유사한 단체를 세웠다”라고 카를레스 발레호 Acepf 회장이 말을 이었다. “공화파 비행사들, 보병들 등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현재 이들 모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유해발굴 작업을 중심으로 재편된 단체들의 변화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발레호 회장은 “자녀들과 손주들이 부모와 조부모에게 과거사를 물으면서, 집단적 상상계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라며 “억압이 야기한 공포는 야만적이었습니다. 침묵이 생존방법으로 여겨졌고, 그 상태가 계속 이어졌지요”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집단매장지 발굴 작업이 대대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만큼 전시 실종자 가족이 많았던 것이다.

과거사 청산 운동을 간과할 수 없게 되자, 스페인사회당(PSOE)은 2007년에 역사적 기억에 관한 첫 번째 법을 제정했다. 집단매장지 위치 파악, 기록문헌 공개, 공공장소에서 프랑코 정권의 상징물 제거 등이 주요 골자다. 이 법은 변화의 신호탄이었지만, 과거사 청산 단체들은 이 법이 “프랑코 장군 치하에서 정치적인 사유로 선고된 형벌이 ‘불법’이라고 선포할 뿐,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또한, 마리아노 라호이(PP당)의 임기 중에 그나마도 사문화될 수 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독재정권 피해 소송, 약 9,000명 동참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가 2008년 착수한 ‘강제실종’ 관련 수사가 실패한 후 2010년 아르헨티나에서 프랑코 독재정권의 피해자 후손 2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아르헨티나 판사는 보편적 정의의 원칙에 따라 수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선고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국제체포영장이 발부된 피의자들을 상대로 한 심문 요청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아르헨티나 소송은 다큐멘터리 영화 <타인의 침묵>(2018)(5)으로 제작돼 현재 9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소송에 동참하게 됐다. 그중에는 ‘라 코무나’ 단체 회원이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에서 활동했던 호세 마리아 갈란테도 있다. 그는 학창시절 노동조합 활동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세 번 재판을 받고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5년을 보냈습니다.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재판정에 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라고 한탄했다.

여러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청산을 추구하는 단체의 투쟁은 계속됐고 지역 차원의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2016년 ‘불처벌에 반대하는 도시’ 네트워크가 형성됐고 마드리드, 발렌시아, 팜플로나,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라코루냐 등이 동참했다. 프랑코 정권의 피해자를 위한 사무소가 2018년 11월에 마드리드와 사라고사에서 개관했다. 바르셀로나 북동부에서 바다를 면하고 있는 파르크 델 포룸 공원 안에 있는 길이가 50m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인 ‘캄프 데 라 보타 기념비’가 지난 2월 24일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곳은 정치범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1939~1952년 프랑코 정권에 의해 희생된 1,706명의 이름이 수용자들을 총살하는 데 쓰였던 총살의 벽 위에 당시 자료사진과 수감자들의 편지와 함께 빼곡하게 나열돼 있다. 이제 새로 정권을 잡은 집단이 과거사 청산 정책을 유지해 갈 것인지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2019년 5월 지방선거 결과, 2015년 이래 집권해온 급진좌파 연합세력은 ‘반항을 꿈꾸는 도시’(6) 대다수에서 패배했다.

자체적으로 진취적인 역사적 기억법을 도입해 스페인 의회를 앞서 나가는 자치지방도 있다. 자주 언급되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비롯해 아라곤 지역도 2018년 11월 8일 ‘민주적 기억법’을 채택해 거리에서 프랑코 정권의 상징물을 제거하지 않는 도시에 법적제재를 가했다. 집단매장지의 위치도를 업데이트하고 유해발굴 절차서와 신원확인을 위한 유전자은행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와 단체 사이의 긴장감은 여전히 팽팽하다. RMHSA은 10년이 넘도록 시행정부와 지역행정부에 청원한 끝에, 마침내 지난해 4월 13일 ‘라 코르추엘라 수용소’(7) 안내 표지판 설치를 승인받았다. 표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과거사 청산 단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의원들과 언론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대기업과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투명하게 밝혀내려는 단체들은 고전하고 있다.

 

강제노역으로 일군 ‘경제 기적’의 신화

‘노동의 의미’를 회개의 한 방식으로서 승화시킨 가톨릭교회는 프랑코 정권의 억압적이고 구속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8) 갈란테는 “고해성사 덕분에 주임 신부들은 정보가 있었습니다”라면서 “가톨릭교회는 마을의 말썽꾼들, 죄인들, 공산주의자들을 신고하면서 우선 잡아들여야 할 적들의 목록을 작성한 셈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스페인 주교회의가 2007년 나름대로 사과했지만, 이 역사적 과오는 여전히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민간 부문도 별반 나을 게 없었다. 갈란테는 “재계에서 쿠데타를 지원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그랬듯 그들도 파시즘이 득세할 것이라고 내다본 것이지요”라며 “내전이 종식된 후 재계에서는 투자수익금을 챙겼습니다”라고 지적했다. 대기업들은 독재정권의 강제노역 동원을 통해, 사회기반시설(교통, 발전, 상하수도, 항만 등)을 건설하면서 큰 이익을 봤다.(9) 이것이 정치권 인사 상당수가 지금까지도 뿌듯하게 여기는 1960년대 ‘경제 기적’의 신화가 감추고 있는 민낯이다. 산체스 ARMH 대변인은 “서구 투자자들에게 스페인은 최적의 투자처였을 것”이라며 “인건비는 저렴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자단체 활동은 금지돼 노사 갈등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그들은 ‘기적’이라고 불렀다”라고 분석했다.

고르디요는 RMHSA 작업단에서 세비야 외곽 시립공원 한가운데 세운 작은 기념비 주위에 널브러진 비닐봉지와 캔을 치웠다. 콘크리트 틀 안에 수도관 단면부가 있고, 그 위로 철창이 쳐진 형상의 기념물이다. 구부러진 중간 철창은 탈옥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몇백 m 떨어진 곳에 엔트레카날레스 이 트라보라 기업의 하수처리시설을 세우기 위해 독재정권에서 지은 ‘엘 콜렉토르’ 수용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다. 아니, 미미하게 남아 있다. 

예전 수용소 자리에는, 엔트레카날레스 이 트라보라가 합병돼 설립된 대기업 건설사 악시오나의 물류창고가 세워졌다. 역사의 망각이 빚어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글·폴린 페레노 Pauline Perrenot 
기자, 언론비평단체 아크리메드(Acrimed) 회원
블라디미르 스론스카말보 Vladimir Slonska-Malvaud
기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민주중도연맹(UCD)과 현 국민당(PP)의 전신인 국민연합(AP)
(2) 1977년 10월 14일자 스페인 하원 회의록
(3) 스페인에서 노동총동맹(CGT)은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이다.
(4) 프랑코주의를 계승한 국민당(PP)은 최근 온건한 성향의 계파부터 독재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계파까지 모든 우파를 규합했다.
(5) Almudena Carracedo & Robert Bahar, <Le Silence des autres 타인의 침묵>, 프랑스에서 2019년 2월 13일 방송. 이 다큐멘터리는 스페인 공영방송에서 방송됐다.
(6) Pauline Perrenot, Vladimir Slonska-Malvaud, ‘Dans les villes rebelles espagnoles 반항을 꿈꾸는 스페인 도시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2월호.
(7) 세비야 남부 교외 공원에 있는 수용소. 이 지역에는 총 10개의 수용소가 있다. 1940~1943년 약 1,500명이 이곳에 수용돼 강제노역에 동원, 착취당했다.
(8) Gutmaro Gómez Bravo, ‘Le rôle de l’Église dans la répression franquiste 프랑코 군사정권 당시 자행된 탄압에서 가톨릭교회의 역할’ <Vingtième Siècle. Revue d’histoire(20세기, 역사지)>, n° 127, Paris, 2015년 7~9월호.
(9) 아나키스트 운동 전문가인 역사학자 호세 루이스 구티에레스 몰리나의 연구, 특히 안달루시아 지역의 역사적 기억 복원을 위한 웹사이트 www.todoslosnombres.org에 게재된 기고문 ‘Franquismo y trabajo esclavo, una deuda pendiente 프랑코주의와 강제노역, 갚지 못한 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