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차기 정부의 부시 흔적 지우기, 한미관계 향방

2008-12-01     조성렬 |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코리아 연구원 공동기획

오바마는 지난 7월 15일 워싱턴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연설을 통해 차기 미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 방향을 △이라크전쟁의 책임 있는 종료, △알 카에다, 탈레반 전투의 종식, △테러 집단, 불량국가로부터 핵안전 확보, △진정한 에너지 안보의 확보, △21세기 도전에 맞선 동맹관계의 재구축 등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대외정책은 같지만 운용하는 방식은 크게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한 마디로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에서 '국제협조주의'로, 군사력 위주의 '하드파워'에서 경제재건, 안정화 지원과 같은 소프트파워가 결합된 '스마트파워'로 바뀌게 될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 방식도 군사력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극단주의 세력을 키우는 환경의 제거를 위해 국제사회와 협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공산주의가 서유럽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던 마샬플랜과 같이, 국제테러망을 분쇄하기 위해 '공유된 안보동반자프로그램(SSPP)'을 신설하고 2012년까지 대외 원조액을 500억 달러로 배증하여 실패 국가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우방국들에게 이 부담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 중시 정책
 미국 차기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아시아 정책이다. 오바마 차기 행정부는 아시아 중시정책을 펴나갈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진영의 프랭크 자누지 한반도팀장(미 상원 외교관계위 전문위원)은 10월 2일 워싱턴 한인 오바마 지지 모임에서 "오바마는 대통령으로 처음 순방하는 지역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되길 바란다"면서 아시아 중시정책 의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8월 7일에 발표된 민주당 정강정책은 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한국 일본 호주 및 인도와도 협력을 강화하며, 중국에 대한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을 통해 기후 변화와 같은 공동 관심사에 협력하고 개방과 시장 경제화를 더욱 촉진시킨다는 구상을 밝혔다. 오바마 당선자는 매케인과 같이 아시아 중시정책을 표방하면서도 중국과 일본에 대한 입장은 상이하다. 중국의 책임을 요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중국을 활용해 아시아 지역의 번영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구상이다.
 또한 오바마는 양자 합의, 간헐적인 정상회담, 6자회담 같은 임시적인 대화장치를 뛰어넘어 새롭고 항구적인 아시아 집단안보체제(new and lasting framework for collective security in Asia)를 만들어 나간다는 구상을 밝혔다.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높이고 초국가적인 위협에 맞서기 위해 아시아에서 한층 효과적인 지역틀(regional framework)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을 내세워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 안보의 틀 속에서 중국과 일본을 동시에 관리해 나간다는 구상인 것이다.
 
 한미동맹과 한미FTA
 오바마 정부도 한미동맹 강화가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의 초석이라는 데는 기존 미 행정부와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지난 2003년부터 기존의 냉전형 동맹에서 21세기형 동맹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해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이양, 산재했던 미군 기지의 2개 허브 기지로의 이전·재배치 등 재조정 협의를 마친 상태이다. 올해 들어 미국측의 정책 변화로 주한미군의 감축 동결(25,000→28,500명)과 주둔 기간의 연장 조치(1년→3년)가 추가로 취해졌다.
 이전된 미군기지의 환경 치유 문제, 방위비분담금 및 미군기지 이전비용 문제와 같은 세부 조정작업이 남았지만 동맹 관계를 뒤흔들 정도의 중대한 현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오바마 당선인이 이라크 미군을 조기에 철군하면서 아프간 전쟁에 몰두하기로 함에 따라 우리 정부에 '비전투 지원(non combat help)'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 8월 5~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아프간 파병문제를 꺼낸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토 동맹국으로부터 병력 파견이 여의치 않을 경우 전투병의 파병을 요청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한미FTA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경제로서는 한미FTA의 발효를 통한 수출 증대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당선인은 선거기간 동안 몇 차례나 자동차 추가협상이 없는 한미FTA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현재 행정부 뿐만 아니라 미 상하 양원 모두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있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FTA의 조기 타결이 쉽지않을 전망이다.
 
 북핵문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오바마 차기 행정부가 들어설 때 가장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대북정책 쪽이다. 오바마 당선인은 후보 시절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 이란의 지도자와의 조건 없는 대화와 같은 직접외교(Direct Diplomacy)를 강조해 왔다. 독재국가의 지도자와도 대화하겠다는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양자 및 다자 대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무대로 이끄는 동시에 비핵화와 관계정상화,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를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동맹국과 친구 뿐 아니라 시리아, 이란, 북한, 베네수엘라 같은 우리의 적들과도 강력한 외교를 주도해 나갈 것이다. 나는 지도자들을 만날 것이며 준비는 하되 조건은 없이 만날 것이다. 나는 이들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설명할 것이다.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게 북한의 핵개발로 이어졌고, (그제야) 대화를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6자회담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진전을 이뤄냈고, 북한으로 하여금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오바마 후보의 사우스 다코타 기자 간담회, 5월 17일)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난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 커뮤니케'가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북·미관계의 전면적 개선, △정전협정의 공고한 평화보장체계 전환, △호혜적인 경제협조와 교류, △회담기간 중 미사일 발사의 유예, △한반도 비핵평화를 위한 제네바 기본합의 이행, △인도주의 분야에서의 협조,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준비하기 위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에 합의하였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무엇보다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자누지 한반도팀장은 10월 2일 한 모임에서 "오바마는 북한과 관계 개선을 위해 고위급 협상을 포함해 모든 외교적 대안을 고려하고 있다.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적극적인 양자 회담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벌써부터 페리 전 국방장관이나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대북 특사설이 나오고 있다.
 이 같은 구상이 실현되어 고위급 북·미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빠른 시기 안에 한반도 비핵화 3단계 협상이 시작되고 평양과 워싱턴에 외교대표부의 설치가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다.

 MB, 새로운 외교 안보정책 필요 
 북핵문제의 커다란 진전없이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기는 어렵겠지만, 비핵화 3단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면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10.4정상선언'에서 합의된 바 있는 "종전을 선언하기 위한 3~4자 정상회담"이 조기에 추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 대만의 정권교체기가 집중되어 있고, 북한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규정된 2012년은 각국이 이러한 시나리오의 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적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2012년이 끝나기 전에 북·미 수교를 통해 후계 정권의 기반을 마련해 줄 필요성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오바마 정부는 북한 주민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적이면서도 비교적 탄력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오바마 당선인은 "탈북 난민들의 절망적인 상황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당한 권리침해다. 그들이 강제 송환돼 처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그들은 국제법에 따라 난민으로 보호받아야 한다"(7월18일, '북한자유를 위한 한인교회연합'에 보낸 지지 서한)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조셉 바이든 부통령 내정자는 북한 인권, 탈북자 문제에 대해 점진적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9월 24일 자유아시아방송(RFA)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을 점진적으로 인권과 안보, 그리고 무역에서 국제 규범을 준수하도록 북돋우는 전략과 조화 속에서 인권과 탈북자 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오바마 차기 행정부는 북핵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는 급격한 인권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미 외교의 과제
 이명박 정부는 기본적인 외교 방향을 한미동맹의 강화 및 한·미·일 안보협력의 복원으로 잡았다. 하지만 한·미동맹은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을 거치면서 당초 약속했던 '21세기전략동맹 선언'을 차기 행정부로 미룬 상태이다. 한·미·일 안보협력의 복원은 독도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마찰도 늦춰진 끝에 최근 외교 및 국방 분야의 3자 협의가 재개된 상태이다. 이에 비해 한·중 및 한·러 관계는 과거에 비해 불편해 졌지만, 표면적으론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우리 정부의 초기 외교안보 구상이 변형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국제역학 관계의 변화와 지정학적 압력 때문이다. 따라서 오바마 미 행정부의 출범이 예상됨에 따라 우리 정부는 새롭게 외교안보 구상과 대북정책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도 중요
 먼저, 오바마 차기 행정부가 중국의 책임 있고 건설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만큼, 우리 정부의 외교안보정책도 미·일 일변도가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한 새로운 구상을 수립해야 한다. 다음으로 대북정책의 재조정이 필요한데, 이것은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방향전환론이다. 오바마 차기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조응하여 우리의 대북정책을 전면적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둘째는 입장고수론이다. 북한의 '통미봉남'전략에 맞서 북한의 대남태도를 변경할 때까지 우리의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납치문제의 미해결에도 불구하고, 대북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데 불만을 갖고 있는 일본과 대미·대북 정책공조를 꾀한다. 셋째는 절충 타협론이다. 현재 오바마 진영의 대북정책은 아직 선거공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외교안보 라인이 들어와 정책을 확립하기 이전에 정부간, 반관반민간, 민간간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오바마 차기정부의 한반도 및 대북정책을 우리 정부 입장에 가깝게 돌리도록 정책 수립에 영향을 미치는 방안이다.
 차기 미 행정부 내에서 어느 그룹이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가 주도권을 잡든, 대북 접근을 가속화할 것은 분명할 것 같다. 우리 정부가 미국의 행정부가 바뀌었다고 금세 그들의 정책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과 맞서 가면서 우리의 정책을 고집할 처지도 아니다. 일본도 조만간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로 집권당이 바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차기 행정부의 한반도팀과 협력하여 공동의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미간 절충선을 어느 쪽에 가까이 두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대북정책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오바마 차기 행정부의 견해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한·미간의 절충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우리 정부의 선택폭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설상가상으로 내년 봄 일본 총선에서 비자민 연립정부가 들어서기라도 한다면 우리 정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다. 때론 전략적 후퇴도 좋은 정책적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