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덫에 갇힌 나라, 멕시코

2011-03-11     장프랑수아 부아예

프랑스는 멕시코 법정이 납치 사건에 연루된 프랑스 국적의 플로랑스 카세에게 60년형을 언도한 것을 두고 다각적인 무력시위를 하고 있지만, 멕시코는 자국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이 사건에 대해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멕시코는 미국한테는 고분고분하다.

2006년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미국 외교에 동조해온 멕시코의 외교는 미국으로부터 노골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브라질의 외교와 크게 대조를 보이고 있다.

2009년 12월 마누엘 셀라야 온두라스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붕괴된 이후, 멕시코와 미국은 포르피리오 로보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한 온두라스 선거의 합법성을 인정했지만, 브라질과 유럽연합은 선거가 위법임을 선포했다. <<원문 보기>>

사사건건 미국 동조, 브라질과 대조

지난해 5월 유엔이 핵연료 교환 협정과 관련해 이란을 압박할 때 터키와 브라질은 유엔에 대안을 제시했지만, 멕시코는 이튿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함께 새로운 이란 제재 조처에 찬성했다. 한 달 뒤 안보리가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 구호선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사건을 논의할 때, 멕시코는 미국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유감 표명’을 지지하며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않았지만, 브라질은 이 작전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렇다면 멕시코가 1945년부터 1982년까지 국민주권, 타국의 내정불간섭, 민족자결 존중 원칙을 토대로 가닥을 잡은 외교정책을 포기했단 말인가?

우리는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데타를 부추겨 하야시킨 과테말라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구스만을 반긴 사람이 멕시코 대통령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의 후임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1958~64)는 비동맹국들과 접촉하고, 비동맹국의 가장 상징적인 두 인물인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와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를 방문한 데 이어, 1962년에는 미주기구(OEA)에서 ‘쿠바 혁명’ 정부를 배제하자는 미국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의 후임인 루이스 에체베리아(1970~76)는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을 지지하고, 남미의 군사 독재정권에서 쫓겨난 난민을 수용하며, 비동맹국 및 쿠바와의 관계를 강화한다. 이어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1976~82)는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혁명정당 ‘산디니스타’를 지지하고, 1978년 5월엔 모스크바를 방문해 소비에트연방 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접견해 “양국은 가장 중요한 이슈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강조한다.(1)

그러나 이런 기억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신의 핵심적인 안전 문제에 대해 멕시코와의 연대를 항상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로페스 마테오스는 비동맹국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동시에 워싱턴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4년 동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존 케네디, 린든 존슨 등 미국 대통령들과 6차례 회동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이웃 강대국 미국이 그어놓은 마지노선을 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래서 멕시코는 결코 비동맹운동의 정식 회원이 되지 못한 채 옵서버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멕시코는 1962년 10월 쿠바의 소련 미사일 위기 땐 미국과 함께 OEA를 지지하고, 쿠바 영토에 소련의 미사일 발사대 설치를 규탄하며 발사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이후 멕시코는 쿠바에 대해 엄격한 경제봉쇄 정책을 단행하고, 멕시코 공항을 경유해 쿠바로 가는 북미와 남미 혁명인사들의 명단을 CIA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에체베리아 대통령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그들도 제 목소리를 냈다?

역사학자 로렌조 메이어는 에체베리아의 쿠바와의 반목 전략은 전임 대통령들의 전략과 유사하다고 했다. 그의 정책의 초점은 정부에 “둘도 없이 소중한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것”이었다. 70년 동안 집권 제도혁명당(PRI)이 일당 독재정치를 해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웃에 대한 증오심이기 때문이다.(2) 실제 에체베리아와 미국의 관계는 전혀 달랐다. 훗날 우리는 CIA가 에체베리아의 전임인 디아스 오르다스의 집권 6년 동안 에체베리아를 채용해 남미에서의 좌파혁명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라이템포’(Litempo)에 투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3) 그리고 에체베리아는 집권 6년 동안 현지 게릴라 운동(혁명 좌파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한 ‘더러운 전쟁’을 주도한다.

멕시코와 미국이 실제로 팽팽한 긴장관계에 놓인 적도 있기는 하다. 로페스 포르티요는 1979년 7월 14일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수도 마나과를 방문해 신생국에 상당한 재정을 지원한다. 그는 특히 니카라과 혁명정부에 저렴한 멕시코 석유를 공급한다. 1981년 8월 28일, 멕시코와 프랑스는 ‘해방전선’(FMLN)과 ‘민주혁명전선’(FDR)을 엘살바도르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공식 선언하는 데 서명한다.

독재 정당화 위해 ‘친미’ 독배 마셔

1981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은 “산디니스타가 주도하는 니카라과는 우리 국경에서 2시간 정도의 비행 거리에 있는 소비에트연합의 동맹국”이라며 맹공격한다.(4) 워싱턴의 압박을 받은 멕시코는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려던 생각을 점차 지운 뒤, 미국과 니카라과를 협상 테이블에 앉혔다. 포르티요는 그 뒤로도 콘타도라그룹(Contadora Groupe)(5)에서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지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이혼’은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지속적인 미국의 압박 속에, 미구엘 델라 마드리드 대통령(1982~89)은 멕시코 경찰이 CIA 및 멕시코 정당연합과 은밀히 공조해 멕시코 영토에서 니카라과의 반정부 세력을 키우고, 마약밀매를 통해 이 단체들에 활동자금을 조달해도 좋다고 허락했다.(6)

1982년 국가 채무 위기가 발발하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멕시코는 채무로 급격히 붕괴됐다. 이에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집권 제도혁명당(PRI) 출신인 마드리드와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고르타리 대통령은 기꺼이 국고의 적자 감축, 규제 완화, 공영기업과 은행의 대대적인 민영화 같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북미의 재정 지원과 대출 재협상을 벌였다. 멕시코의 이런 노력은 멕시코가 1986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하며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3년 북미 3개국이 서명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미국과 묶어놨다. 이후 멕시코의 성장은 이웃 북미와의 교역 규모와 이들이 산업 부문과 하도급에 투자하는 자금 규모에 의존하게 된다.

더욱이 취임 몇 달 뒤 새로운 경제위기를 맞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1994~2000)은 이런 예속 상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미국은 엄청난 규모의 긴급 구제금융을 투입해 또다시 멕시코를 구한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결제은행,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BID) 등이 멕시코에 400억 달러 이상의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미국 스파이 노릇도 마다하지 않다

경제분석가 로헬리오 라미레즈 데라오(7)는 “이후 멕시코 정부는 가장 보수적인 북미 집단에 진 이 빚 때문에 국제정책을 속박당한 채, 난관에 봉착한 멕시코 경제의 버팀목인 미국의 산업 및 금융 그룹과 등지지 않기 위해 모든 조처를 취했다”고 말했다. 또 비센테 폭스 정부의 외무장관 호르헤 카스타네다는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굳이 멕시코를 위협해 일부 입장을 포기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며 “1982년부터 5∼6년마다 멕시코는 파산 위기에 직면했고, 그때마다 미국이 우리를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8)

2000년 집권당 PRI의 패배와 기독교 민주주의 성향의 사업가이자 전직 멕시코 코카콜라 회장인 국민행동당의 총재, 비센테 폭스의 당선은 미국과의 비동맹 유혹에 종지부를 찍었다.

폭스 대통령은 조지 W. 부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멕시코 정부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자국의 안보력을 미국 국경 방위에 쓰며, 멕시코 경제에 가장 유해한 NAFTA 조항에 대한 좌파와 PRI 민족주의자들의 재협상 요구를 묵살한다. 몇 년 되지 않아 멕시코의 주요 민간 은행들은 시티그룹, 홍콩상하이은행(HSBC), 스페인 최대 은행인 산탄데르 등 국외 자본의 손에 넘어간다. 멕시코는 쿠바와 외교관계를 체결한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2003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쿠바 제재에 찬성표를 던진다.

경제 예속이 정치 예속 심화시켜

멕시코는 그 대가로 미국이 이민법을 개혁해 미국 내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의 신분을 합법화해주고 노동자의 자유로운 입국을 허가해주기 학수고대했다. 멕시코의 주요 경제문제의 해결책은 산업화 정책의 부재에 따른 실업을 해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에서 안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 계획은 무산됐다.

미국과의 완벽한 동맹을 향한 이런 느린 진전을 책임지게 된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선택한다. 그는 만성적인 부패와 소외된 서민계층 때문에 끊이지 않는 이른바 ‘마약밀매 및 조직범죄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보, 전화도청, 돈세탁과의 투쟁 등에 관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멕시코 리오 브라보강 남부에서, 호르헤 카스타네다와 작가 엑토르 아길라르 카민 같은 멕시코의 지성인들이 국가주권에 추가 손실을 입힐 수도 있는 콜롬비아 계획(9)을 멕시코 영토에서 펼쳐달라고 미국에 요구하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중가요의 후렴구가 그랬던가! “신(神)에겐 멀고 미국엔 가까운 불쌍한 멕시코…”.

글•장프랑수아 부아예 Jean-François Boyer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일리야 프리젤, <소련의 눈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에서 인용,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 1990.
(2) 2010년 6월 17일, <1929년부터 2000년까지의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저자와 필자의 인터뷰 내용.
(3) Jefferson Morley, <Litempo: The CIA’Eyes on Tlatelolco>, National Security Archive Electronic Briefing Book, 204호, 2006년 10월 18일.
(4) 1986년 3월 16일 연설.
(5) 중미 평화를 목적으로 1983년 1월 파나마 콘타도라섬에서 멕시코·콜롬비아·파나마·베네수엘라 4개국이 출범시킨 기구.
(6) Anabel Hernandez, <Los Señores del Narco>, Mexico, Grijalbo, 2010.
(7) 2006년 대선 때 좌파 후보(사파티스트 지지자를 제외한 좌파)로 출마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전직 경제 자문관이자 북미 기업에 대한 멕시코 최고의 자문관 중 한 명. 2010년 7월, 필자가 당사자와 한 인터뷰 내용.
(8) 2010년 7월, 필자가 당사자와 한 인터뷰 내용.
(9) ‘콜롬비아 계획’(Plan Colombia)은 1999년 미국과 콜롬비아 정부 간에 체결한 협약이다. 이 계획에 따라 미국은 콜롬비아에 산재한 가장 큰 군 기지에 1천 명의 미군 보좌관을 배속시켰다. 이 지원으로 콜롬비아 정부는 정부군을 강화해 콜롬비아혁명군(FARC)에 맞섰다.
 


[박스기사]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멕시코의 경제

멕시코 얘기는 더는 흥밋거리가 못 된다. 지난해 7월 10일자 보수 성향의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멕시코를 “기울고 있는 비운의 나라”로, 6월 30일자 런던 <파이낸셜타임스>는 “표류하는 사회”로, 그리고 2010년 8월호 칠레 잡지 <아메리카 에코노미아>는 북미 대국의 경제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입고 “경제가 제자리걸음하는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제연구원 제임스 M. 사이퍼와 라울 델가도 와이스는 1980년대 말 단행한 멕시코의 경제개방이 “미국 경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멕시코의 생산조직을 와해했다”고 했다.(1) ‘마킬라도라’의 도약에 힘입어,(2) 멕시코의 수출 규모는 1993년 520억 달러에서 2008년 2910억 달러로 크게 증가한다. 하지만 사이퍼와 와이스는 “마킬라 산업, 즉 가공산업이 수출한 것은 멕시코 상품이 아니라 완제품을 만들어내는 값싼 노동력”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생산부품의 77%가 수입품이라, 멕시코가 얻는 부가가치 비율은 1988년 18.2%에서 2003년 8.2%로 대폭 감소했다.

국가산업 부문은 멕시코 정부의 지원정책 포기로 붕괴된다. 1999∼2007년 실질임금은 24% 감소하고, 2000∼2007년 실업률은 곱절 이상 늘었으며, 마약밀매 시장이 팽창한다.

또한 2008년의 금융위기는 멕시코 경제에 끊임없이 타격을 줬다. 미국의 소비 위축으로 멕시코는 다른 남미 국가들보다 훨씬 큰 고충을 겪었다. 2009년 멕시코의 국내총생산(GDP)은 6.7% 감소했다.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이 평균 3.2%인 데 비해, 2000년 이후 멕시코의 성장률은 1.9%로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때문에 미국 경제에 손발이 묶인 멕시코는 인내를 갖고 경제회복을 기다렸지만, 미국이 매년 중국으로부터 수입물량을 늘리고 있고, 멕시코의 석유 생산은 투자 부족으로 감소했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고용을 안정시키고, 멕시코 외화벌이의 세 번째 항목인 이주노동자들의 송금액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의 이민협정이 절박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이퍼와 와이스는 “미국에 도착한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의 교육수준과 이들이 멕시코 공교육 체제에 쏟아부은 교육비용, 그리고 1994∼2008년의 멕시코 생활비를 감안하면 멕시코가 미국에 송금한 액수는 3400억 달러로,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이 멕시코로 송금한 액수보다 1.8배나 더 많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멕시코 사회가 이주를 통해 미국 경제를 지원한 셈이다.

글•프랑수아 당글랭 François Danglin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Mexico’s economic dilemma: The Developmental failure of neoliberalism>, Rowman & Littlefield Pulishers Inc., Plymouth, 2010.
(2) 얀 비냐, ‘미국 하청기지 멕시코 국경의 예고된 나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