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깨어난 알제리인들의 저항
알제리에서 지난해 2월 22일 시작된 민중저항운동, ‘히라크(Hirak)’의 열기는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사임을 관철시킨 이후에도, 12월 12일 치러진 대선에서 전 총리인 압델마드지드 테분(74세)이 당선된 이후에도 시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체제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일 금요일, 알제. 수만 명의 시민이 도시가 위치한 고지대에서 내려와 디두슈 무라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중앙 대로가 모든 인파를 다 품기에는 비좁아 보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시민이 각양각색의 알록달록한 알제리 국기와 모자, 스카프, 현수막, 티셔츠, 각종 깃발 등을 들고나와 순식간에 오색찬란한 인간 급류를 형성했다. 경찰 헬기의 윙윙거리는 굉음조차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 소리를 덮기는 역부족이었다. 시위대는 지난해 4월 2일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사임한 이후 정권의 실세로 떠오른 육군참모총장 아흐메드 가이드 살라 장군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눴다.(1)
국내 밀입국자까지 등장시킨 시위 열풍
시위대는 가이드 살라 장군 외에도, 압델카데르 벤살라 임시 대통령과 누레인 베두이 총리도 함께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자유 민주주의 알제리”, “비군사 문민정부”, “신의 뜻에 따라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 도적 떼가 나라를 말아먹었다”, “비겁한 자들, 우리 아이들을 석방하라”, “깡패하고는 대화도, 선거도 없다.” ‘히라크(Hirak)’ 시위대가 다시 연호했다. ‘히라크’는 알제리나 모로코 북부 리프 산안지대, 혹은 레바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민중저항운동을 지칭한다. 한편 시위대는 구호를 연호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래퍼 술킹이 부른 <자유>나 유명 축구 응원가 <라 카자 델 무라디아>(2) 등을 함께 합창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반식민독립투쟁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가령 일부 시위자는 알제리의 전쟁영웅 알리 라 포엥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현 정권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보여주듯, ‘히라크’ 시위대는 ‘이스티크랄(독립)!’을 반복해 외치며, “군부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려라. 알제리는 독립할 것이다”라고 연호했다. 공교롭게도 금요일마다 열리는 ‘히라크’ 시위의 이번 제37차 집회는 알제리 독립투쟁 발발 65주년 기념일과 맞아떨어졌다. 1954년 11월 1일 시작된 독립투쟁은 사실상 프랑스 식민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현 정부는 알제 시위 규모를 줄이기 위해, 지난여름 이후 타 지역민의 알제 출입을 제한했다. 경찰과 헌병이 알제 시로 진입하는 구간에 바리케이드를 세워 통행을 통제하며, 자동차 번호판과 신분증을 검사해 수도 외 거주민으로 판단되면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바리케이드를 피해 수십 km 길을 돌아 히라크 시위대에 합류했다. 어떤 이들은 배를 타고 해안 도시를 출발해 알제 시 해안가로 진입했다. 사람들은 농담 삼아 이들을 ‘하라가(Harraga, 국내 밀입국자)’라고 불렀다.
정부는 시위행진이 담긴 동영상 유포를 막기 위해 인터넷을 통제하는가 하면, 맞불시위를 주모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인들은 저항시위에 동참했지만, 국영 TV는 정부가 주모한 시위대의 모습을 담은 대형 정지화면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의 눈물겨운 노력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오히려 세간의 비웃음만 샀다. 11월 7일 틀렘센(서부)에 모인 히라크 시위대는 제초제와 양잿물을 가지고 나와 군부와 대통령선거를 지지하는 50여 명의 시위대가 일명 ‘자발적인 집회’를 열었던 작은 광장을 말끔하게 닦아냈다.
정부는 현재 대대적인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있지만, 일부 시위자들에게 위협을 가하며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가령 젊은 운동가들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본보기로 체포해 처벌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구금자석방전국위원회(CNLD)를 비롯한 알제리의 여러 NGO가 내놓은 비공식 자료에 의하면, 10월 말 알제리의 사상죄로 수감된 사람들의 수는 100명 이상으로 추산됐다. 일부 통계자료는 심지어 300명으로까지 집계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이 공식 발표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정확한 통계수치를 파악하기란 어렵다.(3) 11월 12일, 알제리 법원은 아마지그(베르베르족) 깃발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된 28명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그 밖에도 84세의 자랑스러운 독립전쟁 영웅 라크다르 부레가나 전 사회주의세력전선(FFS)의 대표이자 히라크 운동의 선봉장으로 널리 활약 중인 카림 타부와 같은 여러 유명 인사들을 줄줄이 수감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사임시키다
‘히라크’ 운동의 열기가 곧 식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적 측면에서 이 운동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이 운동이 발생하게 된 기원부터 살펴봐야 한다. 2018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향후 거취 및 승계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가운데, 권력 상층부 인사들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각 계파는 서로의 부정부패 및 독직 혐의를 상호 고발하며 이전투구에 열을 올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보안요원들이 오랑 항구에 정박 중이던 선박에서 코카인 화물 7퀀탈(약 100kg에 해당-역주)을 적발한 사건이었다.(4) 문제의 선박은 본래 친정부 인사인 수입업자 카멜 치키, 일명 ‘도살꾼 카멜’ 앞으로 배달될 육류 화물을 싣고 브라질에서 출발하기로 한 배였다.
이 사건으로 카멜 치키 외에, 수많은 고위 관료와 경찰, 법관, 정치계 고위 인사, 심지어 이맘 등 수많은 인사가 체포 또는 기소됐다. 사건의 전모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지도층의 부도덕한 행태에 둔감해진 알제리인들조차도 이 대대적인 체포 사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히라크’ 구호 중 ‘구금자들을 석방하라. 그들은 코카인을 팔지 않았다’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였다.
2019년 2월 9일, 와병 중이던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5선 도전을 공식화하자 시민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는 온갖 관련 기사와 사진, 분노의 글이 넘쳐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9년 2월 16일 케라타에서 처음으로 ‘히라크’ 운동의 시발점이 될 시위가 시작됐다. 1945년 5월 8일 무슬림 인구가 프랑스 군대와 유럽 지원병들의 손에 대거 살육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한 이 알제리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이번에는 청년들이 대통령의 재선을 규탄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월 19일, 군중들은 시청 앞에 내걸린 부테플리카의 초상화를 끌어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3일 후인 22일 금요일, SNS를 통해 익명의 호소가 전파되면서, 알제리의 가장 외딴 마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이 시위로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사임하고 당시 4월 18일로 예정돼 있던 선거가 연기됐다.
청년행동모임(RAJ)의 부대표 잘랄 모크라니는 첫 시위행렬이 밥 엘 우에드를 출발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당시 그는 다음날 도심 RAJ 지부에서 열릴 시위운동을 동료들과 함께 한창 준비 중이었다. “우리는 그 순간 모든 걸 내려놓고 시민들에게 합류했다. 갈수록 시위대 수는 불어났다.” 모크라니 부대표는 이 말을 한 지 며칠 후인 지난해 10월 4일, RAJ의 다른 운동가들과 함께 체포됐다. 그날 체포된 운동가 중 5명은 “공공 소란을 주모하고, 국가 안보를 위협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대해 RAJ 측은 “숨통이 끊겨가는 정권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며 벌인, 처단받아 마땅한, 추잡하고도 독재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 운동가들의 체포 소식은 알제리 안팎에서 많은 이들의 연대의식을 자극했다.
젊은 운동, 그러나 청년들만의 운동은 아니다
2011년 알제리는 아랍 민중의 저항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알제리에서 어떻게 이번에는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운동이 촉발된 것일까? 무엇보다도 청년들의 분노가 결정타를 날렸다. 프랑스어 독립 일간지 <엘 와탄>의 기자이자 작가인 무스타파 벤포딜은 2월 22일 시위가 발생하기 수일 전 알제 변두리의 서민가에서 한참 탐방 취재를 벌였다. “당시 모든 청년의 입에서는 한결같이 오직 한 마디, ‘수치’라는 단어만이 흘러나왔다. 청년들은 부테플리카의 모습을 더 이상 참고 봐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부테플리카 전 대통령은 ‘이사바(içaba, 패거리)’ 같은 자들의 꼭두각시, 숨만 붙어 있는 시체였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알제 저항운동의 주역으로 널리 활약 중인 30세의 프랑스 문학 박사 인티사르 벤자벨라는 분명 ‘히라크’는 “단순히 청년들만의 운동은 아니지만, 열정적인 많은 수의 청년들이 행렬 선두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2월 22일 대규모 시민집회가 일어나기 전에는 19일 학생시위가 먼저 조직됐다. 이후 화요일 오후 시위가 매번 연쇄적으로 다음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가령 화요일 당일 아침 가이드 살라 장군의 연설에 대한 반응으로 시위가 조직됐고,(5)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를 강경 진압한 이후 또다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요일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에 많은 알제리인은 정권에 대해 똑같은 반감을 품고 있음에도 선뜻 시위에 나서지 않았다. 부테플리카의 4선 재선을 막지 못했던 지난 2014년 때와 마찬가지로, 저항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벤자벨라는 “2014년 국민들은 해방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또다시 실망하는 것이 두려워 2019년 2월 22일 시위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SNS를 통해 추이를 지켜보던 그녀는, 시위 영상을 확인한 직후, 다음 금요일 시위에는 반드시 참석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66세의 변호사이자 오랑시에 거주 중인 인권운동가 메사우드 바바지처럼, 처음에 많은 알제리인은 출처가 불분명한 익명의 시위 독려 메시지에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다시 정치 무대에 이슬람주의 세력이 복귀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대규모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이슬람주의 세력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위 당일 바바지는 초기 시위 대원들이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니라, 함께 활동하던 오랑시 인권단체 소속의 청년들임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히라크’ 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자밀라 부히레드와 친분이 두터운 한 독립 출판사의 편집인이자 기자인 아레즈키 아이트라르비도 처음에는 이번 시위운동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라고 고백했다. 예전처럼 ‘이슬람구국전선(FIS: Front Islamique du Salut)’의 집단기도회가 끝난 뒤인 금요일에 시위가 열렸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이슬람주의 세력마저 이 시위 독려 메시지를 미심쩍게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FIS의 전 당원으로 1992~1998년 철창신세를 지기도 한 52세의 알리 M.은 이번 시위가 ‘도발이나 함정’일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1988년 10월 사태 때처럼 군대가 시위대를 모아 놓고 총을 발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털어놓았다. “혼잣말로 그랬다. 또다시 새로운 비상사태를 만들어보려는 안보국의 수작이구나. 사실 내 아들이나, 이웃집 아이들은 정치에 관심 없는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만류해도 그들은 2월 22일 거침없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후 나도 3월 8일 시위에 참석했다. 이후 단 한 번도 시위에 빠진 적이 없다.”
민중을 하나로 만든 ‘금지된 깃발’
지난해 3월, 갈망은 했어도 예상하지는 못했던 시위 규모에 사람들의 경계심은 녹아내렸다. 이후 연쇄적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이번 저항운동은 현 정권이 야당, 이슬람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 노조, 산업협회, 시민단체 등 모두를 억압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모두 정권에 박살 났거나 매수됐다.”(6) 1980년 ‘베르베르족의 봄’ 때 투옥된 24명의 운동가 중 한 명이자, 과거 부이라(중부)의 하원의원(문화민주동맹(RCD) 소속)으로 활동했던 알리 브리히미가 말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베르베르족의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가인 브리히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부테플리카 정권의 부정부패나 정치적 폐쇄성이 실로 심각한 수준이었기에, 민중은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돼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처음부터 이번 시위는 혁명의 동력을 갖추고 일어났다는 점이다.”
취재진이 만난 많은 이들은, 시민들이 지난 10년의 암흑기(1992~2000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뜻하지 않게 성숙한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면, ‘히라크’ 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브라히미는 “알제리 사회는 참으로 절망적이고, 분열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현 정권은 비종교인과 종교인의 대립처럼 온갖 종류의 반목을 조장했다. 하지만 이번 ‘히라크’ 운동의 규모를 보면, 이제 대부분의 시민들이 1990년대의 이념적 분열을 극복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번 운동의 ‘질적 변화’를 똑똑히 지켜본 아이트라르비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그는 현 시스템을 거부하는 민중의 하나 된 마음, 시위대의 성숙한 시민의식, 역학관계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놀라운 관계 변화’, 이 모든 요소가 한 데 작용해, 이번 ‘히라크’ 운동이 “그동안 알제리인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최고의 능력”을 끌어내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그는 정부가 아마지그 깃발 소지를 불법화한 조처가 역으로 작용한 사실도 지적했다.
“지난 6월, 가이드 살라 장군은 아마지그(베르베르족) 깃발 소지를 금지하며 분열 작전을 펼쳤다. 정부는 이 조처가 베르베르족과 아랍민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오히려 여러 아랍어권 도시에서, 베르베르족에게 특별히 우호적이지도 않았던(그렇게 보였던) 많은 이들이 이 금지된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로 나섰다.”
이번 시위의 평화적 성격도 과거와는 철저히 차별화되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청년들이 경찰과 시비가 붙을 것 같으면, 다른 시위자들이 ‘실미야!(평화)’, ‘카와! 콰와!(모두 형제!)’를 거듭 외치며 사태를 진정시켰다. 브라히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공식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7년 알제리 전역에서 일어난 폭동사건은 1만 3,000건에 달했다. 하지만 이제는 폭력시위가 차분하고 질서정연한 운동으로 뒤바뀌었다. 폭력적인 정권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며, 절대로 폭동은 안 된다는 식의 토론이 줄기차게 이어진 결과다.” 그는 정부가 문학모임을 금지하자, 책을 한 권씩 끼고 시위에 나선 아오카스의 작은 해안 도시(동부)의 주민들 사례를 거론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히라크’의 시위행렬은 모든 정파를 초월한, ‘단합된 알제리인’을 구현하고 있다. 매주 알제에서 열리는 금요시위의 전개 방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야간에 냄비를 두드리며 구금자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냄비 콘서트’가 열린 후, 다음 날 아침 모리스오댕 광장과 중앙우체국 주변에 여러 시위행렬이 조직되는 식이다.
그리고 이른 오후, 대기도회가 끝난 뒤 여러 행렬(특히 밥 엘 우에드에서 출발한 행렬)이 도심 쪽에서 하나로 합쳐져 놀라운 장관을 연출한다. 도시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들썩이는 것이다. 저녁이면 언론, 변호사, NGO 등이 그날 체포된 사람(몇 시간 체포된 사람도 포함)과 실종자의 수를 집계한다. 대개 시위자들은 사복 차림의 경찰에게 연행되곤 하는데, 때로는 왜, 어디로 잡혀간 것인지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꾸준한 지속성, ‘히라크’ 운동의 첫 승리
‘히라크’ 운동은 부테플리카의 5선을 제지하고, 두 차례나 대선을 미루게 한 성과를 올렸다고 자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위대와 군 참모총장이 서로 팽팽하게 줄다리기 중인 11월 중순의 상황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벤포딜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벼운 독재’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나는 그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자유롭게 시위를 벌일 자유도 없다. 공영 TV의 행태는 과거보다 더 심각하다. 여전히 독재자들을 찬양하는 태도가 난무한다. 정치 무대에서도 늘 똑같은 인사로 똑같이 충성을 맹세한다. 민족해방전선(FNL: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은 늘 자신들 수장이 추진하는 모든 것을 칭송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정권의 독재적 성격이 더욱 강화됐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알제 밖에 거주하는 시민들에 대해 금요일 알제 출입을 금지한 (위헌적) 통행금지조처와 아마지그 깃발을 소지한 시위대 수십 명을 수감한 조처다. 가이드 살라 장군은 지난 연설에서 수십 명의 시위대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상죄 수감자 석방과 민주주의 자유를 옹호하는 ‘탄압 반대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 중인 아우차 바크티 변호사는 “이는 결코 법률에 근거한 조처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물론 국가행정기관과 정부 부처에 대해서는 국기 외에 다른 깃발을 내거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위대에 적용할 수 있는 조항이 아니다. 결국, 검찰은 형법 제79조를 근거로 내세웠다. 이 조항에 따르면, 국가 영토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자는 징역 1년 형을 받는다. 기소장에 적힌 죄목은 피의자들이 ‘국기 외의 깃발을 소지’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가이드 살라 장군의 말을 받아쓰기한 것이다. 한 마디로 장군의 말이 곧 법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진보인사와 운동가들은 대선 정국 이후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 바크티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현대사회의 프로젝트에 걸맞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헌법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이 운동이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고,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확신한다. 어떤 이들은 알제리가 7년 동안 투쟁한 끝에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듯이, ‘히라크’ 운동도 7년 이상 충분히 버텨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행렬 속에서 이런 구호를 들을 수 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은 ‘히라크’ 운동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 이미 첫 승리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벤포딜은 다소 냉정하게 말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철저히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다. 알제리는 현재 양극단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쪽에는 군사 정부, 맞은편에는 ‘히라크’ 시위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다. ‘히라크’ 시위대는 꾸준히 시위를 이어가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을 대변할 대표가 없다. 아니 대표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교적 문제가 없는 무정부 상태라고는 하지만, 이 운동이 힘을 얻으려면 보다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사실상 이 운동이 민중의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결국 대선 강행에 맞서 시위대가 극단화될 위험이 있다.”
‘히라크’ 운동이 시작된 이후, 이 운동에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하려는 숱한 시도들이 추진됐다. 하지만 어떤 시도도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젊은 운동가를 비롯한 개별 인사들을 겨냥한 정부의 시위탄압은,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지난 30년 동안 자유와 다원주의를 누릴 수 없었던 알제리인들은 사실상 정당 조직에 대해 여전히 불신이 매우 깊기만 하다.
글·아레즈키 메트레프 Arezki Metref
기자이자 작가. 소설 『밤의 거리(Rue de la Nuit)』(Editions Koukou·Alger)를 썼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Akram Belkaïd, Lakhdar Benchiba, ‘En Algérie, les décieurs de l'ombre 알제리, 섭정 속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4월호·한국어판 2019년 5월호.
(2) Mickaël Correia, ‘En Algérie, les stades contre le pouvoir 알제리, 축구로 권력에 맞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5월호·한국어판 2019년 6월호.
(3) Hafid Azzouzi, ‘Détenus du mouvement populaire: le CNLD compte saisir les instances internationales 민중운동의 구금자들: CNLD, 국제 제소를 계획하다’, <El Watan, Alger>, 2019년 10월 13일.
(4) Catherine Le Brech, ‘Saisie de 701 kg de cocaïn à Oran: le scandale qui ébranle l'Etat algérien 오랑에서 압류된 코카인 701kg: 알제리를 뒤흔든 스캔들’, Frane Info Afrique, 2018년 6월 25일.
(5) Akram Belkaïd, ‘Algérie: les discours du général 알제리: 장군의 연설’, <Horizons arabes>, 2019년 9월 20일, http://blog.mondediplo.net.
(6) ‘Hébétude de la gauche algérienne 마비상태의 알제리 좌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2월호·한국어판 2019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