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상품이 된 신성한 이름, ‘파차마마’

2011-03-11     르노 랑베르

남미의 여신, 환경주의·대안 세계화의 상징 부상
실제 신앙과 불일치… 현실 외면한 신비주의 우려

기후변화에 공동 대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멕시코 칸쿤 국제협약을 거부한 나라는 볼리비아가 유일하다. 지난해 조인한 이 조약의 내용이 ‘시장경제 메커니즘’에 근거한다고 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생명을 구하려면 ‘어머니 대지’를 보호하기 위한, 전세계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토착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남미 대륙의 이념적 ‘탈식민화’에 기여할 것인가?

지난해 4월 22일, 코르딜레스 데스 안데스 산맥 기슭에서 “파차마마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코차밤바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연단 위에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불끈 쥔 주먹을 하늘로 쳐들면서 외쳤다. 환경 위기에 관한 모임에 참석하러 세계 도처에서 온 환경·정치 등 대안세계화 단체의 대표 5천여 명이 합창했다. “파차마마 아니면 죽음을!”

‘지속 가능한 개발’과 절묘한 만남

‘파차마마’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모랄레스 대통령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설명한다. “남미 인디언들의 언어로 ‘어머니 대지’를 의미한다.” 몇 해 전부터 이 단어는 언론이나 비정부기구의 출판물, 또는 환경주의나 세계화 대안주의 지지단체의 출판물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리베라시옹>에 따르면, 이 용어는 투기자본에 대한 과세를 주창하는 비정부기구(NGO),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가 개최한 하계대학에서 설파한 내용을 대변해준다.(1) 녹색당 당수인 파트릭 파르비아스가 환경주의 정치에 할애한 잡지의 특집 제목이기도 하다.

기후온난화와 관련한 비극적 가정들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면서부터 안데스의 여신은 향후 우리가 전력을 다해 인간의 모든 공격에서 지켜내야 할 모태의 현신(現身)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파차마마’를 들먹이는 자는 정말로 이 파차마마와 함께 조화롭게 살고 있는 토착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는가.

절묘하다. 지배적인 흐름이 되다시피 한 환경주의자들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 정부들처럼 점차 ‘지속 가능한 개발’의 개념에 흥미를 느껴 자신들의 주장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포함시키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연구자인 디에고 도밍게스와 다니엘라 마리오티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조화로운 상호관계의 모델을 찾는 것은 “토착 인디언 원주민을 진정한 환경주의자 자체로 동일시하는 것”이다.(2) 그런데 토착 인디언들은 프랑스계 영국인 환경주의자 몰리니에에 따르면, “모두가 도처에서 자연과 조화롭게 살 줄 알았던 시기에 그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일 뿐이다.(3)

그렇다면 인디언들 입장에서 본다면 무슨 뜻일지 궁금하다.

   
▲ 볼리비아의 파차마마 공연 포스터. 출처: BoliviaEventos.Com
환경학자 앙투아네트 몰리니에는 남미에서는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파차마마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4) 게다가 안데스의 전통에 따르면 파차마마는 ‘풍요의 신’과 마찬가지로 가뭄을 가져오는 신으로서 위협적이며, 인신 봉헌을 요구하는 ‘탐욕의 신’이다. 그렇다면 좀 까칠한 ‘어머니 신’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원을 따지자면 이 단어에는 대지의 개념도 어머니의 개념도 포함돼 있지 않다. 인류학자인 프랑크 푸포는 “‘파차’는 시간·공간·땅의 순환을 내포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며, ‘마마’는 절대적 권위를 의미하고 꼭 여성성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5) 그러므로 파차마마에 대한 서양적 해석이 남미 대륙에까지 건너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페루 인류학자인 마리사 데라 카데나는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혼혈 인구와 도시 인구들은 ‘빈곤’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인디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싫어한다”고 지적한다.(6) ‘대지의 여신’ 숭배와 관련한 파차마마라는 꼬리표가 이들에게 그만큼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뿌리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멀리 갔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인디언임을 갑자기 ‘재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콜럼버스 발견 이전 시대의 역사의 제 양상을 다시 돌아본다는 뜻인가?

백인에게 배우는 인디언의 전설

몰리니에는 “거룩한 사명감이 지배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학교수들까지 먼 오지로 와서 파차마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진짜배기’ 인디언들에게 파차마마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이들이 개발해낸 의식 중 하나는 “때로는 전혀 상관도 없는,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짜깁기 식으로, 역사나 인류학 텍스트에서 퍼오는 것”이라고 역시 몰리니에가 지적한다. 그녀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출판물로 내놓았다.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전통적인 공동체에 이런 교육이 어느 정도까지 흡수됐는지 밝혀주는 특별한 지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는 ‘조상들의 조화로운 생활’, ‘원시적 순수함’, ‘진정한 문화’ 같은 개념이 확산되도록 했으며, 비정부기구나 관광산업 종사자는 벌써 이를 이용하고 있다. 때로는 서방세계의 관찰자들이 보기 원하는 것을 구미에 맞게 팔아먹는 이상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의 ‘마법사들의 시장’은 한 예가 될 것이다.

진열대에 넘치는 봉헌용 라마 태아

시장 진열대에서는 누구라도 파차마마에게 봉헌하려는 라마 새끼들을 살 수 있다. 관광안내 책자를 보면 영적 양식으로서 “번영과 파차마마의 보호를 기원하고 최근에 지은 집을 축복하거나 풍작을 빌 수 있다”고 한다. 앙투아네트 몰리니에와 자크 갈리니에는 1990년 대 말까지만 해도 봉헌 의식은 “절망적 상황에서 나온 하나의 푸닥거리로 해석됐다”고 상기한다. 봉헌 의식은 대륙화한 파차마마에게 바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어느 산과 관련한 특정 신에게 바치던 것이었다. 소중한 라마 태아를 얻기 위해서는 “친족관계에 의존해서”, 때로는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두 인류학자에 따르면, “이제는 전통 의약시장에 태아가 대량으로 비치돼 있다. 새로운 태아가 들어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한 번도 봉헌 의식의 봉헌물이 된 적이 없는, 속을 짚으로 채워넣은 콘도르 사이에 전시한다”고 한다.(7)

그 양태가 어떻든지 간에 파차마마가 남미의 현실 속으로 뛰어든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토착 인디언이 과연 ‘진정한 환경주의자’인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선의를 의심치 않고 2004년 7월 막을 내린 제2차 토착 인디언 국가와 민족 정상회담의 최종 선언문을 믿는다면, “우리의 조상, 우리의 위대한 선조는 서로 사랑하고, 다산과 풍요의 파차마마를 경배하고,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영적·자연적 모든 종(種)들과 자유롭고 조화롭게 살 것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모든 개발계획과 탄화수소와 광물의 개발을 거부한다”고 선언문은 계속된다. 인디언인 웁에르토 촐란가는 “에콰도르 키추아민족연맹(Ecuarunari)의 이름으로 물과 땅, 탄화수소를 되찾기 위한 인디언의 투쟁은 천연자원을 국유화해야 하며, 단지 몇몇 가문이나 일부 초국가적 기업만 이용해서는 안 되고 모든 에콰도르인들이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수세기에 걸친 남미 인디언들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어머니-대지를 위한 투쟁과 동의어인 셈인가? 이들이 국가의 천연자원을 보호하려는 것은 언제나 파차마마라는 이름의 신을 보호하려는 것과 똑같은가?

2006년 1월 21일 열린 취임식에서 모랄레스는 파차마마의 승리를 축하했다. 2008년 9월부터 에콰도르 헌법은 “생명이 이뤄지고 재생되는 곳에서 파차마마의 존재는 존중돼야 한다”고 명기한다. 그러나 에콰도르와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에서 파차마마의 찬송은 파차마마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요구조건과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 인디언적이든 아니든 간에, 강력한 정치운동은 여러 가지 공약 중에서도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겠다는 약속을 한 지도자들이 권좌에 오를 수 있게 했다.

파차마마 인정해 채광권 획득하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임무가 아니다. 때로는 그들이 항의하는 사회·경제 모델을 급작스럽게 바꾸는 것보다는 우주 생성 이론적 담화에 의존해서 인디언을 옹호하는 것이 더 편해 보인다. 지난해 4월 20일 발표한 담화에서 볼리비아 외무부 장관인 인디언 다비드 초케후안카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인디언 토착 원주민의 관념을 옹호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공기·산·별·개미·나비 등이며, 인간은 그다음에 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장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장량을 자랑하는 볼리비아 리튬 광산 개발권에 대한 볼로레 그룹의 제안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유는, 웃을 일은 아니지만, 이 프랑스 회사가 “파차마마와 함께 조화롭게 일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8)

디에고 도밍게스와 다니엘라 마리오티에 따르면, 비정부기구의 영향으로 인디언 대중운동이 점차 지배적인 환경단체들이 만든 용어에 젖어들고 있다. 이는 이들이 요구하는 것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다. 아무튼 모든 담화를 파차마마화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결국 수세기의 전통을 지닌 남미의 ‘선량한 미개인’ 이미지의 마지막 변신으로 귀착될 것이다.

페루로 대표되는 안데스 국가들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 ‘토착 원주민’ 인물들이 등장한다. 독립이 되자 몇몇 엘리트가 새로운 나라의 초석이 될 하나의 사회집단을 찾았다. 드물게는 혼혈도 있었지만 대부분 백인이던 정치 지도자들은 바로 유럽인으로부터 해방돼야 했기 때문에 우선 유럽인을 거부했고, 동시에 그 땅의 적법한 소유자인 인디언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경멸을 받는 피지배자로서 인디언의 위상을 문제 삼지 않았다.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편리한 면이 있다. 현재의 사회질서를 뒤집지 않고도 지혜와 조화로 특징되는 이상적인 원지성(原地性)을 주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존재이지만 경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대신, 경멸적 의미로부터 정화는 되었지만 비사회학적인 용어인 ‘토착 원주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두 학자는 설명한다. 그리고 “‘인디언’과 ‘토착 원주민’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는 환상에서 현실에 이르는 거리만큼이나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9)

국제 금융기구들의 지원 이유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공동체에서 공화국의 기초를 참조한다는 것은 때로는 공화국을 세울 때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이것이 20세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보듯이 전복을 목표로 한 정치적 시도로 변할 수도 있다. 사회학자인 힐데브란도 카스트로 포조는 “1930년대 페루에서 전통 토착민이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 페루를 위해서 경제와 사회정의의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10) 그렇지만 잉카인들은 노역을 강요하는 가장 지독한 특권계층의 강압 아래서 살지 않았던가?

1980년대 초반부터 토착 원주민주의는 국제 금융기구들의 지원을 받는다. 부채 위기가 절정에 달했고 이 지역의 마르크스주의 게릴라들이 거의 사라졌을 때, 국제 금융기구들은 소수 종족 문화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원조를 해주었다. 1990∼2000년 12개 이상의 남미 국가들은 스스로 다인종·다문화 국가라고 선언하고 인디언들에게 사회적 권리는 아니지만 특별한 권리를 부여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거의 규칙적으로 재등장하는 토착 원주민주의는 페루의 사회학자 알베르토 플로레스 갈린도가 1986년 언급한 것처럼 “안데스 지역의 집단적 상상력은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 단계의, 모든 가능성의 패러다임과 미래의 대안이라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계속되는 갈린도의 지적은 날카롭다. “그러나 원주민에게 과연 ‘조상의 지혜’라는 것이 존재했던가? 이들은 자본주의가 도래했을 때, 완전히 압도당해서 뿌리도 잃어버린 채 전통적인 세계와 농촌 사회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지 않았던가.”(11)

자본주의 모델을 심하게 비판하는 코차밤바의 최종 선언은, 지구 파괴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세계가 조상의 원칙들과 토착민의 접근 방식을 재발견하고 다시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 대지’를 실제 존재로 다시 인정하고 태어나게 해 그녀에게 고유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세계화 대안주의자들의 주목을 끌던 주장이다.

급하게 다가온 환경의 위기를 의식한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인간사회와 자연의 이분법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자연을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주체들이다. 자연이 전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인간사회도 자연을 생산해낸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환경 시스템의 변화를 겨냥한다는 것은 ‘어머니 대지’라는 하나의 가정의 권리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머니 대지’를 만들어낸 사회조직 형태를 바꾸게 될 것이다.”(12)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각주>
(1) <Pachamama mia>, 2010년 8월 23일자.
(2) <Realidad economica>, n°256, 부에노스아이레스, 2006년 7월호.
(3) <The Way: An Ecological World View>, University of Georgia Press, Athens(Georgie), 1998(초판 1992).
(4) 저자와의 직접 대담.
(5) <L’eau de la Pachamama>, L’Homme, Paris에서 출판 예정.
(6) <Indigenous Mestizos: The Politics of Race and Culture in Cuzco, Peru, 1919~91,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2000.
(7) Jacques Galinier, Antoinette Molinié, <Les Néo-Indiens. Une religion du IIIe millénaire >, Odile Jacob, Paris, 2006.
(8) Associated press, 28 avril 2010.
(9) <Les néo-Indiens>, op. cit.
(10) <Del ayllu al cooperativismo socialista>, Biblioteca Peruana, Lima, 1936.
(11) <Buscando un inca. Editorial horizonte>, Lima, 1994.
(12) <The nature of environment: the dialectics of social and environmental change>, The Socialistregister, Londres,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