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고환율, 고물가…서민경제 빚더미

[Corée 특집] 빈곤에서 살아남기

2011-03-11     장보형/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물가 급등이 큰 골칫거리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온상으로서 물가 급락의 위험에 시달리던 미국조차 잠재적 물가 불안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격세지감’이랄까, 한동안 물가를 끌어올리는 데 많은 에너지가 집중되었지만 지금은 너도나도 물가 잡기에 혈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경쟁 관리의 책임을 진 공정거래위원회마저 물가 기관을 자처한다. 물가 불안에 편승해 가격 담합 등으로 서민 생계를 위협하는 ‘범죄’를 척결하겠다는 취지인데, 대체로 뒷북치는 뉘앙스만 풍기고 실제 물가 안정에는 별 효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물가 불안의 시대

아직은 대부분의 물가 압력이 기상이변이나 지정학적 위험에 따른 공급 측면의 문제에 치중되어 있다. 국내에서도 이상한파와 구제역 등에 따른 농축산물 가격 앙등이 물가 불안을 주도했다. 이제는 중동 정치 불안과 맞물려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이 물가 상승세를 부추기고 있다. 공급 불안에 따른 물가 상승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다만 일시적 물가 급등이더라도 가격 교란에 따른 경기 위축과 분배 왜곡, 나아가 취약 계층이나 부문의 도태 등을 초래해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낳을 수 있다. 특히 우리처럼 양극화 폐단이 큰 처지에서는 그 반향이 한층 광범위할 수 있다. 일시적 충격일지언정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대응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게다가 최근 들어 국내 물가 불안이 수요 측면의 물가 상승 압력과 결부될 조짐이 포착된다. 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빠른 회복이 고맙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억눌려온 물가 압력을 촉발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주로 대기업에 치중된 얘기지만 지난해 말 특별 보너스다, 임금 재협상이다 하며 임금 인상이 줄을 잇고 있다. 대공황을 방불케 할 정도의 금융위기 파고를 거치면서 메뉴판을 손볼 여력이 없던 서비스 업종에서도 식료품이나 에너지 물가 급등에 따른 생계비 상승을 이유로 가격 인상이 현실화되고 있다. 지금 가파르게 상승하며 서민 생활을 뒤흔드는 전세 가격 불안도 같은 맥락이다. 정체된 집값을 대신해 전세 가격 인상으로 물가 상승을 반영하는 것이다.

본래 수요 측면의 물가 상승에 대한 전통적 처방은 금리 인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부동산과 연계된 막대한 가계 부채가 심각한 불안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금리 인상은 자금 조달 비용을 상승시켜 부동산 경기를 위축한다. 그렇게 되면 가계 부채 문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또 금리 인상은 환율 하락, 즉 원화의 대외 가치를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다. 높은 대외 의존성 탓에 수출 증대와 경상수지 개선에 사활을 건 우리로서는 묵과하기 힘든 선택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의 물가 불안이 혹시 그동안 위기 대처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취한 정책들의 소산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고환율 정책이 유가 급등 부추겨

그 출발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놓은 고환율 정책일 것이다. 대외 의존성이 강한 우리 경제로서는 결국 수출 부양을 통해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밖에 없고, 경제 안정성은 1997~98년 외환위기의 경험에서 보듯이 경상수지 흑자로만 담보된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원-달러 환율이 2007년 후반 900원 선까지 떨어지면서, 다시 경상수지 적자국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컸다. 그 우려는 2008년 경상수지의 반복된 적자로 현실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고환율 정책을 공공연히 표방하면서 환율을 끌어올리는 데 적극적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때가 안 좋았다고 할까? 국제 유가가 2008년 여름 한때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으면서 물가 급등 우려가 고조되던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환율 정책은 외국산 원유 가격 급등에 따른 국내 물가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빚었다. 다행이랄까, 이런 물가 불안은 이내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위기를 기화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폭발하면서 해소되었다. 이후 세계경제가 대공황의 악몽에 빠져들면서 국제 유가가 다시 급락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광범위한 세계적 경제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던 배경에는 바로 직전의 유가 충격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게 최근의 중론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유가 급등이 수요 증대를 반영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소박한 기대, 따라서 세계경제에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렇게 보면 정부의 고환율 정책은 역설적으로 우리 경제가 서구 금융위기에 그토록 취약하게 만들었던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고환율 정책이 유가 급등의 충격을 더욱 부추긴 것이다. 게다가 우리 경제의 경상수지 악화에는 무엇보다 유가 급등의 영향이 컸다. 경상수지 개선을 도모했던 정부 정책이 오히려 유가 급등을 부추기면서 정반대의 결과를 빚은 셈이다. 이런 국내 경제 여건의 악화는 본래 원-달러 환율의 상승 압력으로 반영된다. 굳이 고환율 정책을 펴지 않더라도 환율은 상승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대신 고환율 정책은 대내외적으로 우리 환율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각인시키면서, 오히려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각종 투기를 동반한 원-달러 환율 폭등, 다시 말해 2008~2009년 국내 외화유동성 위기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결국 유가 급등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취한 잘못된 선택, 즉 고환율 정책이 정작 국내 위기의 전주곡이 된 셈이다. 물론 우리 외화유동성 위기의 동학은 국내 조선업체들의 해외 수주 호황 등과 맞물린 단기 외화 차입 급증에서 비롯된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서구의 돈줄이 막히면서 갑자기 외화유동성의 고갈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시피, 국내 외화 차입은 많은 부분이 조선업체의 수주나 해외투자 펀드의 환헤지 등과 관련돼 실제 달러화의 유입을 담보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대체로 지불 능력 측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고환율 정책과 결부된 우리 펀더멘털(기초 경제 여건)의 취약성이 이번에도 역시 문제였다.

저금리 정책은 가계 부채 급증으로

환율 폭등과 맞물린 외화유동성 위기는 시중 자금 사정에도 악영향을 미치면서, 그 충격은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행은 서둘러 금리 인하에 나섰다. 그해 여름 유가 급등에 따른 물가 불안이 한창일 때 한국은행은 1년 만에 처음으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내 금리 인하로 돌아섰고, 정책금리는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까지 불과 5개월 만에 무려 3.25%포인트 인하되었다. 2008년 여름, 정부의 고환율 정책에 뒷북치듯 느긋하게 금리를 인상했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다. 이런 초저금리 기조는 2010년 하반기 들어 금리 인상이 재개되면서 진정되었지만, 아직도 금리 정상화 발걸음은 더딘 모습이다.

위기 대처 과정에서 공세적 금리 인하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뚜렷하지 못했다. 정책금리 인하와 맞물려 정부 국채(국고채) 금리는 대폭 떨어졌지만, 정작 시중 자금 사정의 척도라고 할 회사채 금리 등은 오히려 크게 상승했다. 외화유동성 위기가 원화유동성 위기로 번지면서 국내 기업의 신용 위험이 부각된 탓이다. 실제로 이후 회사채 금리의 하향 안정은 대부분 환율 안정과 궤를 같이했다. 반면 국고채 금리는 극단적 안전 선호가 기승을 부리면서 저공비행을 지속했다. 실물 부문으로 원활한 자금 공급이라는 금융시장의 제 기능이 실종되었고, 시중 자금의 단기부동화 같은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실물과 유리된 초저금리의 후유증은 무엇보다 가계부채의 급증으로 구현되었다. 신용 위험이 기승을 부리면서 이래저래 돈 굴릴 데가 막힌 금융권이 주택 등 부동산 담보 위주로 가계대출에 ‘올인’한 탓이다. 동시에 지표상으로는 2009년 초를 저점으로 우리 경제가 빠르게 회복세를 보였지만, 고환율 정책의 영향으로 수출 대기업에 그 수혜가 집중되었다. 또 모두가 계속 유동성 확충에 혈안이 되면서 수출 소득의 국내 환류라는 선순환이 작동을 멈춘 것도 문제였다. 다시 말해 경제는 되살아났을지 모르지만, 내수·중소기업·자영업 위주의 서민 경제는 전혀 수혜를 누리지 못했다. 결국 부채에 의존해 생활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향이 지난해 말 800조 원에 이르는 가계 부채(가계 신용 기준)로 드러났다.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3분기 말 대비 무려 120조 원가량 늘어난 규모다.

수출기업 빼면 부채로 연명

글로벌 금융위기는 ‘부채에 의존한 성장’의 환영(幻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 경제는 이런 위기의 교훈에서 오히려 역행하는 모습이다. 위기 극복용 처방인 저금리 정책이 도리어 위기 원인이라고 할 부채 증가를 낳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전염 고리였던 국내 단기 외채 급증 역시 과거 남미 위기나 1990년대 외환위기 때와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휘발성이 큰 국제 자본 흐름의 변덕이랄까?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거시건전성’이라는 이름으로 자본 유출입에 대한 각종 규제가 취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부적 거시건전성 문제는 등한시되고 있다. 위기 대응과 관련해 우리가 국제적으로 호평받은 성과 하나가 총부채상환비율(DTI) 같은 부동산 규제 정책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시급성이 해소되자 슬그머니 발을 빼려는 모습이다. 수출과 더불어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주축인 부동산 경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다. 부동산은 주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물(자산)이자 동시에 금융 투기의 대상인 (금융)자산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야누스 같은 존재다. 상승장에서는 가격 상승을 노린 투기가 판치지만, 하락장에서는 실물적 성격이 부각되면서 정책적 배려가 집중된다.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은 서민 경제다. 물론 미국에서 그랬듯이, 부동산은 때때로 서민을 볼모로 삼는다. ‘내 집 마련’이라는 소박한 꿈을 빌미로 말이다. 불행히도 그 꿈은 종종 막중한 부채에 눌린 끔찍한 악몽으로 귀착된다.

모든 건 서민경제 희생으로 수렴

‘747’로 대표되던 이명박 정부의 고성장 정책은 고환율에서 시작되어 저금리, 나아가 고부채로 이어졌다. 그 반향은 물가 불안과 서민 생계의 위기로 귀착되는데, 정작 이에 맞선 정책적 대응은 족쇄를 찬 실정이다. 이제 단순한 성장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경제 안정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또 경제 안정의 주춧돌은 금융 안정, 다시 말해 거시건전성이다. 혹시 이를 금융(자산)시장 버블, 또는 물가 불안의 방기로 오해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외형적 성장에 치중한 경제 관리는 또 다른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장보형 
현대 세계경제와 국제 금융시장의 동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버냉키노믹스>(유비온·2007)와 <서브프라임 위기>(공저·하나금융경영연구소·2009)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