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코로나 호에 함께 타고있다”

2020-03-31     슬라보예 지젝 | 철학자

인간은 재난에 봉착할 때 부정, 분노, 우울증, 그리고 수용의 단계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전염병이 확산된 이 사태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슬라보예 지젝의 글은 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자신의 저서 『Les Derniers Instants de la vie 죽음과 임종에 관하여』에서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5단계로 정리했다. 부정(“이건 말도 안 돼.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분노(“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타협(“내 자식들이 졸업할 때까지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좋겠어.”), 우울증(“어차피 죽을 텐데, 발버둥 쳐봤자 무슨 소용이야?”), 수용(“피할 수 없는 이 상황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지.”)이 그것이다. 훗날 퀴블러-로스는 이 도식을 실직, 가족의 죽음, 이혼, 마약중독 등 모든 종류의 비극적 상황에도 적용했다. 그러면서도 이 5단계가 반드시 순서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이 도식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그는 강조했다. 

2019년 말에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같이 반응하고 있지 않은가? 첫 번째 단계로 현실을 부정(”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한다. 그다음 분노(중국인이나 자국 정부에 부정적인 어조로 ”이번에도 불결한 중국놈들 때문이야!”, ”우리 정부는 정말 무능하단 말이야!”)의 단계, 그다음은 타협(“물론 희생자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해.”)의 단계다. 더 나아가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우울증(“진실을 애써 외면하지 말자. 어차피 모두 다 병에 걸려 죽고 말거야.”)의 단계가 찾아올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수용의 단계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수용의 단계는 아마 이런 논리로 전개될 것이다. “이 전염병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전염병의 전세계적인 확산은 명백한 현실이다. 통행금지나 격리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이 병의 확산을 막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병에 걸려도 치사율이 낮을 뿐 아니라, 완치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 아니 우리가 타협해야 하는 사실은 우리 삶이 늘 단순하고, 반복적인 바이러스의 무성생식에 의해 유지되고 지탱돼 왔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우리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생존을 위협하며, 우리가 가장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을 발생시키곤 한다. 이렇듯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의 확산은 자연의 우연성과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상기시킨다. 숭고한 인류애를 기념하는 영적인 비석이 장엄하고 위대하면 할수록, 모든 것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바이러스나 소행성은 천박하고 터무니없기만 하다.” 여기에 생태학이 주는 교훈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류는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자유와 위기는 어떤 관계인가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국가 권력과 시민 간 최소한의 신뢰 구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존재를 처음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당국의 검열로 입을 다물어야 했던 우한의 리원량 의사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요, 중국판 에드워드 스노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리원량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분노했다. 중국 정부가 전염병을 관리하는 방식을 두고 언론인 베르나 유가 내린 진단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중국이 평소 표현의 자유를 장려했다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리원량 의사는 사망 직전 병상에서, “건강한 사회는 하나의 목소리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가 다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서구의 다당제 민주주의 모델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민의 비판적 반응을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시민들이 공포에 떨지 않도록 국가가 여론과 소문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음모론에 경도된 유언비어를 양산해낸다. 중국 정부가 시민들과 굳건한 신뢰를 회복할 때, 비로소 교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대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지금, 우리는 군대를 동원해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국가를 필요로 한다. 중국은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격리시킬 수 있었지만, 이 전염병이 미국에서 대규모로 확산된다면 미국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은 다 국가적 차원의 음모’라며 격리 조치를 무시한 채, 총을 들고 길거리로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일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중국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후베이성을 희생시켰다고 봐야 할까? 이 두 가지 관점 모두 명백히 옳다. 그러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선한’ 표현의 자유와 ‘악한’ 소문을 구분하는 것이 극도로 까다롭다는 사실이다. 중국 정부가 "진실을 항상 소문으로 취급한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공식 언론과 디지털 매체는 이미 소문으로 가득 차 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 사태를 막으려면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면,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혼란과 기근을 예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나 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단들, 즉 지구적 차원의 계획 및 통제 하의 생산과 분배가 요청될 것이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비롯된 전염병을 막기 위해 공산주의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보다 더 열악했던 20세기 초반의 옛 공산주의에 대한 모든 형태의 향수를 포기해야 한다. 그 대신, 대중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형태의 활동을 고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유토피아인가? 유토피아라는 것은 우리가 언제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물론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을 분석해야 한다. 한 영국인이 싱가포르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온 다음, 휴가차 프랑스에 가서 스키를 타고 돌아왔다고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는 중에 이미 네 명 이상을 감염시켰을지 모른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 확진자들이 여러 나라를 이동하며 전염병을 확산시켰다는 뉴스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전염병의 배후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이 전염 사태를 지구환경을 파괴하고 각종 생명체를 무분별하게 착취한 인류에게 내려진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현상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를 찾으려 하는 행위는 전근대적이다. 이렇게 사고하는 사람들은 마치 인류를 우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징벌임이 틀림없다. 우주는(또는 누군가가) 어딘가에서(혹은 외계에서) 우리 인류를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현재 확산 중인 전염병은 단순한 우발적 변이의 결과일 뿐,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전혀 없다. 대자연의 질서 속에 놓고 보면, 우리 인류는 그다지 특별한 종(種)이 아니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당국에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제공했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 아니다. 바이러스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또는 다른 국가) 우선주의”와 같은 익숙한 슬로건은 이제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마틴 루터 킹은 이미 반세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 우리는 다른 배를 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모두 같은 배 안에 있다.” 우리가 이 말에 담긴 메세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우리는 코로나 집단감염의 상징이 돼버린 유람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의 신세가 돼버리고 말 것이다. 

 

글·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마르크스와 라캉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그는 대중문화와 형이상학 사이의 교차로에서 자신만의 성찰을 발전시켜왔다. 주요 저서로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혁명이 다가온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HOW TO READ 라캉』, 『죽은 신을 위하여』, 『시차적 관점』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성관계는 없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레닌 재장전』『바디우와 지젝 현재의 철학을 말하다』(공저)등이 있다.
※이글은 프랑스의 <필로소피 마가진>  (Philosophie Magazine, www.philomag.com)에 기고한 것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본지에 게재한다.

번역·이근혁 
번역위원

 

그림·황지현
화가 황지현은 스치는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순간들, 유동하는 기억,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풍경 등 관계에서 느끼는 심리적 감응과 충돌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코로나19의 습격을 받은 우리의 삶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보는 듯해, 이번 호에서 작가의 작품들을 선택했다. 그는 9회의 개인전과 60여 회의 기획 단체전을 거쳤으며,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전시 및 창작활동을 진행해왔다. 그는 다수의 아트 콜라보레이션에 참여하기도 했다. (3~12면, 32~34면)
www.hwangjihy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