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의 ‘테러 비즈니스’

2020-02-28     마르크앙투안 페루즈 드 몽클로 l 연구원

아프리카 제2의 경제 대국 나이지리아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인 ‘보코하람(BokoHaram)’ 진압이라는 과업을 수행 중이다. 그러나 10년 동안 발생한 4만 명 이상의 사망자 중 절반은 보코하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코하람을 진압하는 치안유지대의 총에 죽었다. 서구권 국가들이 총애하는 이 나라에서, 테러는 일종의 ‘비즈니스’로 시장을 형성했으며, 부정부패와 함께 민생의 위협요소가 됐다.

 

테러 진압인가, 민간인 탄압인가?

‘테러’ 담론은 대개 ‘보코하람’의 야만적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며, 테러 진압 세력의 만행에 대해 거론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대표적인 경우가 아프리카 최대 인구의 나이지리아다. 나이지리아 정부와 언론에서는 보코하람의 범죄행위를 주로 언급한다. 물론 보코하람이 차드호 유역에서 갖은 만행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1) 군인을 참수하고 인도주의 활동가를 처형하는가 하면, 젊은 여성을 납치하고 자살테러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 진압 세력’의 숱한 만행을 다루는 경우는 별로 없다. 테러 진압 세력에 의해 일어난, 감옥 내 고문, 이주민 보호소 내 강간 사건, 2013년 4월의 바가 마을과 2017년 1월의 란 마을의 민간인 폭격과 대량살상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보코하람에 대한 정부 병력의 과잉진압 양상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문제적 소지가 많은 일은 대개 민병대로 구성된 보충병들이 맡기 때문이다. 현장취재가 만만치 않은 만큼, 무자비한 대테러 활동의 결과에 관심을 두는 기자들은 드물다. 이런 언론의 침묵은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정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범죄행위가 만연하고, 이는 다시 ‘불경한’ 세력을 몰아내려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된다. 

심지어 청년들이 임의체포나 고문을 피하고자 보코하람에 가담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보코하람의 현지 자금줄을 끊기 위해 시행된 경제 조치들은, 엉뚱하게도 농촌경제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카메룬, 베냉으로 이어지는 육로 일부를 차단한 것 외에도 당국이 축산업자들에게 가축판매를 금지하거나 농부들에게 일부 농지에서의 경작을 금했고, 어부들에게도 차드 호수로의 접근을 제한한 까닭이다.

 

선진국들, ‘대테러 활동’에 환호

나이지리아에서의 긴장 고조는 자연히 역내 안보 상황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프리카의 주요 산유국인 나이지리아는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버금가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나이지리아의 GDP가 이미 남아공을 넘어섰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는 통계자료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보코하람의 한 분파가 IS에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만큼, 2003년 이후 나이지리아 북동부에서 지속되는 위기상황은 니제르, 차드, 카메룬과의 국경을 넘어 사헬 지대 전체의 안보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나이지리아 내에서 집계된 피해자 수는 이미 4만 명 이상인데, 그중 절반은 치안대 및 이에 소속된 민병대 보충병에게 목숨을 잃었다.

현재 나이지리아의 행정 수반은 확고한 민족주의자를 표방하는 무함마드 부하리 대통령이다. 1984년과 1985년 사이 군부 독재로 정권을 잡았던 부하리 대통령은 그 당시 IMF와의 관계를 단절하며 나이지리아의 경제 주권을 표명했다. 2015년 민주적 절차로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뒤 2019년 초 재임에 성공한 부하리 대통령은 애초에 약속한 정치개혁(부패 방지) 및 경제개혁(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보호)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게다가 군대의 명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보코하람을 과잉진압했고, 의회에는 대테러 활동을 위한 10억 달러의 차관 승인을 요청했다. 군비 횡령에 대한 공식조사도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듯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의 위협이 하나의 돈줄이 되고 있다. 마치 냉전 때와도 비슷한 양상이다. 당시에도 이들 국가는 ‘빨갱이를 저지한다’라는 명목으로 서구 열강들로부터 대가를 챙기려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나이지리아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벌이는 대테러 활동에 대해, 미국에서는 끊임없이 찬사를 보냈다. 

2018년 4월 30일 성대한 환대 속에 미국을 방문한 부하리 대통령에게 트럼프 미 대통령은 나이지리아가 “IS 조직을 무찌르기 위한 동맹에 제일 처음 가담한 국가”라고 치하하면서 “나이지리아 군대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IS 소탕을 위한 지역적 노력을 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 대륙 내 사이버범죄의 본거지인 만큼 FBI도 사이버범죄 퇴치를 위해 나이지리아 당국과 공조 중이며, 2018년 7월 나이지리아를 찾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나이지리아에 G5 사헬 연합군(사헬 지대에서 대테러 활동을 벌이는 부르키나파소, 차드,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연합군) 활동에 대한 지원을 당부했다.(2)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가 나이지리아를 찾아 대테러 활동 기술을 갖춘 나이지리아 군대 창설을 위한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석유자원이 풍부한 나이지리아는 말리나 니제르, 차드 같은 주변국에 비해 국제원조 의존도가 낮은 편이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크기에, 역내 안보균형의 핵심주체가 됐다. 군사예산이 불투명하게 운용되기에, 일부 장성들은 ‘지하디즘’이라는 황금제조기를 부수고 싶은 생각이 없다. 1999년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들어선 문민정부에서는 오히려 군대 예산을 확대했다. 보수가 줄고 불만이 생긴 하사관들이 반란이나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3)

이렇듯 정부의 대테러 활동이 파국으로 치달은 배경에는 보다 오랜 역사가 자리한다. 사실 식민지 때부터 이미 치안대의 부패와 범죄가 있었고, 영국의 식민 통치 시기에도 경찰은 (1949년 에누구 지역 석탄 인부 파업 진압 때처럼) 대량학살의 주범이었다. 게다가 그 시절 나이지리아 당국은 불순한 지하조직에 제복을 되파는 암시장의 성행을 우려했는데, 밀거래한 제복으로 치안유지대 행세를 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4) 게다가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유럽으로 파병된 군인들이 갑자기 동원 해제되면서, 수많은 병사가 연금도 받지 못한 채 실직상태에 놓였다. 이들 중 일부는 무기를 불법 거래하거나, 보호 명목으로 마을 주민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다 체포됐다.(5)

 

민간인을 향한 군대의 폭력

1960년 독립 후에도 문제는 계속됐다. 1970년대의 석유호황으로 부가 쉽게 축적됐고, 1980년대에는 군사정권의 폭정과 경제 위기까지 겹치면서 다시금 치안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1999년 민주정권이 수립됐지만, 부패의 고리를 끊고 군의 무법적인 처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찰보다 훨씬 막강한 총기의 위력을 앞세운 군대는 질서유지와 약탈 방지, 역내 갈등 중재, 국민의 생명보호 등의 명목으로 소집될 때마다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시나리오가 반복된다. 군대는 무작위로 총구를 겨누며 동료의 죽음에 복수했고, 10년 후 북동부 지역의 보코하람 소탕 때도 같은 방식의 보복이 일어났다. 남부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9년 11월 20일 바이엘사 주의 오디 마을에서도 경찰 12명의 암살 이후 군인들이 마을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 수는 총 2,483명이다.(6) 이어 2001년 10월 12일 베누에 주의 자키 비암 마을에서도 군대는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마을 주민 200여 명을 학살했다. 공식적으로는 농지접근권을 두고 갈등을 빚은 티브 족과 주쿤 족 사이의 중재를 위한 병력파견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군병력이 투입된 곳은 자키 비암 마을이었다. 사지가 절단된 채 살해된 군인 19명에 대한 보복을 하러, 병사들이 마을로 쳐들어간 것이다. 이런 보복 논리 역시 대테러 활동을 위한 진압 작전의 주요 명분으로 작용한다. 이에 2009년 7월 30일 보코하람 창설자 모하메드 유슈프가 즉결 처형된 뒤에도 군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슬림 청년들을 잡아 죽였다. 보코하람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경찰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병사도 제재를 받지 않았으며, 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단 한 번도 보고서를 제출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오디 마을처럼 피해자 가족에 대한 당국의 배상이 있었을 뿐, 그나마도 자키 비암 마을에서는 아무런 조처가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경찰과 군인들은 계속해서 막연한 의심만으로 수십 명을 죽였으며, 그에 따른 처벌은 전무했다. 이바단 대학 연구진은 (나이지리아 폭력감시 위원회의 자료를 토대로) 치안대가 세간의 표현처럼 영락없는 ‘Shoot and kill’의 꼴이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평화 유지를 위해 병력이 투입된 극단적인 폭력 사태의 50% 이상이, 군경이 ‘총을 쏘고 사람을 죽인’ 건이다.

군사정권 이후 들어선 문민정부들도 이런 군경의 만행을 처벌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군경병력을 저지할 힘도 없었거니와 이들의 반란이나 폭동이 두려웠고, 관심 또한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보여주기식 개혁에 그치거나, 공언에 불과한 약조만을 공표했다. 2005년 1월 부패혐의로 직위 해제됐던 발로군 경찰 총장의 사례가 그 단적인 예다. 올루세군 오바산조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요루바 부족 출신이었던 타파 발로군 경찰청장이 횡령 건으로 해임됐을 때만 해도 민주 정부가 행정권을 장악하리라는 기대감이 고조됐다. 경제금융범죄조사위원회장이 된 누후 리바두 수사관이 자신의 상관인 발로군 총장을 징역 5년 형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로군 총장은 불과 6개월 만에 풀려났고, 자신이 횡령한 돈 중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반환했다. 

2007년 4월 오바산조 대통령 후임으로 선출된 우마루 야라두아 대통령도 리바두 수사관의 승진을 서둘러 철회하려 했다. 경찰 내부에서 동료들로부터 미움을 산 리바두 수사관은 승진 직후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직업연수를 떠나며 경제금융범죄조사위원회장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자리에는 별다른 힘이 없는 파리다 음잠베르 와지리가 임시로 부임했다.(7) 결국 2008년 12월, 리바두 수사관은 ‘규율위반’으로 경찰에서 해직된 후 망명을 떠났다가 귀환했고, 2011년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득표율은 약 5%에 그쳤다.

이후 안보 분야의 민주적인 개혁시도는 모두 대테러 활동의 시급성 앞에서 무산됐다. 지난 2019년 2월 대선에서도 여당은 즉결 처형에 대한 언급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보다는 치안 기구의 ‘지역화’에 관한 논의를 우선했는데, 그렇게 하면 2억 인구의 다문화사회 요구에 부응하며 주민과 소통하는 경찰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재 규정에 따르면, 치안병력은 원칙적으로 출신 지역에는 배치되지 않는다. 다양한 지역 출신으로 군경병력을 구성해 전국 각지에 배분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방침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직자가 자기 출신 지역의 편의를 봐주지 못하게 하려는 장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지역에 무작위로 치안대가 배치돼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했다. 특히 치안 유지 지침에 대해 마을 주민들이 이해하지 못할 경우, 이는 상호 불신과 두려움을 키우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문맹률이 높은 나이지리아 북부가 대표적인데, 심지어 이곳은 보코하람이 강성인 지역이다. 

 

폭군들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다

과거 영국의 식민정부는 현지 출신 경찰관을 기용한 뒤, 이들을 서로 연계해 당국의 방침을 전달했다. 북부 무슬림 지역에서도 하우사족 출신 치안경비대 ‘도가라이(Dogarais)’가 ‘에미르(Émir, 무슬림 지도자)들’을 엄호하고 최소 비용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이런 지역 당국과의 공조 덕분에 북부 무슬림 지역은 기독교 세력이 우세한 남부보다 갈등이 더 완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영국인들의 경제적 수익이 집중되고 중앙 경찰 기관이 포진한 남부에서는 주요 독립운동 근거지도 모여 있었고, 이와 더불어 파업, 소요사태, 조세저항이 빈번했지만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는 어려웠다.(8)

해방 이후 비아프라 분리 독립 내전(1967~1970)이 일어나자 1968년 정부는 ‘토착민’으로 이루어진 경찰 조직을 없애고 일원화된 중앙 기구를 세우고자 했다. 사실 이 ‘토착민’ 출신의 경찰들은 분리주의를 지지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군대 또한 폭도들을 양성하는 실책을 저지른 나머지, 결국 비아프라 분리주의자들을 전쟁터로 이끌었다. 이로써 지역사회와 연계된 현지 출신 경찰관을 기용하겠다는 생각은 군부독재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공론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당국은 군경병력에 현지 주민을 배제한다는 방침을 차츰 완화했다. 

오늘날 나이지리아 연방의 36개 주는 헌법에 의거해 중앙 경찰국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다. 따라서 각 주는 중앙 경찰국의 업무와 총장 임명을 감독하는 연방위원회에 참여하며, 특히 각 주에서 자체적인 치안 유지 활동에 배정할 수 있는 비공개 예산으로서 ‘Security vote’라는 기밀 자금을 보유한다. 북부든 남부든 각 연방 정부는 포괄적 권한을 부여받은 도로교통안전국이나 환경보호국을 두고 있다. 일례로 카노 주는, 2011년 신설된 Karota(Kano Road and Transport Authority)가 교통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교통상황을 통제하고 불량 운전자를 단속하는 한편 도난 차량회수 업무와 구걸 행위 통제 업무, 비인가 정류장 단속 업무를 맡고 있다. 라고스 주에서도 Lagos State Environmental and Special Offenses Enforcement Unit라는 사무국을 통해 빈민촌 철거와 떠돌이 행상 단속, 폐기물 관리, 매춘부 단속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공공장소를 무단으로 점거하는 모든 행위를 예방한다. 

지역 차원에서의 이런 활동들은 Federal Road Safety Corps라는 도로교통안전청을 비롯한 중앙 기구의 활동과 완전히 중복된다. 따라서 주지사는 마음먹기에 따라 이 기밀자금 ‘Security vote’로 중앙경찰 요원을 매수해 반대파를 제거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보르노 주와 리버스 주였다. 사실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분리독립주의자의 저항이 거세진 데에는 이들의 전략도 한몫했다. 일례로 2009년 6월과 7월 보르노 주도 마이두구리 시에서 알리 모두 셰리프 주지사의 ‘Flush’ 작전에 따라 보코하람의 교통사고 사망자 장례식 때 실시된 유혈진압은 보코하람의 봉기를 촉발한 주된 원인이었다. 

이렇듯 나이지리아의 치안 유지 활동은 독재 정부의 전통적인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으로 독재 정부하에서는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므로, 경찰기구 또한 당국 수뇌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문민정부에서는 오히려 마피아식 관행이나 매수 등의 방식이 판을 친다. 정부의 눈먼 돈에 손을 대는 것도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중앙 경찰국은 무수한 압력집단들과 손을 잡는 한편, 언제나 호의적이지는 않은 지방세력의 역학관계에 맞춰 나가야 한다.(9) 

나이지리아 중앙정부는 군경의 폭력적인 관행을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 군사독재 정부 역시 숱한 명령을 내렸지만 이를 순순히 따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10) 특히 1993년과 1998년 사이 수립된 사니 아바차 장군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지휘체계가 말 그대로 와해됐다. 저항하는 군경들은 투옥하거나 배척하고, 말 잘 듣는 부하들만 남긴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지방 사령부에서 중앙이나 고위관리의 지침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부적절한 방침을 내놓을 때 보통 치안병력의 탈선이 나타난다. 

따라서 경찰구조를 지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발상은 일종의 위탁이나 분권화의 형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각 지방의 폭군들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격이 된다. 이들은 더더욱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언론감시의 눈을 피할 것이고, 국제 사회의 시선도 수도 쪽으로만 집중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식의 개혁으로는 전혀 현 상황을 개선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나이지리아 중앙정부가 적극 개입해 각 지역의 진압부대나 사법기구, 교정 기구들의 비행을 해결하고, 나아가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성행하는 자위 민병대를 시급히 규제해야 한다.

2012년 보르노 주의 마이두구리 시에서는 ‘Civilian Joint Task Force(CJTF)’이란 민병대가 창설됐다. 보코하람에 대한 대테러활동은 물론, 저항세력 주둔 의심지역에서 대대적인 검거작업이 이뤄질 때 치안병력이 민간인을 죽이지 않도록 저지하는 역할까지 도맡은 조직이었다. 정부의 대테러활동을 보조하는 이 민병대는 먼 타지에서 파견돼 얼굴도 모르는 채로 주민들 사이에 숨어든 적을 체포해야 했던 중앙병력보다 현지 사정에 더 정통했다. 이 민병대원들은 보코하람 소속을 정확히 분간해냈으며, 활동 1년 후에는 보코하람의 지하조직을 모두 소탕해 마이두구리 시에서 보코하람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새로운 권력을 이용해, 보코하람이 해당 지역에서 퇴각한 뒤에도 보복성 범죄를 저질렀다.

 

수호대인가, 주유소 습격대인가

원유가 매장된 니제르 델타 지역의 ‘수호대’를 자처하는 해적 세력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09년 6월 휴전이 선포되자 이들은 이 틈을 타 유전감시 업무를 담당하는 민병대로 변신한다. 셸과 같은 다국적 기업들의 동의하에 어제의 반란 세력에게 미래의 탈취방해 업무를 맡긴 셈이다. 원래는 2만 명의 ‘수호대’가 명부를 등록한 후, 늦어도 2009년 10월까지는 무기를 반납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휴전협정 관계자 킹슬리 쿠쿠에 따르면 정부의 제안 이후 새로운 기류가 생겼다. 요행을 구하는 청년들이 많아진 것이다. 예정된 기한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2010년 11월, 정부의 재사회화 지원금을 신청한 사람들의 수는 2만 6,000명이었고, 2년 후에는 그 수가 3만 명으로 늘어났다.(11)

그러나 ‘수호대’가 이렇게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원유탈취와 해적들의 습격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니제르 델타 지역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시설 파괴와 재화탈취에 기반을 둔 마피아식 경제 관행에 대해서는 휴전협정에서도 이미 인정한 부분이다. 심지어 이런 행위들이 지역 당국과의 공모 하에 이뤄지고 있다. 어제의 도둑들은 사설경비업체의 형태로 민병대를 자처하며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경비’라는 명목으로 정유시설에 달려들고, 밀반입한 석유 판매수익은 이들의 무기구입을 위한 재정수입으로 활용된다.(12)

이렇듯 총체적 난국에 빠진 나이지리아는 규제역량을 갖춘 중앙정부와 중앙경찰 조직이 있어야만 무수한 분쟁과 갈등이 진정될 수 있다. 따라서 나이지리아 정부는 민병대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을 중앙권력의 직접적인 관리 감독 하에 둬야 한다. 

 

 

글·마르크앙투안 페루즈 드 몽클로 Marc-Antoine Pérouse de Montclos
프랑스 국립개발연구소(IRD) 파리 지부 소속. 저서로 『아프리카, 지하드의 새로운 경계인가 L’Afrique, nouvelle frontière du djihad?』(La Découverte, Paris, 2018)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Rodrigue Nana Ngassam, ‘Le Cameroun sous la menace de Boko Haram 보코하람의 위협 받는 카메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호.
(2) Philippe Leymarie, ‘Une coopération régionale pour s’émanciper de la France 계속되는 지하디스트의 위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7월호.
(3) Carl LeVan, 『Contemporary Nigerian Politics: Competition in a Time of Transition and Terro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년.
(4) Saheed Aderinto, 『Guns and Society in Colonial Nigeria. Firearms, Culture, and Public Order』, Indiana University Press, Bloomington, 2018년.
(5) Gabriel Olakunle Olusanya, ‘The role of ex-servicemen in Nigerian politics’, <The Journal of Modern African Studies>, vol. 6, no 2, Cambridge, 1968년 8월.
(6) Idayat Hassan, 『Human rights status in Nigeria since Obasanjo, second coming』, A. Carl LeVan & Patrick Ukata(지도 및 감수), The Oxford Handbook of Nigerian Politics, Oxford, 2018년.
(7) Wale Adebanwi, 『Authority Stealing: Anti-Corruption War and Democratic Politics in Post-Military Nigeria』, Carolina Academic Press, Durham, 2012년.
(8) Martin Thomas, 『Violence and Colonial Order: Police, Workers and Protest in the European Colonial Empires, 1918~1940』,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2년.
(9) David J. Francis, 『Policing in Africa』, Palgrave Macmillan, Basingstoke, 2012. 아프리카의 경찰 행정에 관한 보다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을 참고. Alice Hills, ‘Police commissioners, presidents and the governance of security’, <Journal of Modern African Studies>, vol. 45, no 3, 2007년 9월.
(10) Otwin Marenin, ‘The Nigerian state as process and manager: A conceptualization’, <Journal of Comparative Politics>, vol. 20, no 2, New York, 1988년 1월호.
(11) Kingsley Kuku, 『Remaking The Niger Delta: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Mandingo Publishing, Surrey, 2012년./ Kathryn Nwajiaku-Dahou, ‘The Niger Delta amnesty: Lessons four years on’, <Nigeria Stability and Reconciliation Programme>, Abuja, 2014년.
(12) Isiaka Alani Badmus, ‘Oiling the guns and gunning for oil: Oil violence, arms proliferation and the destruction of Nigeria’s Niger-Delta’, <Journal of Alternative Perspectives in the Social Sciences>, vol. 2, no 1, Delrey Beach,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