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

2020-02-28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흰 마스크를 낀 사람들은 대개 눈이 선하고, 연약해 보인다. 얼굴이 거의 다 가려진 상태에서 상대방 눈의 크기와 움직임만 보고서는 사악함과 음흉함, 분노와 혐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아마 상대방도 마스크를 낀 내 모습에서 비슷한 선함을 느꼈으리라(고 희망한다). 평소 민낯으로 서로에게 경멸과 혐오의 말을 주고받은 정치세력, 집권세력에 좌파와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가며 온갖 저주를 퍼부은 ‘유사’ 종교세력, 이들의 말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기자’들이 흰 마스크를 낀 모습이라니…. 행여 마스크를 끼지 않은 이들을 공공장소나 카페, 식당에서 마주치게 되면 ‘반사회적 인간’으로 인식할 정도다(‘팬티 목사’로 알려진 전광훈의 마스크 미착용은 그의 말대로 장렬한 순교적 의미도 지닌다).  

 

그동안 남북문제, 한미 외교, 적폐 청산,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등의 수많은 쟁점에서 ‘반대의 반대’라는 기나긴 뫼비우스 띠를 드리웠던 세력들이 모처럼 논쟁 없이 이뤄낸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 다름 아닌 ‘마스크 착용’이라니! 쓴웃음이 나오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은근한 연민의 정에 젖어본다.

그런데 TV 뉴스를 통해 정치세력이 마스크를 벗은 채 또다시 저주와 혐오의 단어들을 쏟아내면, 잠시 잊고 있던 그들의 음흉함과 사악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스크로 잠시 그들의 민낯을 감출 수 있을지언정, 본성을 소독할 수는 없는 탓이다. 코로나바이러스 19가 극렬해지는 사이에, 그들은 아카데미 4관왕의 영예를 받은 영화 <기생충>을 “좌빨 영화”라 낙인찍고, 코로나바이러스는 ‘우한 폐렴’이라고 한사코 고집하며 중국인 봉쇄를 요구하고, ‘팬티 목사’ 전광훈 일행의 빈번한 광화문 정치 시위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옹호해왔다. 이 밖에도 그들의 억지스럽고 혐오스러운 발언은 부지기수다. 

그랬던 그들이 순식간에 입장을 바꿨다. 바이러스 감염자 수가 줄다가 대구지역에서 감염자가 급격히 늘자, 그들은 아무도 (그들처럼 야비하게) 쓰지 않는 ‘대구 폐렴’이라는 단어를 먼저 끄집어내, “대구 폐렴이라는 지역명을 쓰지 말아달라”라고 요구한다. 선거철을 앞두고 자신들의 절대적인 지지기반인 대구, 경북에 행여 ‘봉쇄’라는 단어가 나올까 봐 “정부가 대구 사람 다 죽일 것 같다”라며 생난리를 떤다. 그렇게 ‘유언비어’는 선수들에 의해 새롭게 각색된다.

그들이 과연 삶의 절박함과 죽음의 고통을 이해하는 걸까? 2003년 이후,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유지해왔다. 2009년 이후로 우리나라의 연간 자살자 수는 1만 3,000명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2017년 그 숫자가 1만 2,463명으로 대폭 줄었다. 2016년에 비해 자살자 수가 629명이나 줄어든 것이다. 그때 마침, 우리보다 한술 더 뜬 ‘자살국’ 리투아니아가 OECD에 가입하면서, 한국은 14년 만에 처음으로 자살 순위 1순위를 내주고 2위로 내려왔다. 그러나, 2018년 국내 연간 자살자 수가 1,207명이나 늘어나 1만 3,670명으로 올라섰고, ‘OECD 1위 자살국’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양화대교에서 투신해 한강에 떠내려가다가 다행히 한강경찰대 요원들에 의해 구조됐다. 서울 지역에서 발견된 자살 사망자 10명 중 평균 1명이 한강에 투신해 숨졌다. 5년 동안 한강변에서 익사 상태로 발견된 자살사망자 수는 총 1,044명으로 전체 서울시 자살 사망자의 10.5%를 차지했다. 연령대별로는 20대가 가장 많다. 한창 인생의 환희를 누려야 할 꽃다운 나이에 비관하고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심적 고통의 대부분은 경제·사회적인 이유에서다. 

국회의원, 고위직 공무원, 대기업 간부, 전문직 부모를 둔 20대 청년들이 ‘마용성(마포구, 용산구, 성동구)’의 고가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 ‘부모 찬스’나 ‘조부모 찬스’를 동원하며 영혼까지 끌어 모은 소위 ‘영끌’ 투자에 몰두하는 동안, 삭막한 현실에 좌절한 같은 또래의 청년들은 한강 철제 난간의 차가운 촉감을 안고 삶의 마지막을 정리했으리라. 자살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서울시 전수조사에 의하면 ‘경제적 원인’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다. 경제적 양극화는 교육•의료•스펙•기회•행복의 극단화를 가져온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대유행 속에서 간교함을 감추지 못한 정치세력의 민낯을 보며, ‘그들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맡겨선 안 된다’라는 믿음을 새삼 다시금 확인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자살자가 나오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자살 시도자가 나오는데도 마스크를 낀 채 ‘생명 존엄의 쇼’를 벌이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언젠가는 이 바이러스 재난도 끝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계획할 것인가? 

어쩌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의 1면에 소니아 샤가 지적한 대로 인류의 탐욕에 따른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로 파괴된 야생의 생태계 복원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염병의 역사를 보면 영원한 바이러스 재난은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 재난이 지나간 후에는? 잠시나마 마스크 뒤에 가려졌던, 그보다 더 무서운 혐오와 증오가 그들의 음흉한 계획하에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발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