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실용주의 ‘혁명’과 ‘개혁’ 사이

2020-02-28     마엘 마리에트 l 기자

“농업 관련 분야의 기업주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2006년 에보 모랄레스 집권 이후 사업이 훨씬 잘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볼리비아 동부 소규모 농업 생산자 조합의 수장이자 모랄레스 대통령의 측근인 이시도로 바리엔토스 플로레스는 말했다. “2008년 (볼리비아 최대의 경제도시) 산타 크루스가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정부는 농업 관련 분야와 협정(PACT)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볼리비아에서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입니다.”

 

플로레스의 이 말은 모랄레스 정부가 표방하는 정치적 노선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는 수요와 내수 시장 강화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고(참조: ‘En Bolivie, la gauche a-t-elle enfanté ses fossoyeur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9월호), 두 번째는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수도 있는 경제적 주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국부의 증가로 모든 연령대의 국민들에게 (비록 차이가 있을지라도) 혜택을 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볼리비아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모랄레스는 2006년 대통령 첫 당선 이후 두 번이나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몇몇 야심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와 부통령인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가 초기에 내세웠던 사회적 정의가 그렇다. 리네라 부통령은 자신들이 선택한 실용주의적인 노선이 ‘마르크시스트 혁명’에 도움이 되며, “변화가 성공적이고 지속적이려면,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3년 동안 지속된 이 ‘혁명’으로 탄생한 실용주의가 기존의 질서를 바꾼 동시에, 유지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모랄레스 대통령의 화해와 타협 전략은 비공식적 경제와의 투쟁에서 정부가 보여준 미적지근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오늘날 볼리비아의 비공식적 경제는 GDP의 60%와 고용의 70%를 담당하고 있다.(1) 소상공인들은 볼리비아의 서민층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과거 모랄레스 대통령의 당선에 한몫했지만, 정부가 비공식적 경제를 뿌리 뽑는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제한하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지원한 사실은 인정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도로를 건설한 덕분에 새로운 판로가 열렸고, 나아가 내수 시장도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정부에 기댄, 자본주의의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의 불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바로 제품에 대한 세무조사 강화다. 라파스 정육업자 조합의 대표를 지낸 갈로 가릴로는 한탄했다. “우리는 송장을 발행하지 않으면 최대 영업정지 처벌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도매업자들이 우리에게 송장을 발행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부당합니다. 정부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같은 소상공인들의 입장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는 또한 “정부가 세금을 끝까지 올리려 한다면,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2000년대 초반에 신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호르헤 투토 키로가 라미레스 대통령이 육류 도매세를 인상하려 했을 때 우리는 한 달 넘게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국의 정육점들이 물건을 공급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지요. 결국 정부는 무릎을 꿇었고, 세금 인상안을 철회했습니다.” 볼리비아의 경제조직은 소규모 기업들을 중심으로 짜여 있고 그들이 제품 공급 및 유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만큼, 정부가 비공식적 경제와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할 경우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2) 그러나 반대로 이를 포기할 경우에는 엄청난 세수, 그리고 부의 재분배와 투자의 기회를 잃게 된다.

 

대규모 농장주, ‘가나데로’와의 관계 형성 

공무원인 에두아르두 로노프는 “시위의 본래 목적이 변질됐다”라고 비판하면서도, “정부는 대기업을 돕는 데 시간을 소요하기보다는 볼리비아 경제의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소기업의 지역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소기업에 대기업보다 높은 세율이 부과된다는 사실은, 대기업이 ‘특혜’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가치 전도’를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결론은 “국가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정부가 대기업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아마존 지역의 빈곤하고 고립된 베니 주의 상황은, 현재 볼리비아 정부의 양면적인 활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부는 대농장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면서, 때로는 열악한 영세 농민들의 생활 및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동부에 위치한 베니 주는 ‘가나데로(Ganadero)’라고 불리는 대규모 축산농장주들이 장악한 지역인데, 모랄레스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는 정부의 개입이 대폭 늘어났다.

“동부의 대농장주들은 노동자를 여전히 노예나 소작농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 정부의 노동부가 이 지역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팀은 우선 대농장에 침투해 노동자들의 겪는 문제를 파악한 후, ‘가나데로’들을 직접 만납니다. 그들과의 면대면 협상을 통해 적절한 해결책을 찾고, 노동법 준수 및 농민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2018년 한 해만 해도 베니 주 노동자들이 제기한 소송이 1,152건이나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환수한 돈이 865,314 볼리비아노(약 11만 200유로)에 이릅니다. 과거에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식하지 못했고, 농장주들 또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베니 주 노동감시청의 대표인 카를로스 하비에르 카베로가 설명했다. 사회학자인 윌더 몰리나는 “볼리비아 정부가 베니 주에 물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이렇게 깊게 개입한 적은 이제껏 없었다”라고 단언했다. 2006년 이전까지 지방의 요직을 독점하던 가나데로들은, 초기에는 정부의 갑작스러운 개입과 정부가 추진하는 다국적 프로젝트에 반발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상황은 많이 개선됐다. 정부는 “농장주들 및 기업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고, 긴밀한 관계 형성에 성공했다”라고 밝혔다.

코카 재배 조합장 출신이 대통령직에 오르자 영세 농민들도 혜택을 보게 됐다. 사실상 중요한 유권자층인 이들을 위해 정부는 재배환경 개선을 위한 여러 방안을 마련했다. 농기계, 트랙터, 비료, 종자, 번식용 가축을 제공했으며, 동부 지역에 관개 시설을 설치하고, 생산품을 판매지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도록 도로와 교량도 건설했다. 2007년에 설립된 ‘생산개발은행’은 모랄레스 정부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생산개발은행 덕분에 영세 농민들과 농업 생산자들은 저금리로 쉽게 대출을 받고 농업 주기에 맞추어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게 됐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전에는 대출이 어려웠어요. 토마토 농사가 풍작이었다가 흉작이었다가 들쭉날쭉했기 때문입니다.” 라파스 주 남쪽의 콜라 공동체에 소속돼 있는 발레리 마마니가 설명했다. “토마토는 날마다 가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 대출 상품은 저희 상황을 고려해 지불 기한이 정해지지요. 금리도 낮고요.” 동부의 몬테로에서 소규모로 옥수수를 재배하는 세르지오 페르난데스에 의하면, 5년 전에 만들어진 법 덕분에 중소 농업 생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금융기관의 대출금리가 1/3로 줄었다. 또한 “이 법은 은행자본의 60% 이상을 대형국가 프로젝트를 위한 대출과 임대주택 건설에 할애”하도록 하고 있다.

농민들을 위한 지원은 비단 물질적인 부분에만 그치지 않는다. 2007년 정부는 ‘농산물생산지원기업(Emapa)’을 설립, 중소 농업생산자들로부터 좋은 가격에 농산물을 사들여 내수 시장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농업 관련 업체들도 그들에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도록 관리하고 있다. Emapa의 부대표인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는 말했다. “정부는 규칙을 정해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소규모 생산업체들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면, 농업 관련 분야의 관계는 힘의 균형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이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할 것이며, 결국 그 혜택은 모든 이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Emapa는 또한 볼리비아 농산물의 내수 및 해외시장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산타 크루스 지역 조직을 이끄는 호르헤 기옌은 설명했다. “최근 소고기의 경우처럼, 내수 시장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남는 농산물에 대해서는 관세 없이 수출이 가능합니다. 자연스럽게 대규모 생산업자는 수출을, 소규모 생산업자는 내수 시장을 주로 담당하게 되지요.” 그는 “대규모 생산업자가 결국 이득을 보게 된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볼리비아의 농업 관련 업체들은 지금도 이미 과잉 생산분을 중국이나 유럽에 수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빈곤을 재분배하지 않는다”

이 정책들은 영세 농민과 소규모 농산물 재배업자의 생활환경과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지만, 2009년 국민투표에서 약 80%의 찬성표를 받아 추진됐던 농업개혁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농업개혁의 목적은 대규모 농장 시스템, ‘라티푼디즘(Latifundism)’을 뿌리 뽑는 것으로, “경제적•사회적 능력”이 없는 소유주에게 허용되는 농장 면적을 5,000ha 이하로 제한하고 나머지 면적은 땅이 없는 농민과 원주민에게 분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헌법 개정까지 요구하고 나선 대농장주들의 극심한 반발에 의해, 정부는 2009년 농업 관련 분야와 협정(pact)을 맺었다. 그리고 영세 농민과 원주민이 일정 기간 직접 재배 활동을 한 땅에 대해서는 토지 명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정도에서 타협했다.

Emapa 부대표의 조언자로서 비공식적으로 큰 역할을 한 라울 가르시아 리네라는 볼리비아 정부의 타협 전략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부는 대단히 실용주의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문제없이 일이 진척되는 걸 볼 때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지요. 물론 일이 잘 진행되는 것과, 상황이 완전히 좋다는 것은 다릅니다. 농업 개혁은 사실상 성공하지 못했지만, 삶의 조건이 향상됐습니다. 농민들의 상황과 생산 환경이 개선됐고, 국부도 증가했습니다. 성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정부가 노동법, 세법, 상속법은 전혀 개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리네라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부는 이 민감한 주제를 이미 처리했습니다. 물론 협상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지만요. (2009년에 개정된) 헌법이 그 예입니다. 정부는 개정법의 승인을 위해 우파와 협상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추가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승인된 개정법은 처음에 제헌의회가 제안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힘이 있고, 우리는 때때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헌법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적 지향 및 성별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2013년 개정된 헌법은 개인이 자신의 성별을 스스로 결정해 신분증에 기재하도록 할 만큼 진보적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리네라가 말한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힘’은 경제 분야에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서민층’에 속하는 영세 농민들과 소규모 생산업자들, 그리고 ‘기득권층’인 대규모 농장주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리비아 정부는 농업 생산 증대와 외부 의존도를 최소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듯하다. 나아가 농업 생산 증대를 통해 국부를 키우고, 내수 시장의 수요를 활성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부의 이런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될 경우, 정부는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실행할 수 있게 되며, 국가 경제는 역동성을 회복할 것이다. 실제로 볼리비아는 경제발전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정책들을 실행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정부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60세 이상 노인을 위한 Renta Dignidad(노령 연금),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임산부와 만 1세 미만 영아의 의료비 일체를 지원하는 Bon Juana Azurduy(혁명가 Juana Azurduy de Padilla(1780~1862)의 이름에서 따옴),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경우가 없도록 초•중등생 자녀를 둔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Bon Juancito Pinto(태평양전쟁(1897~1884)에서 활약한 아동 영웅의 이름에서 따옴), 그리고 2019년 3월에 도입된, 볼리비아 국민들에게 모든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Sistema Único de Salud(SUS) 등의 정책이 그것이다.

사회적 갈등까지 ‘해소’시킬 수 있다는 이 생산제일주의에 대해, 2006년부터 볼리비아의 재무부 장관직을 맡고 있는 루이스 아르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볼리비아 경제모델의 설계자로도 불리는 인물이다. “우리는 빈곤을 재분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를 재분배합니다. 정부가 추진한 생산제일주의 경제모델의 최대 미덕은, 볼리비아 국민들에게 재분배되는 파이의 크기를 키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볼리비아 국민 다수를 위한 파이 조각이 얼마나 더 커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심 많은 소수를 위한 파이 조각도 계속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글·마엘 마리에트 Maëlle Mariette
기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Mujeres y hombres en la economia informal : un panorama estadistico>,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u travail (OIT), Genève, 2016 / Leandro Medina, Friedrich Schneider, <Shadow economies around the world : What did we learn over the last 20 years ?>, IMF, Washington, DC, 2018.
(2) 일례로, 라파스의 변두리에 위치한 엘알토는 최근 급성장 중인 도시인데, 엘알토 소재 기업의 90% 이상이 직원 수가 4명 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