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아프리카 잔혹사
[서평]
1971년 카메룬. 부당한 정권에 대한 반대의 물결은 무장 저항을 낳았고, 이 저항은 지도자들이 처형될 때까지 계속됐다. 카메룬 식민지 관리를 담당했던 기 조르지는 친프랑스 인사인 아마두 아히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1958년 선거를 은밀히 조작했다고 고백했다. 당시 프랑스와 카메룬 사이의 분위기가 얼마나 팽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의 비호를 받던 아히조는 20년 동안 권좌를 지켰다. 아히조의 뒤를 이은 후임 대통령이 정면으로 비판했음에도 카메룬은 탐욕스러운 소수 권력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카메룬의 정체성이 다져지던 때에 봉기가 일어나고 프랑스가 유혈 진압에 나섰는데, 이는 대안이 없어서였을까? 이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프랑스 기자 두 명과 카메룬 역사 전문가 한 명도 프랑스 정부에 진압 말고는 대안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한다. 세 사람은 카메룬 현지에서 자료를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우리에게 당시 프랑스 정세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의 노력은 카메룬에서 일어난 비극을 명확하게 밝혀내려는 시도였다.
카메룬 독립주의자들은 1918년 독일의 패전 뒤 둘로 분할됐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보호령이 된 영토 전체를 독일어 명칭인 ‘Kamerun’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카메룬에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싸울 지원병을 모집할 때 자국은 야만적인 독일과 달리 인본주의적이라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강제노동을 계속 활용하며 빈곤층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 조사단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알제리와 세네갈처럼 카메룬에서도 전후 봉기가 일어났고, 프랑스에 의해 유혈 진압됐다. 카메룬의 전후 봉기는 1945년 9월 두알라에서 일어났다.
1948년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바사족의 렌벤 움 뇨베가 카메룬민주연합(UPC)을 결성했는데, 프랑스 당국은 움 뇨베를 가리켜 교양 있고 지성이 넘치는 공직자라고 했다. 농부 부모에게서 태어난 움 뇨베는 장로회 선교사에게 교육받았고, 다국어에 능통했으며, 여러 투쟁가들과 고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를 지지한 세력 중에는 의사 펠릭스 무미(훗날 UPC의 총재), 에르네스트 우앙디(저항군을 지휘하다가 1971년 교수형에 처해짐)도 있었다.
UPC는 카메룬의 봉건적 구조에 반대하고 강경한 사회주의 메시지를 내세우면서 서민층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1955년 UPC의 활동이 금지될 때까지 움 뇨베는 중립적인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폭넓은 연정을 유지하고 무력 충돌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도차이나에서 패배의 굴욕을 맛본 프랑스군은 알제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카메룬에서도 강경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알제리와 카메룬에서 프랑스군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시민을 대상으로 심리전, 고문, 마을 방화 같은 새로운 강경책을 썼다. 고향으로 피신해 반프랑스 지하활동을 하던 움 뇨베는 1958년 등에 총 한 발을 맞고 살해됐다. 프랑스로서는 골치 아픈 존재가 사라져 안심이었다. 그리고 1959년에는 무미가 제네바에서 독살됐다. 무미를 암살한 인물은 기자로 위장한 프랑스 비밀요원이었다. 그 이듬해, 프랑스군 장교들은 유혈 진압으로 카메룬인 2만 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프랑스 언론은 이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글•오귀스타 콩시글리아 Augusta Conchiglia
<각주>
(1) 토마 델통브·마뉘엘 도메르그·자코브 타치타, <카메룬! 프랑사프리크를 낳은 숨겨진 전쟁 1948~1971>(Kamerun! Une gueere cachée aux origines de la Françafrique, 1948~1971), La Découvert, 파리, 2011.
(2) 프란시스 아르잘리에,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경험 1960~1990>(Expériences socialistes en Afrique 1960~1990), Le temps des cerises, 팡탱,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