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영화의 검열, 그리고 시간과 왈츠를!

2020-02-28     베르나르 아이젠슈이츠 l 영화사학자

베를린 장벽 반대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추하게 여긴 서독은, 1990년 이후 동독의 문화 인프라를 파괴했다. 검열 속에서도 새롭고 혁신적인 형식의 영화들을 선보였던 동독 영화주식회사(DEFA)도 함께 파괴됐다. 

 

1965년 12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구 내에서 독일 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통합해 동베를린에서 창설한 정당-역주)은,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당시 막 개봉한 두 편의 극영화가 “자유주의·비관주의·회의주의를 사칭하고 있다”라고 규탄했다. 또한, 국영 영화사인 동독 영화주식회사(DEFA)가 당시 제작 중이던 영화 10편의 상영을 금지했다. 이는 DEFA의 연간 영화제작 편수에 맞먹는 수치였다.(1) 이로 인해 소련과 유럽의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던 대폭적인 영화혁신 운동은 동독에서 자취를 감췄고, 영화인들과 국가권력 사이의 상호불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독일민주공화국(GDR, 동독)의 40여 년 역사 동안 영화검열은 계속됐다. 검열의 이유도, 검열에 관여한 기관도 다양했다. SED의 정치국과 중앙위원회, 그리고 DEFA의 담당 부처인 문화부가 영향력을 행사했다(국가평의회 의장 발터 울브리히트가 직접 영화를 검열했다).(2) DEFA 내부의 위계질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프랑크 바이어 감독이 유렉 베커의 소설 『제이콥의 거짓말』을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는 TV영화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는데, DEFA가 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후 DEFA가 결국 배급을 맡아 극장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DEFA의 영화 중 드물게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소련도 영화검열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콘라트 볼프 감독의 <태양을 쫓는 사람들>(1958)은 소련의 압력으로 13년 동안 상영이 금지됐다. 이웃 나라 폴란드도 동독 영화들을 예의주시했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도 검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장 가뱅이 공동제작한 <레 미제라블>(1958)은 대본의 삭제 및 수정 작업을 거쳐 예정보다 1년 늦게 프랑스에서 상영됐다. ‘글라스노스트(Glasnost, 투명성, 공개를 뜻하는 러시아어. 소련이 1985년에 실시한 개방정책-역주)’ 정책 주도로 만들어진 소련 영화들도 1988~1989년 동독 내 상영이 제한됐다.

DEFA의 전신(前身)인 만국영화주식회사(UFA)는 민영으로 출발했으나, 나치 정권 시절 국영으로 전환된 영화사다. DEFA는 1946년 설립 당시 UFA의 대규모 촬영 스튜디오, 필름 현상소, 영화 기술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관습 또한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결과, 그 유명한 바벨스베르크의 DEFA 스튜디오는 UFA와 소련 국영 영화사인 모스필름(Mosfilm)의 전통적인 제작방식을 고스란히 이어갔다. 누벨바그 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DEFA의 초창기를 이끈 감독들에게는 오히려 이 점이 이롭게 작용했다. 

1933년 이전 연극과 영화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공동 작업을 했던 슬라탄 두도브나, 영화 <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다>(1946)의 볼프강 슈타우테가 대표적인 수혜자다. 하지만 창작활동에 걸림돌이 된 요소도 있었다. 특히 당국의 간섭 때문에 영화감독들은 국가 비전에 부합하는 주제를 선택하거나, 문학작품을 관습적으로 각색한 영화에 만족해야 했다. 영화제작의 모든 과정이 통제됐고, 시나리오의 쉼표 하나까지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시나리오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됐다.(3) 1965년 당시 이미 DEFA의 극영화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관객들은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았다. 1965년 SED 중앙위원회 총회 이후 한 체코 영화감독은 “1년 치 영화가 모두 상영 금지됐지만, 관객들은 이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4)

 

금지된 영화들의 혁신적 기법

하지만 동독 영화를 상투적인 정치선전의 연장으로만 간주하면 곤란하다.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문화에서 그렇듯, 창작자들의 열망과 정점에 달한 담화는 서로 다른 변화의 길을 갔다. 완성된 상태에서 상영이 무산되거나 1990년 전후로 다시 제작된, 1965년 금지됐던 영화들은 대단히 혁신적인 작품들이었다. 감독들은 신사실주의적 촬영 규범을 답습하는 대신, 현지촬영과 야외촬영을 진행했다. 브레히트가 창단한 극단인 베를리너 앙상블 출신 배우들을 비롯한 뛰어난 배우들을 기용했으며, 경직된 위계질서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사회주의적 발상의 쇄신을 촉구했다. 

동독 영화들은 자유로운 대사로 당시의 사회상과 근로현장의 위계질서를 다뤘다. 정치적인 주제는 형식주의(내용이나 주제보다 형식과 테크닉에 더 큰 비중을 둔 사조)로 대체했다. 또한, 영웅 또는 범인(凡人), 관습에 젖거나 본연의 이상에 충실한, 또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보유한 공산주의자처럼 상반된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프랑크 바이어의 <돌의 흔적>에 나오는 현장 감독과 귄터 클라인의 <베를린 모퉁이에서> 속 청년들은 당 지도부와 공장 간부들에 ‘무정부주의적’ 행동으로 맞선다. 

1972년 발표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새로운 슬픔』으로 명성을 얻는 울리히 플렌츠도르프가 쓴 최초의 시나리오로 제작된 헤르만 지쇼체 감독의 <칼라(Karla)>의 주인공 젊은 여교사는 ‘사회주의 옹호’라는 미명하에 역사 왜곡을 장려하는 교육을 거부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위르겐 뵈처의 작품 <1945년생>에서는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방황하는 삶을 다룬다. 뵈처는 권력 기관이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직 인물의 얼굴과 몸, 그리고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도시의 풍경에 집중했다. 동시대 누벨바그 영화 중 이 정도로 철저하게 극적인 요소를 배제한 작품은 드물다.

1965년의 금지 영화들의 감독들이 모두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다. 일부는 자기비판을 강요받았고, 일부는 영화사에서 쫓겨났다. 단순한 질책 정도로 그친 이들도 있다. 뵈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회귀했다. 지쇼체는 “금지라는 상처가 아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라는 회고의 글을 남겼다. 1965년 이후 DEFA는 ‘이데올로기의 회복’을 위해 일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했는데, 주로 해소하기 쉬운 갈등만을 다룬 단순한 감정극이었다. 영화인들은 이런 영화들을 “사회주의 멜로드라마”라고 불렀다.(5) 

콘라트 볼프 감독의 <나는 19세였다>(1968)는 예외다. 32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는 DEFA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어린 시절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6) 19세가 되던 해 ‘붉은 군대(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의 약칭. 1946년 2월 25일 이전의 소련의 정식 군대-역주)’의 ‘파견 문화 장교’가 돼 독일로 돌아온 볼프는 전쟁 막바지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건들을 이 영화에 담았다. 유대인 강제수용을 다룬 <다윗의 별>, 나치즘이 남긴 흔적을 조명한 <엄마, 나 살아 있어요>, 독일의 당시 상황을 반영한 <갈라진 하늘>과 <벌거벗은 운동장의 남자> 등 볼프의 영화들은 모두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감독이자 공직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토론가이자 교수였으며, 소련과 독일 두 국가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지닌 볼프는 동독 문화의 양심으로 남아있다. 

 

검열이 아닌, 시간의 힘에 쇠약해지다

지쇼체, 하이너 카로프, 에곤 귄터와 같은 감독들과 베커, 플렌츠도르프와 같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동독의 현실을 거짓 없이 보여주려 끝까지 노력했지만, 1965년의 금지 영화들에서 느낄 수 있던 기세와 힘은 시간이 흐를수록 쇠약해졌다. 검열에서 벗어난 후에도 여전히 소극적인 ‘시민 영화’가 주를 이뤘다. 카로프 감독의 <러시아인이 온다>(1968), 라이너 지몬 감독의 <야두프와 보엘>(1980)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후 영화의 성공은 독일의 정치적 발전의 반영요소 중 하나인 여주인공들이 좌우한다. 에곤 귄터 감독의 <3번째 남편>(1972)에서 ‘의식 있는 시민’인 여주인공은 3번째 남편을 찾아 나선다. 카로프와 플렌츠도르프가 공동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인 <바울과 바울러의 이야기>(1973)에서는 관습에서 벗어나 육체적 욕구를 받아들이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지쇼체 감독의 <일곱 주근깨>(1978) 속 여주인공은 첫사랑을 경험한다. 여름 캠프를 배경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변주한 이 작품은 독일의 구시대적인 미풍양속에 일격을 가하며 110만 관객을 동원한다. 콘라트 볼프 감독의 마지막 작품 <솔로 써니>(1979)의 여주인공은 노동자에서 순회공연 가수로 성공한다. 이후 다시 인생의 길을 잃고 헤매지만, 계속해서 꿈을 찾아 나선다.  

극영화는 끝까지 검열로 위축된 감독들과, 용기를 내 검열에 맞선 감독들로 나뉘었다.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의 대화를 담은 로트하르 바르네케 감독의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1988), 동성애를 다룬 카로프 감독의 <커밍아웃>(1989) 등 과감한 주제를 선택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때늦은 용기였다. 하이너 카로프 감독의 “되돌릴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말처럼,(7) 영화와 극본이 불태워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늙고 쇠약해졌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극영화와는 다른 길을 갔다. 1960년대에 들어서 다큐멘터리 영화는 동독 영화의 주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뉴스영화 제작 경험으로 집단작업 방식에 익숙했던 노장 감독 카를 가스는, 젊은 영화인들에게 가벼운 소형 촬영 장비로 인내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촬영하는 방식을 장려했다. 라이프치히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리처드 리콕과 크리스 마터를 비롯한 혁신적인 감독들의 참여로 다양한 정치영화와 정보영화를 소개하는 장이 됐다. 신인 감독들은 DEFA의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재능을 꽃피우고, 과도한 편집과 해설에 얽매인 ‘문화영화’의 형태에서 벗어나 더욱 생기 넘치는 시선을 추구했다.

발터 헤이노위스키와 게르하트르 슈만 2인조는 동독 수립 이후 잊힌 주제인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을 이어갔다. 두 감독은 서독과 여전히 건재하던 국가사회주의와 서양 제국주의를 극명한 선전주의 기조로 비난했다. 칠레와 캄보디아에 대한 각각의 연작 다큐멘터리와 서독인을 가장한 잠입 취재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을 인터뷰한 <나는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시공간을 관통해 담아낸 삶의 여정들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들은 동독이라는 신생국가의 시공간적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연극 이론, 희곡 연출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들의 영화는 동시대 독일 국민들에게 노동자 계층과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자 했다. 뵈처의 <서기관>(1967)은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한 공산당 관리가 노동자들과 같이 보내는 일상을 관찰했다.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뵈처는 <세탁하는 여자들>(1972), <철도 선로 변경원>(1984), <요리사>(1987)에서 현장음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인내심 어린 관찰을 통해, 길게 이어지는 촬영기법을 채택했다. 이런 방식으로 감독의 개입을 배제하고, 의도적으로 해설을 없애며 오직 인물의 직업과 움직임, 표정에 집중한 관찰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다.

젊은 감독 폴커 쾨프는 뵈처와 반대로 자신의 작품에 직접 출연해 다른 출연자들과 1인칭 화법으로 대화를 나눴다(1973년 <사르마티아의 구원> ~ 2013년 <사르마티아에서>). 쾨프는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평원을 가로질렀다. 사르마티아인들이 고대에 살았었고, 전쟁과 민족들의 이주로 얼룩진 역사를 거치는 동안 중간지대 역할을 했던 이 지역을 가상의 조국이자 새로운 세기의 축소판으로 여긴 것이다. 쾨프는 이곳 ‘엘베강 동쪽’에서 촬영한 <골동품 가게>(1992)에서, “골동품상과 가이드가 넘쳐나는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나라 동독이 팔려나가고 있다”라고 증언했다. 공간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쾨프의 사적인 기억과 그가 인터뷰했던 이들의 기억, 당대의 현안들과 교차하고 있다. 

이처럼 시간을 관통하는 여정은 동독 다큐멘터리 영화의 고유한 특징이다. 동독 감독들은 어느 특정한 장소, 도시, 공장, 고등학교, 또는 특정한 인물집단을 긴 시간에 걸쳐 관찰했다. 가장 오랜 기간을 들여 촬영한 작품은 1961년 골조브의 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1961~1979년과 이후 2007년까지 19편에 걸쳐 담아낸(8) 빈프리드 융에의 다큐멘터리다. 

폴커 쾨프의 <비트슈토크의 어린 소녀들>은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한 농업지역에서 23년 동안 촬영됐다. 토마스 하이제 감독은 영화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영화 필름들을 병에 담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20년 후 재조명된 이 영화들에서 우리는 아이젠휘텐슈타트와 베를린 시민들의 녹록지 않은 삶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동독이라는 작은 나라의 현재와 근접한 과거의 기억을 증언하며 ‘사회주의는 긴 시간 동안 관찰했을 때만 현실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동독에는 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DEFA는 독일 화폐 통합직후 민영화됐다. 이후 6년 동안 독일 신탁청(구동독 국유재산의 민영화를 관장했던 기관)의 감독 아래 서독 출신 영화인 폴커 슐렌도르프의 지휘로(9)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용역작업 또는 공동제작 영화사로 전락하여 겨우 명맥을 이어 갔다. 하지만 소속 영화감독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DEFA를 떠나 방송국에서 일하거나 후학을 양성 중이다. 

 
 

글· 베르나르 아이젠슈이츠 Bernard Eisenschitz
영화사학가. 주요 저서로 『Fritz Lang au travail(프리츠 랑 작품집)』 (Cahiers du cinéma, 파리, 2011년) 등이 있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Ralf Schenk, 『Eine kleine Geschichte der DEFA: Daten, Dokumente, Erinnerungen』, DEFA-Stiftung, 베를린, 2006년.
(2) Cyril Buffet, 『Défunte DEFA. Histoire de l’autre cinéma allemand 고(故) DEFA. 또 다른 독일 영화의 역사』, Le Cerf–Corlet, 파리–콩테 쉬르 누아로, 2007년; 폴커 쾨프의 증언, <Sammelsurium>, 1992년, 
(3) Jürgen Bretschneider와 Rolf Giesen의 에세이, Wolfgang Jacobsen (ed), 『Babelsberg. Ein Filmstudio, 1912~1992』, Argon, 베를린, 1992년,
(4) Wolfgang Gersch 인용, Wolfgang Jacobsen, Anton Kaes and Hans Helmut Prinzler(eds.), 『Geschichte des Deutschen Films』, J.B. Metzler, 슈투트가르트, 1993년.
(5) Herrmann Zschoche, 『Sieben Sommersprossen und andere Erinnerungen』, Das Neue Berlin, 2002년.
(6) 콘라트 볼프는 소설가이자 공산주의 드라마투르그(dramaturg)인 프리드리히 볼프의 아들이자, 동독 해외 정보국 지도부였던 마르쿠스 볼프의 형제다. 마르쿠스 볼프는 콘라트의 마지막 자전적 작품에 『La Troïka 트로이카』라는 책을 헌정했다.
(7) 1990년 1월 19~21일, 파리 그랑드 알 드 라 빌레트 전시장에서 열린 ‘L’Autre Allemagne hors les murs 장벽 넘어 또 하나의 독일’ 전시회에서 한 말이다. 
(8) 1980~1981년 제작된 5편은 Arte 방송국에서 <Lignes de vie 삶의 선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 전체 에피소드의 제목은 <골조브의 아이들>이다.
(9) Volker Schlöndorff, 『Tambour battant 북을 울리며』, Flammarion, 파리,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