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시대, 그들을 학습하라

[Corée 특집] MB노믹스, 빈곤에서 살아남기

2011-03-11     강수돌/캐나다 토론토대학 방문교수

1. 자본에 의해 파괴되는 삶

지난해 3월 10일, 이른바 명문대 인기학과 대학생 김예슬씨가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가 되기를 거부하며 자퇴 선언을 했다. 자본과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살다 재만 남는 헛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삶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그 직후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생계를 좇아 삶을 전전하던 김영경씨는, 100만 청년 백수 시대를 맞아 더는 자본과 권력에 기댈 것이 없다고 판단해 ‘청년유니온’을 만들었다. “청년이 만들면 세상은 드라마가 된다”며 15살 이상 39살 이하의 청년층을 주인공으로 하는 조직이다.

지금도 각급 학교에선 아이들이 명문대 입시를 위해 모든 열정을 쏟는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서 또 심신이 지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미칠 지경이고 어른들은 학비 대느라 생지옥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스펙’(학력·학점·토익점수 등)에 목숨 걸며 확률 낮은 취업을 준비한다.

만약 해마다 대학생 60만 명이 진정 부모나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 ‘제2의 김예슬’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다. 설사 무난히 졸업장을 받고 세상에 나온들 세상은 어떤가? 대한민국 최고 인재 그룹이라는 사법고시 합격자, 그것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이들 중 절반 정도는 오갈 데 없는 신세일 정도이니 말 다했다. ‘오륙도’와 ‘사오정’을 넘어 ‘삼팔선’과 ‘이태백’이 현실이다. 이 모두는 지금까지의 공식, 즉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면 멋진 인생이 펼쳐진다는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알린다. 프랑스 작가 V. 포레스테가 <경제적 공포>에서 설파한 것처럼 이제 우리는 자본과 권력이 퍼뜨린 ‘완전 고용’ 신화와 결별해야 한다.

더군다나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의 사례를 보라. 4800만 명이 사는 대한민국, 그중 약 2500만 명이 취업자로 돈벌이 경제활동을 하는 상황, 그중 노동자는 약 1600만 명, 또 그중 비정규직은 약 900만 명이다. 갈수록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은 는다. 문제는 단순한 비중 전환이 아니라 삶의 황폐화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니, G20 개최국이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 달러이니 하지만 사람들의 구체적 삶의 현실은 갈수록 척박하다. 그 가운데 비정규직은 ‘신종 노예’다. 해마다 고용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일종의 ‘일회용 노동력’이다. 원청회사와 하청회사의 농간 사이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온갖 인간적 수모를 겪는다. 그것조차 ‘파리 목숨’이다. 홍익대 노동자들은 지난 1월 초부터 2월 22일까지 무려 49일간 투쟁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확보한 것이 ‘우리를 자르지 말고 비정규직으로라도 계속 써달라’는 것이다. 목숨 걸고 싸운 결과치고 초라하기 짝이 없고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만큼 절실한 것도 없다.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지랴?

그렇다면 정규직은 어떤가? ‘정규직’이란 말도 좀 황당하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보면 정규직이란 ‘자본 관계에 의해 정식으로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정규직이 자본의 해고 위협에 맞서 방패막이로 비정규직을 허용했다. 자본 입장에서는 ‘분할 지배’ 전략에 성공했다. 처음엔 비정규직이 무너지지만 나중엔 정규직조차 해고 위협을 받는다. 최근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라. 천문학적 흑자 기업조차 상시적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것은 삼성이나 현대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2월 26일, 한진중공업에서는 강력한 노조투쟁으로 회사 쪽의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뒤 3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해고됐고, 설계실이 폐쇄됐으며, 울산공장이 폐쇄됐다. 부산 다대포 사업장도 위험하다. 300명이 넘는 노동자가 강제휴직을 당했다. 명퇴 압박에 시달리던 박범수·손규열 노동자는 실직 스트레스에 목숨을 잃었다. 그 와중에 회사 쪽은 또 400명의 정규직을 자르겠다고 나섰다. 한편, 한진 회장님과 그 아들은 배당금 176억 원으로 질펀한 잔치를 벌였다. 한쪽에서는 생계를 위한 사투를 벌이는데 다른 쪽에선 ‘돈잔치’다. 두 대립적 장면은 단순한 병렬이 아니라 전자의 희생 위에 후자가 가능함을 보인다. 같은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25년 전 해고된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지난 1월 6일 새벽, 40m 높이 크레인에 올라가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 모든 사태는 결국 하나의 경향성에 기초한다. 그것은 이윤을 무한 축적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탐욕이다.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무한으로 추출하는 파괴성의 작동이다. ‘죽임’의 경향성, 이것 또한 일정한 양보와 타협이 가능하던 예전(제국주의 시대 선진국 중류 이상 노동자, 신제국주의 시대 선진국 대다수 노동자 및 후진국 중류 이상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 안정 및 복리 후생 등 물질적 보상)과는 달리 갈수록 이윤의 토대를 상실하는 자본의 마지막 몸부림을 반영한다. 이런 면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노래하는 ‘역사의 종말’ 선언이 아니라, 어쩌면 자본주의가 더는 목숨을 잇기 어렵다는 ‘종말의 시작’ 선언인 셈이다.
 
2. 생동하는 주체화 양식
그렇다면 과연 사람들은 척박한 현실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주체화될까? 척박한 현실에서 나름의 대안을 찾아가는 주체의 느낌, 생각, 행동을 차분하게 살펴보자. 여기서는 전술한 세 사례에 주목한다.
 
김영경씨의 ‘청년유니온’
지난해 3월, 청년유니온을 설립한 김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뼛속 깊이 체험했다. 아버지가 건설 노동자라 생존 투쟁의 고통을 몸으로 느꼈다. 대학 시절 월 40만원 급료에 혹해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학원강사가 직업이 되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엔 강사들이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학원을 끊지 말라며 감정노동까지 수행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한 선배에게서 일본 수도권의 청년유니온 이야기를 들었다. 청년의 취업과 생활 문제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가 일본에 있고, 한국에도 그런 단체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선배 말을 듣고 나서 ‘이거다’ 싶었어요. 내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나와 같은 문제를 가진 청년들에게 돌파구이자 희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선배를 통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수소문했어요.” 김씨와 뜻을 같이한 동료들은 2009년 5월 창립 준비 모임을 만들어 지난해 3월 13일 창립식을 열었다. 3월 18일,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냈다. 노동부가 여러 차례 반려하자 청년유니온은 소송도 불사하며 공인을 요구한다.

청년유니온 사례는 실천 행위로의 주체화와 관련해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현실의 구체적 체험과 성찰이 주체화의 기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기존 사회나 어른이 말하는 ‘현실 적응’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선택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하기’ 위해 나선다. 셋째, 선진 모범 사례의 간접 경험은 내재적 동기 부여에 거름이 된다. 넷째,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 대리인처럼 도와주기를 바라기보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야 한다. 다섯째, 자신의 욕구와 소망을 적극 알리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소통과 연대가 힘이다.
 
홍익대 청소 노동자 사례

비정규직 운동의 구체적 사례로 제시된 홍익대 투쟁은 현재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 등으로 확산 중이다. 홍익대 사례가 완강했던 대학 당국의 경직성을 이기고 49일 만에 절반의 성공이나마 거둔 배경엔 주체화와 관련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 총학생회가 농성을 시작한 노동자들을 향해 “학생의 환경을 지켜주셨던 노동자분들이 아닌 외부세력의 학내 점거나 농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유라도 반대하는 입장”이라며 “학생들의 편의나 학습에 지장을 주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사회적 공분과 연대감을 더욱 조장했다. 둘째, 그런 상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에서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사회적 관계망 기술이 생산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배우 김여진씨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했다. 셋째, 청소 노동자들이 대부분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분이어서 고통의 공감대가 쉽게 이뤄졌다. 넷째, 대학과 같은 사회적 공익기관이 비싼 등록금을 받으면서도 수익성만 추구하는 행태에 비판과 분노가 주체화를 확장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 사례

합법적으로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해도 노조와 사전 협의, 해고 회피 노력, 대상자 선정의 공정 기준 등을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음에도 자본 간 경쟁 격화와 자본가의 무한 탐욕 때문에 ‘흑자 기업’조차 상시적 구조조정, 특히 노조 탄압과 해고를 일상화한다. 50살이 넘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는 것은 그가 25년 전 같은 회사에서 해고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편지글은 운동의 주체화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해고의 압박이 가슴을 짓누르는 시점에서 그는 새해 첫 출근날 이불을 들고 출근하는 노동자를 보고 그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부인의 마음도 읽었다. 고통의 한가운데서 번민하는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연대의 토대이자 주체화의 출발점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합의를 팽개친 회사에 대한 배신감, 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하면서 자기들끼리 돈잔치를 하는 경영진에 대한 분노, 부당함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 등이 주체화를 앞당겼다. 셋째, 같은 노동자로서 일체감을 느끼던 동료들이 잘려나가는 것을 고통스럽게 보다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판단한 것도 중요하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함, 비록 패배할지라도 먼저 굴복할 수 없다는 ‘저항의 미학’, 운명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우리 자신이라는 자기책임성 등이 주체적 생명력의 핵심이다. 넷째,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했다.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주체적 생명력은 자유롭게 분출된다. 다섯째, 그가 “쌍용차는 옥쇄파업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니라 명단이 발표되고 난 이후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져 투쟁이 힘들어진 겁니다”라고 강조하듯이, 단결과 연대만이 살길이다. 자본의 논리가 분열과 경쟁이라면, 노동의 논리는 단결과 연대다. 그것을 위해 ‘나부터 먼저’ 나선다.
 
3. 삶의 주체화- 내면과의 재접촉 필요

결국 죽임의 현실을 뚫고 생동하는 주체의 연대를 바탕으로 신바람 나는 새 세상을 열려면, 객관적 조건의 성숙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더 이상 시스템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독자적 생명력의 분출이 필요하다. 과연 생명력의 분출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내면(예를 들면,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에 대한 느낌)과 정직하게 접촉함으로써 현실(구조)의 모순과 갈등을 회피하거나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대면하는 데서 출발한다. 생계가 아니라 생활, 생존이 아니라 생명 해방에 대한 갈구가 개인적 주체화를 이끈다. 그렇게 출발한 주체적 생명력이 소통과 연대, 공감과 공유를 통해 자아의 확장을 경험할수록 두려움이 사라지고 집단적 주체화가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선진 모델이나 사회적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 여론의 리더도 필요하다. 그 투쟁(주체화)의 과정 속에서 대안적 해결책이 무수히 토론되고 실험된다. 완벽한 대안 설계도가 있어서 투쟁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투쟁하면 대안 설계도를 하나씩 전진시켜 나아간다. 비록 실패와 좌절이 따를지라도 굴종과 예속을 거부하는, 삶의 진정한 주체화 없이 희망도 미래도 없다!

글•강수돌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이자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신안1리 이장, 사회공공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공저·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