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인증샷을…발람함이 혁명에 미친 영향

[Spécial] 재스민 혁명, 연출과 캐스팅

2011-03-11     사미르 아이타

“광장에 나오지 않으면 사진에도 안 나와요.” 타흐리르 광장 시위 주도자들이 확성기를 통해 외치던 구호다. ‘분노의 금요일’,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사람들이 구호를 듣고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날은 ‘무바라크 퇴진의 날’, ‘대홍수의 날’로도 불렸다. 이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의 구호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말 압델 나세르 시절의 노래를 틀어대기도 했다. 시위대는 “평화와 시민”을 외치며 이슬람주의와 군사주의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가 그동안 상상해온 이슬람주의와 종교적 갈등이 지배하던 이집트가 더 이상 아니다. 이 젊은이들은 도대체 언제 이런 정치적 의식을 갖추고 상징적 투쟁 방식을 배웠을까?(1) 이 새로운 경향은 어떻게 수백만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시위 주동자 중 한 명인 와엘 고님(2)(구글사 임원)은 “만약 자유로운 사회를 원한다면 그 사회에 인터넷을 보급하라”고 말한다. 아랍 혁명은 소셜 네트워크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단체활동이 통제 또는 금지되는 국가에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의 도구는 단지 국제적 교류 수단을 넘어 시민이 사회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장으로 기능했다. 사회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이슬람 사원이나 교회뿐이던 시대는 끝났다.

단지 2.0세대 출현이 혁명의 충분조건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몇 해 동안 정권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그 수단 중 하나가 인터넷이었다. 지난 1월 25일, 드디어 ‘10월 전쟁’이 발발했다.”(3) 시위 주동자 아마드 에이드의 말이다. 실제로 몇 해 전부터 이집트의 여러 블로그는 ‘국가를 초월해’ 권력을 휘두르는 체제의 폐해와 최소한의 사회적 의무를 방기한 채 공공서비스를 파괴하는 경제적 신자유주의, 시민의 자유 탄압 등을 비판해왔다.

아랍의 위성방송 역시 자유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을 후원하는 아랍 정권들과의 불화가 원인을 제공했다. 카타르의 <알자지라>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에서 후원하는 <알아라비아>조차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서 만연하는 부정부패에 대해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한 이집트 지국장은 곧바로 입막음을 당했다! 또한 조금씩 정치적 의식 형성에 기여해온 문학·예술 작품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 <야쿠비얀 빌딩>(4)으로 유명한 알라 엘아스와니 역시 타흐리르 광장 시위대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다른 아랍국 역시 이런 ‘신경전’을 치렀다.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기, 시가지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축구시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농담이 확산됐다. “이집트가 튀니지를 준결승에서 이겼다. 스코어는 18 대 28(대통령 퇴진까지 걸린 일수). 다음 준결승에는 어느 나라가 진출할까?”

이 시점에서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리비아와 알제리인이 관광객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튀니지에서 혁명이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슬람주의를 수출해온 사우디아라비아는 현재 아랍을 휩쓰는 혁명이 자국에 수입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집트, 튀니지와 함께 아랍식 계몽주의인 ‘알나흐다’(al-Nahda)(5)의 전통을 이어온 시리아는 어떨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 사진에 등장하고 싶은 이들은 과연 아랍인뿐일까?

글•사미르 아이타 Samir Ait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랍어판 편집장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한 이집트 젊은이와의 대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랍어판, 2010년 1월호 참조.
(2) 2011년 2월 11일 <CNN> 인터뷰. 구글 이집트 마케팅 담당자 와엘 고님은 지난 1월 25일 정보부에 연행·투옥되었다가 무바라크 퇴진 발표 전날에 석방되었다.
(3) 2011년 2월 13일, 이집트 공식 채널 <오늘의 이집트>에 방영된 내용. 여기서 ‘신경전’이란 1967~73년 아랍-이스라엘 분쟁 기간과 관련 있다. ‘6일 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이 패한 후,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매일 소규모 전투를 벌인 데서 비롯된 말이다. 이 분쟁은 1973년 ‘10월 전쟁’으로 귀결된다.
(4) Alaa El Aswany, <Immeuble Yacoubian>, Actes Sud, 2006.
(5) 19세기 아랍문화부흥운동.


[이집트 연표]
1882년 8월 2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영국 군대 상륙.
1914년 12월 19일 영국, 술탄 후세인 카말 파샤를 왕으로 앉히고 영국 보호령제를 강제.
1918년 11월 13일 3명의 이집트 의원이 파리 평화회의(1919년 1월 18일 시작)에서 이집트 독립 요구. 와프드당을 세운 이들이 체포되자 대대적인 민중항쟁이 일어남.
1919년 4월 15일 영국, 파리 평화회의에서 이집트를 영국령으로 공고.
1922년 2월 28일 보호령이 종식되고 이집트의 독립 선포. 그러나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통제권 주장.
1936년 8월 26일 영국과 이집트 간 조약 체결(20년 기간)로 이집트 독립 인정.
1942년 2월 4일 영국, 파루크왕에게 강요해 독일 나치와의 투쟁에 우호적인 나하스 파샤와 와프드당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게 함.
1945년 3월 22일 카이로에서 아랍연맹 창설.
1946년 2월 영국 주둔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 발발. 21일 노동자 및 학생 국민위원회가 거리시위를 벌여 수십 명의 사망자 발생.
1948~49년 이슬라엘과 아랍 간 제1차 중동전쟁. 이집트, 이스라엘에 패배.
1952년 7월 22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지휘하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킴.
1953년 6월 18일 공화국 선포.
1956년 6월 26일 나세르, 수에즈 운하 국유화. 이에 대응해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이 이집트 공격.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으로 이 국가들 철수.
1958년 2월 1일 시리아와 함께 통일아랍공화국(RAU) 건설.
1961년 9월 29일 다마스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통일아랍공화국 해체.
1967년 6월 6일 전쟁. 이스라엘이 요르단, 가자, 동예루살렘, 골란 및 시나이 차지.
1970년 9월 28일 나세르 사망. 10월 15일 아누아르 엘사다트가 권력 승계.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및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 전쟁 시작.
1977년 11월 19일 사다트, 이스라엘 예루살렘 방문.
1978년 9월 17일 이집트와 이스라엘, 평화를 준비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 평화조약. 아랍연맹은 이집트 제명.
1981년 9월 집권세력, 반대자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공산주의자, 이슬람주의자 등). 10월 6일 사다트 암살. 호스니 무바라크가 뒤를 이음.
1982년 4월 25일 이스라엘 군대, 시나이 철수.
1989년 이집트는 아랍연맹 복귀.
1990~91년 걸프전쟁. 이집트, 미국의 연합군에 참여.
2005년 9월 9일 이집트 최초 다당제 대통령 선거. 무바라크 선출.
2007년 12월 공무원의 대규모 파업.
2008년 4월 물가 상승 및 기아로 인한 대규모 폭동, 노동자 파업. 4월 6일 마할라알쿠브라에서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
2011년 1~2월 튀니지 민중항쟁과 벤 알리 정권의 몰락에 이어 이집트 정권 대규모 봉기에 직면.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 대통령직 사임하고 카이로를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