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복화술

2020-02-28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영국은 더 일찍 유럽연합을 탈퇴했어야 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자유무역의 화신이었으며, 영-미 동맹을 ‘특별한 관계’로 찬양한 윈스턴 처칠 총리 이후로 미국의 충실한 추종국이었다. 또한, ‘시티 오브 런던(City of London, 런던 금융가의 중심지-역주)’이 영국의 정치·경제를 지배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자본화의 상징이었으며,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 이후로는 강력한 신자유주의의 본보기 국가였다. 

이런 영국의 탈퇴는 유럽연합(EU)에 희소식이 될 수도 있었다. 유럽연합은 감옥이 아니다. 가입할 수 있다면, 탈퇴할 수도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잔꾀를 부리며 유럽연합 탈퇴를 미뤄온 영국의회는 드디어 영국 국민의 판결을 받아들이며, 이 시대에 필수적인 민주주의 교훈을 남겼다.

 

하지만 영국의 탈퇴가 유럽연합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는 국가들, 특히 자유주의와 범대서양주의(미국과 서유럽의 협력주의-역주)의 선봉에 서있는 독일은 실망할 수도 있다. 1963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우려한 대로 “미국의 영향력과 감독하에 있는 거대한 대서양 공동체”가 된 유럽연합은 이제 영국 없이도 유럽을 지배할 수 있다. 특히, 2004년 이후 약 12개 신규 회원국을 맞이한 후부터는 더욱 영국이 필요 없어졌다. 이 신규 회원국들 대부분은 유럽연합 가입 직전 미국의 요구로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한 국가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고서는, 특히 미국 국무부가 사전에 작성해준 글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간단한 공식성명도 발표할 수 없는 국가들이다.

과장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월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발표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안’에 대한 유럽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국제법 위반이 명백한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계곡의 이스라엘 합병, 그리고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인정을 골조로 하는 이 평화안을 제시한 직후, 미국은 동맹국에 배포할 성명문을 작성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을 열렬히 찬양하며 이 성명문에 적힌 문구들을 그대로 따라 읽었다. “우리는 이 해묵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에 감사를 표합니다”, “신중하고 현실적인 선의의 제안입니다”, “이런 비전으로 이 지역의 분쟁이 해결책을 찾길 기대합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평화안 발표 이후 서구국가들이 실제로 내놓은 성명문과 미국의 ‘추천 문구’들을 비교해봤다. 그 결과,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아직도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면 말이다) 유사한 문구”들(1)을 많이 발견했다.

늘 그렇듯, 영국은 가장 말을 잘 듣는 국가 중 하나였다. 유럽연합에 남아있는 다른 국가들도 백악관의 앵무새 역할을 놓고 영국과 겨뤘다. 특히 프랑스가 발표한 성명문은 놀라웠다. 프랑스는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에 감사”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에 경의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영국의 탈퇴 및 잔류 여부와 무관하게, 유럽연합의 독립은 앞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Georges Malbrunot, ‘Comment les États-Unis ont demandé à la communauté internationale de soutenir leur plan israélo-palestinien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안을 지지하도록 미국이 국제사회에 요구한 방법’, <르 피가로>, 파리, 2020년 2월 1일 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