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에도 바람이 불어올까?

[Spécial] 재스민 혁명, 연출과 캐스팅

2011-03-11     이냐스 달

“모로코인은 예로부터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굳이 따로 이집트나 튀니지를 귀감으로 삼을 필요 없다.”(1)  칼리드 나시리 모로코 정부 대변인 겸 통신부 장관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최근 중동을 휩쓴 민주화 바람은 모로코 국민을 뒤흔들어놓았다. 여기저기서 투기 정권이 아닌 진정한 입헌군주제의 나라를 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단순히 소셜 네트워크에서만 그런 요구가 나온 것은 아니다. 좌파 군소정당 소속 당원이나 2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합법적 야권 조직 ‘정의와 자선’에서 활동하는 이슬람주의자까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난 뒤 몇 주 동안 사태를 관망만 했다. 하지만 이내 모로코 정권의 ‘벤 알리화’를 비난하며, 지난 2월 20일 존엄성 쟁취를 위한 평화적 거리시위에 참여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시위 나자 정부 발빠른 무마책

악천후에 도로가 봉쇄되고, 공영매체의 정보 조작이 이어졌다. 대표 정당도 모두 시위 불참을 선언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라바트와 아가디르, 알호세이마, 마라케시(이 지역들에서는 시위가 격화되기도 했다) 등지에는 각각 최소 1만 명에 이르는 시민이 모여 거리시위를 벌였다. 카사블랑카에도 5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현 사태를 우려한 모로코 당국은 필수 생활용품의 가격이 치솟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올해 재정법을 통해 지원하기로 약속한 170억 디르함(약 15억 유로)에 추가로 더 자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또 거리 상인이나 고학력 실업자의 도발을 방지하려 1800여 개에 달하는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모로코 정부는 모든 노사쟁의 사태를 무마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쿠리브바 소재 SMESI의 해직 노동자들을 복귀시키는가 하면, 일부 교사들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였다. 정부는 몇 년째 도통 해결될 것 같지 않던 문제의 해결책을 기적적으로 찾아내거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노라고 약속했다.

모로코 정권은 튀니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 독단주의적 국정 운영과 부정부패 심화, 실업률 상승(특히 고학력자 실업)임을 잘 알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로코도 겪고 있는 문제다. 모로코 국민은 오래전부터 부정부패 확산과 권력 남용, 특혜 관행, 양극화 심화 등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최근 몇 년간 시디이프니, 세프루, 나도르, 알호세이마, 팅헤르, 벤스밈, 제라다 등지에서는 국지적인 반정부 시위와 소규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국민이 절망감을 표현하며 의료·교육·노동에 대한 권리, 다시 말해 존엄하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가장 상징적인 예가 2008년 6월 발생한 시디이프니 시위 사태다. 아이트 바아람 부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자그마한 항구도시 시디이프니에서 주민들이 소외감을 호소하며 지방정부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정부는 처음엔 수천 명의 인력과 기동진압대를 현장에 투입해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이듬해 지역선거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시의회 의석을 장악하는 것을 잠자코 지켜봤다.

몇 년 전부터는 전국적으로 물가 상승과 방만한 공공서비스에 반대하는 운동조직이 생겨났다. 대개 팀별로 인원은 60명에서 80명까지 다양하고, 여성의 활동도 활발하다. 투쟁 활동을 주관하는 것은 모로코인권연합(AMDH)과 극좌파 정당들이다. 카사블랑카에서는 한 조직이 물가 상승에 반대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최저임금이 월 2천 디르함(약 200유로)을 조금 웃도는 모로코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큰 걱정거리다.

이 운동조직은 시민과 국가기관의 매개자 역할을 하며 격렬한 소요사태를 방지하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국가기관은 이 활동조직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특히 AMDH에는 상당히 적대적이다. 아랍인권단체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정권에 격렬히 반대하는 얼마 안 남은 조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은 이 단체의 회원을 정기적으로 기소하거나 괴롭히고, 폭행까지 한다.

2008년 시디이프니 사태의 기억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로코는 튀니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의 미움을 받은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와 달리 하산 2세의 후계자는 거의 모든 계층에게 사랑받고 있다. 무함마드 6세는 단순히 모로코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그는 ‘신도의 지도자’인 아미르알무미닌이자 예언자의 자손이다)일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에 대해 많은 국민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는 남부뿐 아니라 북부 지역 방문도 서슴지 않으며, 각종 개발사업 기공식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대개는 장관이나 지역의원 정도가 참여해도 무방한 소규모 공사다. 이를 두고 한 고위 공무원은 “말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국왕 나름의 소통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더욱이 관리·감독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선왕과 달리 무함마드 6세는 공사 진척 상황을 주의 깊게 살핀다. 국민은 현재 모로코가 안정을 보이는 것은 모두 국왕의 덕분이라며 감사해한다.

그렇다고 무함마드 6세가 일부 원외 야권 세력이나 여러 사회단체들의 거센 비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모로코 왕실은 지난해 고난의 가을을 보냈다. 지난해 10월 29일∼11월 10일 정부가 라윤에 설치된 사라위족의 시위캠프를 강제 철거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보름 뒤에는 위키리크스가 모로코 왕실의 부동산 투기 실태를 폭로하면서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한 전직 대사는 국왕의 일부 측근들의 행태를 “수치스러운 탐욕”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모로코에서는 투자자가 대규모 부동산 사업에 나서려면 먼저 국왕의 개인 비서이자 사업가인 무니르 마지디나, 국왕의 친구이자 모로코 정권의 실력자인 후아드 알리 엘 힘마, 심지어 국왕이라는 험난한 산을 넘어야 한다. 모로코 왕실은 주요 국가기관이나 제도를 압력을 행사하거나 뇌물을 수수하는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 미국 외교부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그동안 훌륭한 국정 운영을 홍보하기 위해 기울여온 모로코 정부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어버린다.

국왕, 개발 사업가이자 최고 땅부자

모로코에서 투명성 문제가 가장 심각한 분야는 토지, 그 가운데서도 왕가 소유의 토지다. 모로코 왕가는 싼값에 매입한 택지를 시장가에 되팔며 막대한 시세차익을 올리고 있다. 왕실이 몰수한 카사블랑카 남부 지역 3천ha 규모의 왕실 소유지 가운데 일부가 절실히 필요한 한 사업가는 “도무지 손쓸 방도가 없다”며 한탄했다. 관개시설이 잘된 땅을 최소 1만2천ha 소유한 모로코 최대 지주인 국왕은 아무런 심의 과정 없이 30년 전부터 시행해온 농지의 토지세 면세 혜택을 2014년까지 임의로 연장했다. 이 혜택은 하산 2세가 심한 가뭄을 이유로 한시적으로 취한 조처였다.

정치학자 레미 르보는 왕실에 대해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2000년대 초 이미 젊은 국왕의 투기욕을 우려했다. 그는 “민주주의 이행 체제에서는 국왕이 사업가처럼 행동해서도, 사업가와 경쟁해서도 안 된다. 그런 시기라면 국왕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2)고 지적했다. 미국의 <포브스>에 따르면, 무함마드 6세의 재산은 2000∼2009년 5배나 늘어 무려 25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국왕이나 측근의 행태는 기업가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특히 부동산·농식품업·금융·유통 분야에서 활동하는 경영인들이 그렇다. 익명을 조건으로 취재에 응한 한 경영인은 “경제주체로부터 사법 기능을 신뢰받지 못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없다. 기업인이나 해외 투자자는 예측 가능하고 공평무사한 사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로코에서 사법은 늘 예측불허다”라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미 외교부는 재물욕에 눈먼 모로코 남부 지구(사하라에 있고, 군인 12만∼15만 명이 배속돼 있다) 사령관 아지즈 벤나니 중장도 비난했다. 이미 마흐주브 토브지 사령관에게 한 차례 지적을 받은 벤나니는 다른 고위급 장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불법으로 돈을 갈취해왔다.(3) 현재 모로코는 대령이나 하급 군인을 대상으로 부패 척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어떻게든 계속 재미를 보기 위해 퇴역 시기까지 늦추는 장군급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4)

올해로 48살이 된 무함마드 6세는 재임 초기만큼 신비에 싸인 인물은 아니다. 현재 그는 국왕 역할에 재미를 붙이고, 선왕들처럼 모로코 정권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의회나 정당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바라던 사람들은 헛물만 마신 신세가 됐다. 국왕은 15년 전에 개정된 마지막 헌법을 토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반면 친구인 푸아드 알리 엘 힘마의 힘을 빌려 그동안 거추장스럽게 여기던 정치계에 일격을 가했다. 2008년 8월 엘 힘마가 이슬람 세력을 무마하겠다며 창당한 ‘신의현대당’(Authenticity and Modernity Party)이 2009년 6월 12일 지방의회 선거에서 전체 의석의 21.7%를 차지하며 1위에 오르는 놀라운 쾌거를 이뤘다. 신의현대당은 아바스 엘 파시 총리가 소속된 독립당(Istiqlal Party·전체 의석의 19.1% 차지)은 물론, 사회주의 성향의 사회국민연합당(USFP·전체 의석의 10.8% 차지)과 이슬람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PJD·전체 의석의 5.4% 차지)도 모두 제쳤다.

모로코에서 정치계는 단순히 국정에 대한 발언권만 약한 것이 아니다. 국민 사이에서도 널리 무시당하거나 멸시당하는 처지다. 몇몇 극좌파 의원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국민의 멸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정의개발당 소속의 이슬람주의자들뿐이다.(5) 그나마 지도부 내홍에 유권자가 불안해하고 있으며, 당의 위상도 실추됐다. 몇몇 의원의 기회주의 덕분에 신의현대당은 굳이 극좌파 출신의 옛 정치범과 연합해 정의개발당 의원을 빼내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2009년 시의회 선거를 앞두고 신의현대당이 정권 지지 의사를 철회하고 야당으로 선회하겠다고 선언한 점이다. <텔켈>(Tel Quel)지의 한 간부가 말한 대로 이 “웃지 못할 촌극”을 보고 있노라면 왜 모로코 국민의 3분의 2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지 이해할 것 같다.(6)

국민에게 멸시받는 정치계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모로코 왕실에 대해 갈수록 깊은 우려를 하고 있다. AMDH는 정기적으로 국제사면위원회나 휴먼라이츠워치(HRW)와 연계해 모로코의 인권 후퇴 현실을 규탄하고 있다. 한편 리프인권연합 회장이자 모로코 북부 마약밀매퇴치운동의 기수인 샤키브 엘 키야리가 2009년 초 모로코 정부기관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키야리가 정부기관이 마약밀매조직과 공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방만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정부기관의 화를 돋운 것이 화근이었다.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모로코 정부는 지난 1월 키야리와 옛 정치범으로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 세르파티를 변호했던 변호인 아브데라힘 베라다에게 모로코투명성협회가 ‘청렴상’을 수여하려는 것도 막아버렸다.

모로코의 웃지 못할 사법 현실을 보여주는 예는 또 있다. 2008년 모로코 공군의 2인자였던 카두르 테르하자즈 대령이 12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국제사면기구와 HRW, AMDH 등이 구명운동을 전개하고 유럽 의원 157명이 서명한 탄원서가 제출됐지만, 결국 테르하자즈는 ‘배신자’에 불과하다는 모로코 정부의 입장을 꺾지 못했다.  이 사건의 배후에도 베나니 장군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다. 베나니 장군은 테르하자즈가 폴리사리오 전선에 포로로 붙잡힌 전직 모로코 비행사를 비호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분명하다.(7)

1999년 킥복싱 라이트 콘택트 부문 세계 챔피언을 거머쥔 자카리야 뭄니 사건도 모로코의 사법 현실을 낱낱이 드러낸 사례다. 그는 유럽 불법이민을 주선하고 돈을 갈취했다는 누명을 쓰고 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모로코에서는 국왕령에 따라 모든 세계 챔피언에게 연금을 주게 돼 있고, 킥복싱 챔피언 뭄니도 국왕령을 근거로 정부에 자기 몫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지나치게 정부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춘다. 결국 뭄니는 테마라 고문센터(이 고문센터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8)에서 나흘 동안 잠도 못 잔 채 뭇매질을 당하고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뭄니의 변호인이던 아브데라힘 자마이는 “세상에, 모로코 대표로 뛰기 위해 프랑스 국적을 포기한 그였는데…”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사람들

모로코 사법기관은 독립언론사도 손봐주고 있다. 갈수록 언론 비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모로코 정권이 독립언론을 들볶고 있다. 막대한 벌금에 징역형을 선고받는 기자가 늘어나면서 많은 언론사가 문을 닫고 있다. <주르날 에브도마데르> <아크바르 엘 윰> <니샨> <알자리다 알울라> 등 부지기수다. 정부는 대신 이 언론사들에서 활동하던 유명 칼럼니스트를 영입해, 치욕을 삼키며 현 정권을 위해 글을 쓰도록 종용하고 있다.

해외 언론도 정부의 감시 대상이긴 마찬가지다. 통신부 장관은 벌써 1년이 넘도록 <AFP>가 채용한 모로코인 기자의 취재권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로이터>도 비슷한 문제로 한 기자가 고통을 겪고 있다. 정부는 두 기자(그중 한 명은 <주르날 에브도마데르> 편집장 출신이다)의 독립정신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며 문제 삼고 있다. 스페인 기자들도 모로코 정부로부터 취재권을 갱신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알자지라>도 지난해 10월 모로코 내 모든 취재 활동이 금지됐다. 이 카타르 방송사가 모로코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정부의 판단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포교 활동’ 혐의로 100명 이상의 외국인 개신교도가 모로코에서 추방됐다. 문제가 될 만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추방된 외국인 가운데 20여 명은 중부 아틀라스산맥에 위치한 아인레어 지역에서 고아 33명을 돌봐온 경우여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이들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 10년 이상 모로코 법을 준수하며 이슬람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아이들을 키워왔지만 양부모에 대한 추방 결정이 내려지면서,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양부모와 생이별하게 됐다. 이번 사건은 정부가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한 조처였다는 해석이다. 프랑스개신교협회와 미국 대사, HRW 등이 추방 결정에 격렬히 항의했다.

높아지는 민주주의 요구 목소리

1952년 12월 튀니스 인근에서 튀니지인 조합원 페르하트 하셰트가 프랑스 폭력배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북부 아프리카 전역은 물론 모로코 민심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모로코 국민은 여전히 같은 마그레브 지역 내 주변국과 이집트 민심의 향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지난 1월과 2월 모로코에서는 무함마드 6세를 상대로 “평화적이지만 불가역적인 민주주의로의 이행”(9)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가운데는 작가 압델라티브 라아비도 포함돼 있다.

개발 자문관이자 경제학자인 후아드 압델뭄니가 지적하듯, 튀니지에서 일어난 일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탄압하고, 부정부패의 힘을 빌리고,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는다 해도 절대 국민의 의지만큼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 수많은 모로코 국민이 모로코 국왕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신정이 가능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국왕이 깨닫기 바라는 것이다. 모로코인은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모로코에 대해 좀더 엄격한 태도를 보이기 기대한다. 물론 모로코 국왕은 아직까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정치계나 노동조합과 같이 중간 역할을 할 만한 조직이 국민에게 불신을 받으며 안전판 구실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함마드 6세는 더 적극적으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것도 매개 조직의 공백이 지닌 모든 문제점을 떠안고 말이다.

글•이냐스 달 Ignace Dalle
<세 명의 왕: 전통과 독단주의를 오가는 하산 2세 치하의 현 모로코 왕국>(파이야르 출판사·파리·2006년 초판·2011년 재출간)을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AFP>와의 인터뷰, 2011년 2월 10일.
(2) ‘하산 2세 서거 1주년을 맞은 모로코: 3인 대담(무니아 베나니 슈라이비, 압달라 함무디, 레미 르보’, <북아프리카 연감>, 제38권, 259쪽 이하, CNRS 출판사, 파리, 2002. 레미 르보는 <왕실을 비호하는 농민>(프랑스정치학재단 출판부·파리·1985)이란 책을 저술했다.
(3) 마흐주브 토브지, <국왕의 조신들>, 파이야르 출판사, 파리, 2007.
(4) 2008년 8월 토머스 라일리 라바트 주재 미 대사가 작성한 모로코군에 관한 보고서.
(5) 정의개발당은 1998년 일부 이슬람주의자를 통제하려는 정권의 뜻에 따라 창당됐다. 하지만 이후 정의개발당 소속 당원 가운데 일부는 정권과 거리를 둔다. 웬디 크리스티아나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 참조.
(6) 2009년 6월 6~12일.
(7) 자세한 사건 내용은 www.sauver-kaddour-terhzaz.org 참조.
(8) 모로코 정부는 라바트 남부에 위치한 테마라 고문센터의 존재를 부인해왔다. 하지만 이 센터는 이슬람주의 성향의 수감자와 관타나모 수감자의 심문에 가담해왔다.
(9) <텔켈>, 2011년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