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엘리트 위한 만찬 ‘르 시에클’

2011-03-11     프랑수아 드노르·폴 라뇨이모네·실뱅 틴

1956년 냉전이 한창일 때, 사회학자 찰스 밀스의 책 한 권이 미국 사회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책 <파워 엘리트>는 민주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실제로는 현대의 새로운 권력기관(정부·대기업·군대·언론 등)의 최고위직을 차지한 몇몇 개인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는 ‘파워 엘리트’의 범위를 규정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한다. “고위층 인사는 일종의 파벌에 속해 있다. 내부적으로 하위 조직을 가진 파벌은 외부적으로도 다른 파벌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1)

현대 프랑스에서는 이런 현상이 훨씬 단순하게 드러난다. 매달 한 번, 수요일 저녁 8시에 프랑스자동차클럽(ACF)의 럭셔리한 살롱에 가면 테이블에 둘러앉아 ‘세기의 저녁’을 즐기는 파워 엘리트들을 볼 수 있다. 이 모임의 전 회장은 음식 맛이 별로라고 귀띔했지만(2) 중요한 건 뭘 먹고 마시느냐가 아니다. 이곳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장루이 베파는 생고뱅의 최고경영자(CEO)를 거쳐 라자르은행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르 시에클’의 저녁 식사에 가는 이유는 권력 때문”이라고 말한다.(3) 물론 대의권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이들의 권력은 대의권력과 폭넓은 관계를 맺고 있긴 하다). 이들은 매달 한 번씩 콩코르드 광장의 살롱에 모여 연회를 즐긴다. 바로 센강 건너편에는 국회의사당 건물이 서 있다.

친분·취향 대신 ‘지위’로 모여

1944년 창립된 ‘르 시에클’(Le Siècle·‘세기’라는 뜻)은 싱크탱크도 아니며 사교모임도 아니다. 기업주, 언론인, 정치인, 정부 고위층, 경우에 따라서는 대학교수나 예술가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다. 정치적 논쟁이 아닌 합의 도출이 목적이다. 친분이 있거나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는 게 아니다.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기준이 된다.

이 모임을 처음 주도한 사람은 조르주 베라르켈랭(1917~90)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1940년 친독일 성향의 신문 <라 프랑스 오 트라바이>(La France au Travail)의 편집국에서 근무하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전향한다.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니셜 ‘BQ’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창립한 언론사 ‘소시에테 제네랄 드 프레스’의 간행물 제호(<Le Bulletin Quotidien>)도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같은 이니셜을 달고 있다. 베라르켈랭은 이 두 조직을 수단으로 프랑스의 각계 인사들(정치인, 정부 고위층, 언론인, 산업·금융 자본가)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했다.

그는 한편으로 르 시에클을 통해 권력자들이 자신이 속한 산업·금융의 조직 체계와 행정 서열 체계, 정치적 신분 등을 떠나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주선했다. 신입회원 영입을 통한 세대교체도 이루어졌다. 간행물 <BQ>를 통해 회원들에게 정치·경제 현황에 대한 ‘다이제스트’를 제공했다. 처음엔 다소 어색한 친목모임의 값비싼 회원 정보지 구실을 하던 <BQ>는 점차 일반 언론인, 정부 관리, 고위 정치인과 경영인까지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좌우 불문, 정치·경제 거대 인맥 형성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심각한 분열을 겪었다. 레지스탕스 출신들과 대독협력자 혹은 비시 정부 지지자, 평판이 나빠진 기업가와 정부의 경제계획 책임자가 서로 대립했다. 당시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이던 공산당과 서로 분열하는 여타 정당들의 대립 역시 존재했다. 베라르켈랭과 협력자들은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엘리트들을 화해시키려 애썼다. 그의 노력은 일정 부분 결실을 거뒀다. 제5공화국 시기에 정부 인사 중 20%였던 르 시에클 회원 비율은 1978년에는 58%에 달했다.(4) 그 뒤로는 꾸준히 40% 정도에 머물고 있다. 이 비율은 좌파연립정부(1997~2002) 시기나 니콜라 사르코지가 정권을 잡은 이후(2007~ )나 별 차이가 없다.

베라르켈랭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친구 피에르 무사가 표했던 조의는 일종의 자축이었다. 피에르 무사는 금융 감독관에서 금융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인물이다(1982년 파리바은행의 국유화 시도로 유명세를 탔다). 1940~50년대 작은 모임으로 출발한 르 시에클은 프랑스의 주요 정치 인사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베라르켈랭과 친분이 있던 프랑수아 미테랑, 조르주 퐁피두,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등). 뿐만 아니라 민간기업과 공기업 CEO들을 단일한 인맥으로 묶는 데도 성공했다. 피에르 무사는 말한다. “르 시에클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부분적으로 베라르켈랭 개인의 업적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르 시에클을 통해 각 분야 간 교류를 활성화해가는 동시에 지속적인 세대교체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다.”

르 시에클의 회원과 초대 손님은 이제 700명을 헤아린다. 15명의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가 신중하게 회원을 선발한다. 이사회 역시 6개월마다 구성원의 반을 새로 선출한다. 이 조직을 실제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소시에테 제네랄 드 프레스>의 편집장 에티엔 라쿠르다. 그는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일해왔다. 그는 자클린 베라르켈랭에게서 르 시에클 저녁 식사 테이블 배치 임무를 넘겨받았다. 저녁 식사가 전부나 다름없는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은 셈이다. 7~8인용 테이블에 수백 명의 초대 손님 좌석을 배치해야 한다. 다양한 영역의 인사들이 섞여 앉을 수 있도록 하고 각각의 면면을 살펴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상당한 사회적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르 시에클은 회원가입 신청을 받지 않는다. 회원 2명 이상의 추천을 통해 예비 회원을 초대하는 방식이다. 이사회는 가중다수결(Qualified Majority)에 의해 1~2년 동안 준회원 자격 여부를 심사한다. 준회원은 저녁 식사에 초대돼 자신이 학식과 교양을 갖추었음을 보여줘야 하고, 대화에 임할 땐 적극적이고 부드러운 태도로 지적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입도 무거워야 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간 얘기를 밖에서 떠벌려서는 안 된다.

르 시에클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지배계급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 시에클은 프랑스 40대 기업(CAC40) 총수, 고위 공무원, 유명한 ‘정치인’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 프랑수아 피용 총리, 집권 여당의 사무총장 장프랑수아 코페 등 유명한 우파 인사들을 망라한다. 좌파 국회의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르틴 오브리(사회당)는 “르 시에클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1997년 장관이 된 뒤부터 저녁 식사에 가지 못했지만 매우 흥미 있는 모임으로 기억한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중략) 모임의 성격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이 가능한 곳이기도 했다. 그 만남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진정한 지성은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5) 자크 들로르의 오른팔이던 파스칼 라미는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르 시에클의 저녁 식사에 가는 목적을 ‘전략적 개입’이라고 설명하면서 “좌파는 정책 결정자가 우파 인사와만 접촉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피에르 모스코비치는 단도직입적으로 르 시에클을 “매우 영향력 있는 사회 인맥”이라고 정의한다.(6)

회원은 지배계급 되는 것

르 시에클은 우파인가, 아니면 중도 혹은 중도좌파인가? 1995년 프랑스에서 68혁명 이래 가장 격렬한 사회적 충돌이 발생하기 몇 달 전, 르 시에클 이사회의 풍경은 마치 평화로운 규방(閨房) 같았다. 사회당의 마르틴 오브리와 제롬 모노드(우파인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 알랭 쥐페 전 총리와의 친분으로 유명한 경영인)가 나란히 앉아 있고, 프랑스민주노동연맹(CFDT)의 이론가에서 생시몽 재단의 사무총장으로 변신한 피에르 로장발롱이 (중도우파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과 레몽 바르를 신봉하는 장클로드 카사노바와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뿐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공법학 교수 올리비에 뒤하멜이 슈나이더의 CEO인 자유주의 신봉자 디디에 피노발랑시엔과 환담을 나눴다.

르 시에클 회원을 그들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사회적 위치를 통해 바라보면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실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르 시에클은 그들이 주장하듯 “출생이나 신분을 통한 인맥쌓기를 배제하고 똑똑한 인재들에게 권력을 향한 발판이 되어주는 곳”(7)이라기보다는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최고경영자들의 만남의 장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르 시에클은 라시다 다티, 파델라 아마라 같은 이들을 발굴하고 앙드몰 프랑스의 전 사장 스테판 쿠르비 같은 이들(다른 회원들에 비해 학벌이 처진다)의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했다고 자찬한다. 그러나 회원들을 살펴보면 스타일, 나이, 출신 학교, 혈통, 소속 계급 등에서 놀라울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르 시에클의 대다수는 남성(85%)이며, 55살 이상(80%)이고, 기업 총수, 고위 공무원 혹은 전문직 부모 밑에서 성장한 경우가 많다(55%). 또한 국립정치학교 학위를 가졌고(50%), 상당수는 국립행정학교(ENA) 출신이다(40%). 그도 아니면 최소한 공학 혹은 경영 그랑제콜을 나왔다(25%).

국가적 사안 결정에 입김

그러나 르 시에클은 단순히 행복한 소수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권력자들과 만나는 장소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경제계획 일반총국이 ‘궁정사회’(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책 제목)를 대체한 지금까지 엘리트들의 은밀한 상부상조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대칭적이지 않다. 지배계급 내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역관계(力關係)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회원들에 비해 더 ‘모험’을 하는 회원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경영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은 노조 관계자, 언론사주가 편애하는 정치인과 자리를 함께한 기자(물론 이들의 만남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상대 후보와 함께 식사하는 정치인이 이들이다. 반면 유명 언론인, 여야 정치인들과 환담을 나누고 노조 관계자와 의견을 교환하고 어쩌면 몇 년 뒤 동료가 될지 모를 고위 정치인과 한담을 나누는 산업·금융 자본가의 경우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명예가 실추될 일도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돈 가진 권력자에게 대항하는 이들의 대변자 노릇을 해온 이들(노조 활동가와 지식인), 원칙대로라면 정치적 독립을 고수해야 하는 이들(기자,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을 길들일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이들의 모임을 둘러싼 온갖 소문에도 르 시에클은 ‘음모자들의 소굴’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사안이 이곳에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귀가 따갑게 주장하듯이 뒷거래가 성행하지도 않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프란츠올리비에 지스베르가 1988년 9월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르 피가로>로 자리를 옮기면서 촉발된 언론계의 쿠데타가 르 시에클의 저녁 식사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이 자리에는 당시 <르 피가로>의 사주 로베르 에르상의 오른팔이던 필리프 빌랭이 참석했다. 또한 에두아르 드 로트실드의 <리베라시옹> 지분 인수 과정 역시 그곳에서 진행됐다.”(8) 국가의 중요 사안들은 국제기구나 지역기구, 하원과 상원, 각료회의 혹은 이사회에서 결정된다. 반면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수많은 만남과 대화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 혹은 경영 전략에 대한 고민이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르 시에클의 역할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기초라 할 만한 합법적 결정 프로세스의 바깥에서 이 작업을 수월하게 해주는 데 있다.

지난해 가을, 프랑스 일간지들은 니콜 노타가 드니 케슬레르의 뒤를 이어 르 시에클의 회장에 임명됐다는 내용의 짤막한 기사를 내보냈다. CFDT 사무총장에서 대기업 이사로 변신한 인물이 프랑스 전경련(MEDEF) 회장의 뒤를 이어 르 시에클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드니 케슬레르는 과거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CNR)가 쟁취한 사회보장의 파괴자를 자처했던 인물이다.(9) 상반되는 두 인생 경로가 교차하는 광경을 보면서 르 시에클의 운영 원칙을 재확인하게 된다. 엘리트들이 한데 모여 사회질서를 재생산하도록 돕는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드니 케슬레르는 말한다. “니콜 노타가 내 뒤를 잇게 됐다. 여성 노조위원장이 남성 사장의 뒤를 잇는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10)

글•프랑수아 드노르 François Denord, 폴 라뇨이모네 Paul Lagneau-Ymonet, 실뱅 틴 Sylvain Thine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Charles W. Mills, <L’élite du pouvoir>, Maspéro, 파리, p.16, 1969.
(2) Denis Kessler, ‘르 시에클에 대한 부당한 비판’, <르몽드>, 2010년 12월 16일자.
(3) Jean-François Polo, ‘무대의 주역들, 특별한 관계’, <Les Echos>, 2010년 11월 19~20일자.
(4) Jean Bothorel, <귀족 공화국>, Grasset, 파리, p.54, 1979.
(5) <Les Echos>, 2008년 3월 21일자.
(6) <Le parisien-Aujourd’hui en France>, 2010년 8월 22일.
(7) 르 시에클 이사회가 역사학자 아녜스 쇼보에게 의뢰해 만든 팸플릿, p.14, 2000년 12월 31일. Anne Martin-Fugier, ‘르 시에클(1944~2004), 엘리트 사교계의 한 예’, <Vingtième Siècle>, n°81, 2004년 1~3월, pp.21~29에서 재인용.
(8) <Stratégie>, 2005년 4월 14일.
(9) <Challenges>, 2007년 10월 4일.
(10) <L’Expansion>, 2010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