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사회 참여는 어디까지?

2020-01-31     프랑수아 알베라 l 로잔대학 명예교수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러시아에서 파리로 이어진 나디아 레제의 행보를 쫓아가다 보면 20세기 전반기에 사회참여 예술가들이 어떠한 미학적 질문들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추상과 구상 중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예술을 통해 일상을 표현할 것인가? 예술 활동은 어떤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난해 9월 13일에서 15일까지 프랑스 극좌신문 <뤼마니테>가 주관하는 ‘인류 축제’가 열리기 며칠 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 아르퀴리알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소련 공산권 소년단 ‘피오네르(Pionnière)’ 차림의 주최 측이 혁명가를 부르며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호기심에 찬 손님들은 나디아 레제(Nadia Léger, 1904~1982) 전시와 그녀의 작품을 풍성하게 실은 전기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1) 

이 전기는 프랑스의 유명한 그림책, <꼬마 니콜라> 시리즈의 편집자인 아이마르 듀 샤트네가 집필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파리에서 50년대 전후의 소련의 시대상을 그대로 재연한 ‘다우(DAU) 프로젝트’의 연출에 소년과 혁명가들을 그린 나디아 레제의 작품이 사용됐다.(2) 

 

세 번의 결혼, 이름이 너무 많은 ‘무명작가’

과연 ‘공산주의자 나디아’는 이런 행사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내건다고 기뻐했을까?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디아는 1952년 프랑스 화가 페르낭 레제와 재혼한 이후부터, 나디아 레제라는 이름을 썼지만, 다양한 예명으로 활동했다. 재혼 전에는 나디아, 혹은 나디에냐 코도시에비치, 완다 다지에냐, 초다시에비크조브나, 나디아 그로봅스카, 완다 초다시에비치 그라봅스카, 나디아 그라봅스키, 코다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고 2차 대전 중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 활동명, 죠르게트 페노라는 이름을 썼으며, 이후 조지 보키에와 세 번째 결혼 이후 보키에의 이름으로도 작품 활동을 했다. 이렇게 예명이 많다 보니 나디아 레제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물론 주목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나디아 레제의 전기는, 이 무명작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했다.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나디아 코도시에비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과 기근을 피해 툴라(중앙러시아) 근처 벨료프로 이주해 새로운 소련 정권이 세운 예술기관에서 미술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5세가 되는 해, 국립 고등 예술학교들이 문을 열기 시작한 스몰렌스크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녀는 블라디슬라브 스체민스키와 카타르치나 코프로 부부를 만나 미술을 배웠으며, 이후 이 부부와 모스크바 정부 미술학교에서 함께 수학했고, 이후 이들의 초청으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도 교류한다. 이런 대가들과의 만남은, 나디아 코도시에비치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9년 소련-폴란드 전쟁이 일어나자 말레비치는 1918년부터 소련 비텝스크에서 친정부 예술위원으로 활동하던 마르크 샤갈의 부름을 받고 그곳으로 떠난다. 한편, 러시아 제국의 민스크 출생 폴란드인이었던 스체민스키는 스몰렌스키를 떠나,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라투아니아의 빌니우스로 간다. 나디아 코도시에비치는 바르샤바의 예술학교에 다녔는데, 이 당시 미술학도 사이에서는 형체를 파괴하기 위해 형태와 색을 적게 사용하면서 구상적 요소를 거부하는 ‘쉬프레마티즘(Suprématisme)’이 유행했다.

나디아는 바르샤바에서 화가 스타니슬라스 그라봅스키를 만나 1924년 결혼한다. 이 부부는 192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현대장식·산업미술 박람회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1926년에는 라스파일 가(街)에서 열린 현대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이후 페르낭 레제와 아메데 오장팡이 세계 각지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수업하는 현대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나디아 코도시에비치는 스몰렌스크에서 미술에 매료됐다. 그러나 1919~1920년, 소련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순수미술은 버리고, 예술을 사회적 공간, 일상용품, 언론, 포스터, 건축 등 다방면으로 적용해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나디아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와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이 프랑스에서 출간한 예술잡지 <에스프리 누보>를 통해 회화, 조각, 영화, 도시계획, 스포츠, 기술,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예술과 현대적 삶을 조화시킬 길을 제시하자, 바로 프랑스행을 결심한다. 

 

페르낭 레제와의 만남

페르낭 레제는 조형 분야에서 이런 움직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작품은 프로펠러, 톱니바퀴, 피스톤과 같은 기계부속품에서 영감을 받아 기계적인 아름다움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나디아는 오장팡과 교류하면서 큐비즘보다 사물을 한층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퓨리즘을 수용했고, 페르낭 레제의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체민스키와 혁명 예술가 그룹을 공동 창립한 폴란드 시인 장 브르제콥스키와 함께 예술잡지, <아르 콩탕프랭(L’Art Contemporain)>을 창간했다(1929~1930년 3호까지 발간).(3) 

그리고 나디아처럼 소련 국적을 유지한 채 프랑스에서 체류하던 일리야 에렌부르크와 함께,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예술가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덕분에 추상미술 그룹 아브스트락시옹 크레아시옹(Abstraction-Création), 이 그룹의 전신 세르클 에 카레(Cercle et Carré), 그리고 구체미술 예술가 그룹까지 세 그룹이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이들은 스체민스키가 기획한 폴란드 우치의 현대미술 컬렉션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나디아 코도시에비치는 레제의 작업실에서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이전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15년 무렵 말레비치가 쉬프레마티즘을 전파하던 시기의 나디아의 작품을 보면 그녀가 이 사조에 심취해 있었다고 짐작된다. 게다가 그녀는 1960~1970년대에 다시 쉬프레마티즘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고, 작품 완성일을 이전 날짜로 변경해 기재하거나, 분실된 작품은 다시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의 발자취를 정확히 따라가기는 어렵다. 

레제 작업실에서 초기 나디아 코도시에비치의 색채는 간명하지 않았고, 얼룩덜룩했다. 하지만 곧 평면적 구성과 비(非)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함으로써, 나디아 자신만의 독자적 회화방식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이후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뿐만 아니라 이후 대부분 작품에서 이 시기에 형성된 기법을 사용했다.

스몰렌스크에서 순수미술의 쇠퇴에 대해 참담한 심경을 표현했던 나디아는, 페르낭 레제의 영향을 받으면서 순수미술만을 고집하지 않게 됐다. 레제는 일생 회화를 했지만,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벽화, 건축, 삽화, 연극·영화 장식, 의상 등 ‘외도’를 멈추지 않았다. 나디아는 1930~1950년에 확산됐던, 사회에 유용한 예술을 추구하는 ‘사회적 예술’과 리얼리즘에 경도되면서 페르낭 레제와 같은 방식으로 예술의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레제의 작업실에서 함께 작업하며, 이런 예술관의 변화를 담은 작품들을 대거 탄생시켰다. 

거대한 프레스코화, 도자기나 모자이크로 표현한 벽화, 타피스트리, 사진벽화는 다소 인정하지 않는 목소리도 있지만, 20세기 예술사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4),(5) 예를 들어 벽화 운동을 펼쳤던 디에고 리베라, 데이비드 시케이로스와 같은 멕시코 화가들이 본보기를 보여줬듯, 화가들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정치, 사회적인 역할에 참여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도하에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주장하는 뉴딜 정책이 펼쳐지던 시기, 정부는 친정부적인 작품을 제작할 것을 예술가들에게 주문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좌익동맹 인민전선의 짧은 집권기 1936~1937년에도 예술과 정치의 결탁이 있었다. 

1937년 파리 국제 박람회 때, 레제, 샤를로트 페리앙, 루시앙 마제노드, 르코르뷔지에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파빌리온을 장식하기 위해 거대한 사진벽화를 제작했다. 그리고 나디아 코도시에비치와 보키에는 제자들과 함께(이 중에는 이후 사회참여적 예술 운동인 ‘코브라(Cobra) 운동’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아스거 욘이 있었다) 1937년 발견의 전당 개관식을 위한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이 중에는 레제의 <무기의 운송(Le transport des forces)>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당시 관중석을 1만 5,000석이나 보유한 벨로드롬 디베르에서, 인민전선 노조와 문화기관의 지원으로 막을 올렸던 장 리샤르 블로크의 희곡 <도시의 탄생>을 위한 무대 장식을 담당하기도 했다. 

 

노동자, 생선 장수, 어머니를 그리다

2차 대전 당시 나디아 레제는 프랑스 공산당계 이민자 레지스탕스 조직인 FTP-MOI에 가담했고, 종전 이후, 1945년 프랑스 공산당 제10회 회의와 같은 각종 정치 행사를 위한 대형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는 사진을 본떠서 그렸으며(1970년대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식), 인물이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바탕색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색감을 사용했다. 1933년 프랑스 노동당에 가입한 나디아 레제는 1947년에 당이 권장하는 리얼리즘으로 회귀해 1953년까지 이 사조를 따랐다. 

그러나 이때도 그녀는 추상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기법을 선보였다. 당시 공산당이 얼마나 리얼리즘을 통해 예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는지 1950년 제12회 노동당 회의에서 당 서기장 토레즈의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당 회의에서 “작가, 철학자, 화가, 예술가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이들과 사상, 정치적으로 같은 편에서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는 어지러웠다. 핵 위협과 전제주의의 복권 조짐이 도사리기 시작하면서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분위기였고, 식민 전쟁에 반대하는 자에 대한 박해, 심지어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사회적 탄압(광부 등 노동자 파업)이 이어지던 때였다. 

예술가들의 사회참여는 예민한 문제였고, 이에 대한 논쟁도 뜨거웠다. 하지만 정치성이 강한 역사화를 그린 앙드레 푸주롱, 레지스탕스 출신인 제라르 싱거, 보리스 타스리츠키, 미레일 미알레, 조르지 보키에와 같은 젊은 작가들은 프랑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고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이들 중 몇몇은 이후 강제추방 당하기도 했다. 페르낭 레제는 당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지지 활동을 했던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사회적·정치적 투쟁에 적극 가담했다.

그러나 1938년부터 그는 “예술가들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며 예술작품을 투쟁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예술은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 나디아 레제는 노동자, 생선 장수, 어머니를 그렸는데, 그들의 어려운 처지보다는 희망을 담고자 했다. 그리고 레제 작업실에서 익명으로 장식작업이나 협동작품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색채의 대비를 강조했고, 이는 1960년대 간결하고 명확한 색과 면을 사용하는 팝 아트와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띠었던 서술적 구상에 영향을 미쳤다. 서술적 구상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앙리 쿠에코, 에로, 에두아르도 아로요가 있다. 

그러나 나디아 레제를 기리기 위해 집필한 전기의 제목이 말해주듯, 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가는 ‘그늘’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는데, 그 그늘은 두 번째 남편 페르낭 레제는 아니다. 나디아는 페르낭 레제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52년에 페르낭 레제와 결혼했지만, 그들 부부는 독자적으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의 그늘에 덮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디아가 활동했던 시대, 예술시장에서는 사회참여적 작품이 인정받지 못했고, 예술가들이 자처했던 사회적 역할이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녀의 작품을 재평가한다면서, ‘키치하다’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프랑수아 알베라 François Albera
로잔대학 명예교수, 「Revue d’histoire du cinéma 영화의 역사 학술지」 제1저자, 1895. 저서로 『Le Cinéma au défi des arts 예술과 영화의 관계』(Yellow Now, Crisnée, 벨기에, 2019)가 있다.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Aymar du Chatenet(주 저자), 『Nadia Léger, L’histoire extraordinaire d’une femmes de l’ombre 나디아 레제, 그늘에 가려졌던 여자의 특별한 이야기』, IMAV Editions, Paris, 2019.
(2) 2019년 초 파리 3구역에서 1938~1968년 당시 소련 사회상을 재현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물 설치 프로젝트(영화, 퍼포먼스 등).
(3) 그녀의 현대미술 선언, ‘그러나 그녀는 돌아선다’(1921), 결국 실제로 프랑스어로 출판됐다.
(4) Romy Golan, 『Muralnomand. Le paradoxe de l’image murale en Europe (1929~1957) 유럽 벽화 이미지의 패러독스』, Macula, Paris, 2019.
(5) 최근 일어났던 아노토프의 미국 고교 벽화사건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Serge Halimi, ‘Les talibans de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의 탈레반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9년 8월호.
(6) Fernand Léger, ‘Couleur dans le monde 세상의 색’, <Europe>, Paris, 1938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