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지표상의 불확실성 탓
다가오는 재앙에 관찰자가 아닌, 무방비로 노출된 당사자가 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간신히 유지하는 평정심과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동시에 솟구친다. 전자는 평소처럼 생활하게 하고, 후자는 서로를 감시하고 금지된 행동을 처벌하게 만든다.
이런 상반된 태도와 관련된 대응책은 능력 있는 의료진(그리고 감염학, 역학, 세균학 전문가들)에게 맡겨두자. 화산재에 파묻힌 폼페이에서 대 플리니우스는 오늘날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처럼, 쿠션으로 머리를 가리고 검은 비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우리도 그처럼 감염의 공포에 휩싸인 현대사회를 바라보고 그 특징을 짚어보자.
의심에 의심을 낳는 원인 규명의 불확실성
1889년에 발생한 러시아 독감(당시 두 명 중 한 명꼴로 감염됐다)이나 수천만 명이 사망한 1918년의 스페인 독감, 혹은 1957년의 아시아 독감처럼,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수준의 세계적 유행병은 세계적으로나 국지적으로나 패닉 현상을 초래하진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인류는 전 지구적 위험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이에 동요하고 있다. 과거에 여러 번 겪었던 것과 비슷한 질병이 이 정도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1996년, 동물성 사료를 통해 인간의 뇌에 전염되는 광우병은, 동족상잔을 강요당한 불쌍한 소를 의미했다.(1) 이는 청년들이 노인의 인육을 먹으며 생존하는 내용을 담은 리처드 플라이셔의 영화 <최후의 수호자(Soylent Green)>(1973)를 연상시킨다. 13년 후 퍼진 인플루엔자A(H1N1) 독감은 세균전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2)
생활방식의 변화는 불가피하다
코로나19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19가 낳은 수많은 우려는 세계화된 현대사회 곳곳에 이미 존재한다. 원인의 불확실성은 의심을 낳고, 역효과가 생길까 대처를 주저하게 만든다. 무엇이든 더 빠르게 확산되는 경향성(쿠키 같은 컴퓨터 바이러스나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폭락한 주식시장 등)이 나타나고, 우려는 증폭된다. 대응책을 마련하기 어려워질까, 사회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 경제위기가 닥칠까, 잘못된 정책을 시행한 국가가 법치주의를 비켜나 권위주의로 향하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한번 바뀌면 그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운 경제·기술 분야와 달리, 혼란스러운 현 시국은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언정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서보다는, 현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기 위해 고민한다. 인류 전체가 연기하고 바이러스가 연출한 이 무대 위에서 인류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산업화된 현대문명이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자연보호 운동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낙관주의다. 여전히 터부시되는 주제인 바이러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다. 바이러스 덕분에 당장 환경오염과 에너지 자원 낭비는 효과적으로 줄어든다. 그 대신 조업정지로 인한 실업, 이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 희망 속의 모순을 자각해야 한다. 전염병에 맞서 조직적인 대처가 활발히 이뤄지는 가운데,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생활방식의 변화가 불가피함에도 변화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이러스와 이에 맞서는 격리조치, 즉 문제와 대책 사이의 대립이 첨예해질수록ㅁ 승리는 멀어진다. 직장이나 학교, 여가시설, 쇼핑몰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또 이동하면서 사람들과 마주친다. 이렇게 사람이 집단을 이루기 시작하면 바이러스의 이동 경로는 폭발적으로 확산된다. 외면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살 만한 미래사회란, (관리자들이 사용할 감시용 통신망을 포함해서) 더 독립적이고 외부와 교류가 많지 않은, 자율공동체적 소규모집단으로 구성돼야 한다.
자율공동적 소규모 집단 구성되어야
중국인이나 보건당국을 비난하기보다, 마스크와 금지수칙, 그리고 간이진료소로 맞서고 있는 최전선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 전 지구적 비극이 된 코로나19 예방에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코로나19 현장은 이미 극적으로 각색돼 곳곳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 모두가 함께 행동에 나서길 촉구한다는 정당한 이유 이면에, 전염에 대한 혐오감 또한 자리한다.
분명 우한 야생동물 암거래 시장은 위생에 취약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정확히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초감염자가 어떻게 바이러스에 노출됐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특히 과학 분야에서 위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경향이 있다. 바이러스가 시장 근처 연구소에서 유출됐을 수도 있다는 음모론까지 나왔을 정도다. 박애주의를 앞세워 보건문제를 개선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생충 박멸이나 위생환경 개선을 명목으로 확산됐던 내분비 교란 물질(환경 호르몬)이나, 심층조사라는 명목으로 도입한 수십억의 이윤과 수만 명의 피해자를 동시에 계산하는 ‘의료장치’가 그런 경우다.
우한 최대의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바이러스가 유출된 것이 아니라는 연구결과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적 무의식은 질병 발생을 조장하는 문화를 연상시킬 뿐이다. 배트맨이 사는 고담시, 수퍼히어로의 싸움터에서 티 없는 가운을 입고 ‘선을 위해’ 인공지능과 시험관을 무기로 휘두르는 자와, 절망에 찬 웃음소리로 거리를 달구는 자가 맞선다. 두 캐릭터는 모두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했다. 반면에 우리는 보편적인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해 안전수칙을 지키자. 전염병 예방을 위해 생계를 중단할 수 없다는 이들을 배신자라 규정짓지 말자. 격리조치로 인해, 자살과 우울증 사망률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세 가지 전염성
바이러스로 잠시 멈춘 이 때,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현대사회의 세 가지 전염성에 대해 고찰해보자. 인근으로 퍼져 서로 뭉치는 권력의 전염성은 국가, 가족, 개인을 고립시키는 억압적인 정책의 유혹에 빠진다. 두 번째는 기술의 전염성이다. 자연훼손 이후 기술의 표적은 다름 아닌 인간이었다. 기술의 전염성은 광속으로 퍼져(여기에 동원기술이 일조했는데, 이따금 필요불가결한 요소였다.) 인간의 정신을 설득함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생각’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돈의 전염성은 앞의 두 요소 때문에 점점 가속화되고, 그 결과 쳇바퀴 돌 듯 다시 앞의 두 요소가 더 빠른 전염성을 띠게 됐다. 돈의 전염성은 진단 테스터, 백신, 혹은 몇 시간마다 버릴 필요 없는 양질의 마스크 등을 만드는 좋은 일에 일조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특성이 코로나19 생존자의 98%에게 돌아올 문제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고 가정해보자. 공동체와 가족, 그리고 개인의 생활양식에 어떤 변화가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는, 바이러스/격리라는 한 쌍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요약되지 않을까? 머지않아, 환경을 오염시키고 불필요한 낭비를 낳는 사회조직의 인구 동원을 제한해야 할 것이다. 재택근무와 원격학습은 계속 실험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직장과 학교의 중앙집권화된 위계질서에 예속된 관계와 기타 교우 관계에서 탈피해 온전히 ‘자신을 위한’ 활동으로 돼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는 격리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그리고 민주화된 공공재산의 보존을 맡은 사람들은, 상류층의 권력, 절대적인 지식, 재물축적과 등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세계로 퍼진 바이러스는 적이 아니라 하나의 지표다. 무엇에 대한 지표인가? 인간종이 지구에서 가지는 존재감이 이토록 강했던 때가 또 있었던가? 인류는 불안감에 시달린 결과 확실성에 집착하게 됐다. 정치권력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기술과학으로 사물과 신체를 지배하고, 돈으로 모든 것을 지배한다.
바이러스가 무서운 점은 태생적으로 지닌 불확실성에 있다. 인간의 삶이 불안과 공포에 빠질수록, 사회는 사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글·드니 뒤클로 Denis Duclos
인류학자. 국립학술연구센터(CNRS) 연구지도 교수, <다양성 예찬: 문화의 이동과 인류의 지속성>(비블리오테크 드 라 르뷔 뒤 모스 페르마낭트 출판사·파리·2012)의 저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Raisons et déraisons d’une psychose 강박관념, 이성과 감정사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0년 12월호.
( ‘Psychose de la grippe, miroir des sociétés ’플루포비아‘, 불온한 진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09년 9월호.
그림·황지현 화가 황지현은 스치는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순간들, 유동하는 기억,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람과 풍경 등 관계에서 느끼는 심리적 감응과 충돌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코로나19의 습격을 받은 우리의 삶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보는 듯해, 이번 호에서 작가의 작품들을 선택했다. 그는 9회의 개인전과 60여 회의 기획 단체전을 거쳤으며,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전시 및 창작활동을 진행해왔다. 그는 다수의 아트 콜라보레이션에 참여하기도 했다. (3~12면, 32~34면) www.hwangjihy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