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근거없는 러시아공포증

위조된 문서와 진실된 말

2020-03-31     기 라롱 | 예루살렘 히브리대 국제관계학 교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스크바 발 전제군주, 위험한 음모를 실현시키려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막강한 힘을 가진 정보기관, 서구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적인 아시아국가… 이렇듯 러시아 국력에 대한 공포스러운 이미지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취임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서구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흔적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극대화된 19세기, 엘리트들은 ‘루소포비아(Russophobia; 러시아 공포증)’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러시아 공포증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점점 커지는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에 러시아 공포증은 절정에 달했다. 민감한 사회문제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부유한 엘리트들이 펼친 연막작전이었을까?

 

이 시기 유럽, 특히 영국 자유주의파 엘리트들에게 러시아는 큰 위협이었다. 1817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2년 만에 영국 일간지 <모닝 크로니클>은 “러시아의 주목적은 영토확장”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한편 로버트 윌슨 장군은 러시아 공포증이 커지던 시류에 맞춰 ‘표트르 1세의 유언’이라는 위조문서를 제출했다. 윌슨 경이 이 문서를 접한 1812년에 러시아가 프랑스의 주적인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하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그 보복으로 러시아를 침략했다. 

윌슨은 영국과 러시아가 협력해 프랑스군대를 저지하기 위한 연락 책임자로 러시아에 파견됐다. 이때 그의 손에 들어온 문서는 표트르 1세(1672~1725)가 후손들에게 남기려던 것으로 추정되는 계획안으로, 특히 러시아제국이 근동과 동유럽을 정복해 영토를 팽창하는 것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이 담겨있었다. 러시아의 혹독한 ‘동장군’을 이기지 못한 프랑스 군대는 퇴각하며 이 ‘유언’을 몇 부 흘렸다. 당시 윌슨 경은 이 문서가 나폴레옹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적 선동의 목적으로 프랑스가 만든 위조문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5년 후, 윌슨 경은 문서의 내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다. 윌슨 경은 1817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프랑스보다 더 강대한 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전쟁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러시아 육군이 나폴레옹의 패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협력관계였던 영국과 러시아는 틀어졌다. 이 급격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1)

 

영국과 러시아는 왜, 어떻게 돌아섰을까

영국은 지난 3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왔다. 광활한 영토에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에서, 영국은 16세기부터 함대 제작에 필수원료였던 삼, 리넨, 타르, 목재 등을 구했다. 18세기에는 러시아산 철이 식민지사업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초 영국 기술에 밀려 러시아의 금속 가공산업이 낙후됐던 당시, 러시아는 밀을 저렴한 가격으로 영국에 대량 수출했다. 러시아산 곡물 덕분에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고, 그 대신 러시아는 영국의 기술을 들여왔다.

하지만 19세기에 러시아는 이런 자유무역 정책에 문제를 제기했다. 알렉산드르 1세(1801~1825년 재위)와 니콜라이 1세(1825~1855년 재위)는 자국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외국제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을 도입했고, 이 때문에 영국 상품이 러시아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러시아 관료들은 영국 상인들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국가 간 교역의 균형이 러시아 쪽으로 서서히 기울었다.(2) 

러시아는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제국은 동쪽, 남쪽으로 팽창해갔다. 러시아는 오스만제국을 침공했고, 이는 1853~1856년에 걸쳐 흑해 연안 크림반도에서 러시아군이 불·영 연합군과 충돌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를 정복하자, 영국에서는 대영제국의 주요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졌다. 

윌슨 경의 저서가 출간된 후 수십 년 동안, 소위 ‘표트르 1세의 유언’이라는 문서는 러시아가 해로운 의도를 품고 있다는 완벽한 증거물로 간주되면서 유럽에서 지속적인 논쟁거리가 됐다. 헝가리, 폴란드, 발트해 연안국의 민족주의자들, 러시아로부터 탄압받은 이들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들은 니콜라이 1세가 폴란드와 헝가리 혁명에 개입해 저지한 행태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국 보수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이 문서가 진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1876년, 한 영국 외교관이 알렉산드르 2세와 함께한 자리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표트르 1세의 유언에 쓰인 내용과 예카테리나 2세의 뜻은 모두 허구에 불과하다”라고 단호히 일축했다.(3) 1859년에 이르러서야 학자들이 개입했고, 이들은 1879년에 문서가 위조일 수 있다는 가정에 동의했다. 그 후  1세기가 지나자 ‘표트르 1세의 유언’은 마치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로제타 스톤처럼 러시아 대외정책 해석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참고하지 않는 문서가 됐다. 

러시아의 거대한 규모 또한 영국이 우려하는 점이었다. 러시아의 잠재적 위협은 영국에서 실제보다 더 증폭되었다. 실제로 오스만제국 정복이나 인도 침략은 러시아의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이었다. 러시아 군대는 상당한 규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이었으며, 현대식 통신기술과 교통수단을 습득하지 못했다. 1856년 크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패배가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자칭 ‘전문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려 애썼다. 영국정부가 러시아에 적대적이지 않은 대외정책을 채택하자, 이들은 정부를 거세게 비난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은, 당시 영국 총리이자 러시아에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던 파머스턴 경에게 “러시아에 속아 영국을 멸망시키려는 공범”이라며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4)

하지만 정치권에서 실제 러시아가 지닌 위험의 정도에 대해 합의된 바는 없었다. 영국 관료들의 견해는 천차만별이었다. 파머스턴 경과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 같은 보수파는 강경 노선을 지지했고, 자유주의자로 네차례 총리를 역임했던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곡물법 폐지운동을 벌였던 리처드 콥덴 의원은 한층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정치인들의 상이한 입장에서 각자가 노리는 이익과 상충하는 정치전략이 드러났다. 전자는 금융지구인 시티오브런던, 즉 대영제국의 주요 투자자들을 대변했다. 반면에 자유주의 세력은 러시아 수출과 밀접한 분야, 특히 공업 종사자들의 지지를 받았다.(5) 또 다른 주요 요인으로, 보수당은 러시아 공포증의 불을 지펴 투표권 확대요구를 억누르고자 했다(1867년 20%가 넘기 전까지 영국 선거인구는 총 인구의 10%였다). 반대로 자유주의파는 그런 책략이 필요 없었다. 선거인구 확대를 긍정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반공산주의로 변화한 반러 감정

1907년, 영국과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계속된 잠재적 분쟁에 대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정세는 완전히 변했다. 자유무역에 적대적인 소비에트 연방은 영국 보수파에게 악몽 그 자체였다. 또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노조와 반제국주의자들을 동맹관계로 여겨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지 않았다는 점은 영국 보수파의 반감과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1920년대에, 영국 보수파는 체제전복과 공산주의 선전활동이 특히 중국의 근간을 흔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결국, 영국의 반러 감정은 반공주의로 변했다.(6)

보수파의 대표인물인 스탠리 볼드윈과 윈스턴 처칠 또한 영국 역사상 최초로 노동당이 득세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924년 1월, 램지 맥도널드는 영국 정치사에서 최초로 노동당 정부를 꾸려 자신을 포함해 중산층 출신 11명을 영입했지만, 이 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도널드 정부는 실업급여 지급을 확대했으며,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법안을 표결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다. 1916년에서 1922년까지 시행된 로이드 조지의 자유주의적 개방정책의 명맥을 이어, 맥도널드 정부는 영국제 기계설비를 탐내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수출을 촉진하고자 했다. 보수파들은 이에 거세게 반대했으며, “노동당 정부가 소련과 공모한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1924년 11월 총선거 하루 전, 보수성향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의 칼럼란에 또 다른 위조문서가 등장했다. 이 문서는 소련의 주도로 전세계 공산당을 통솔하는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이라고도 불린 이 국제기구의 집행위원장이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편지였다. 이 편지는 소련이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유리하도록 공작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수당이 거대한 파괴력을 지닌 이 문서를 영국 비밀정보부(MI6)로부터 입수했다는 것은, 이제는 다 밝혀진 기정사실이다. 정보부 간부들과 보수파 정치인들은 대부분 같은 명문대 출신에, 엘리트 계층으로 비슷한 부류였기 때문에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 편지가 공개되자마자 그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1924년 총선은 보수당의 승리로 끝났다.(7)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회적 긴장감은 점점 고조돼 마침내 1926년, 영국 곳곳에서 총파업이 터졌다. 총파업의 시발점은 석탄산업의 몰락이었지만, 보수당 정부는 소련이 사회분란을 조장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1927년 내정간섭을 핑계로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완전히 단절해버렸다. 1930년대 중후반,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득세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보수당 간부들은 여전히 영국의 주적은 소련이라고 고집했다. 소련과의 반파시스트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8) 

보수당 하원의원 레오 에이머리는 “독일, 러시아, 일본이라는 세 화근을 서로 견제하게 놔둠으로써, 이 세력을 약화시킬 것”을 종용했다. 실제로 몇 달 후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은 이 전략을 도입하며 “유럽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볼셰비키와 나치가 싸우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9) 러시아가 영향을 미친 자유무역 재검토, 노동당의 득세, 반식민주의 운동과 같은 사회현상은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크나큰 위협이었다. 잘못을 스파이의 몫으로 돌리는 편이 이들에게는 훨씬 이득이었다. 그러나 이 유혹에 넘어간 이후, 나치즘을 저지할 국제동맹을 만들 길은 요원해졌다.

과거 있었던 러시아 공포증은 오늘날의 정세와 무관하지만, 현대에 커져가는 러시아에 대한 불신은 몇몇 비슷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미래세대의 사학자들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편지와 크리스토퍼 스틸(영국 비밀정보부의 전 요원으로, 도날드 트럼프와 러시아가 결탁했다는 가설을 처음 주장한 인물)의 문서를 함께 놓고 대조하게 될까? 연간 총생산이 스페인과 비슷한 나라인 러시아가 어떻게 전 세계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을지 자문할 것인가? 국제정세가 불안정하고 핵무기 경쟁이 과열되던 시기, 어떤 정치인도 푸틴 정부와 협상해 건설적인 제안을 할 용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쉬워할까? 커져가는 사회적 불평등과 러시아 공포증의 재출현 시기의 관계를 눈치챌 수 있을까?

아직 이 질문들에 답하기는 어렵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려준다. 러시아 공포증은 정당한 정치적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말이다.  

 

 

글·기 라롱 Guy Laron
예루살렘 히브리대 국제관계학 교수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Albert Resis, ‘Russophobia and the “Testament” of Peter the Great, 1812-1980’, <Slavic Review>, Vol. 44, n° 4, 겨울호 1985 & John Howes Gleason,『The Genesis of Russophobia in Great Britain』,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50. 
(2) Boris Kagarlitsky,『Empire of the Periphery: Russia and the World System』 (London: Pluto Press, 2008), pp. 81-82, 127-131 & Margaret Miller,『The Economic Development of Russia, 1905-1914』, Franl Cass, 런던, 1969. 
(3) Albert Resis가 인용, Art. cit.
(4) C. W. Crawley, ‘Anglo-Russian Relations 1815-40’, <The Cambridge Historical Journal>, Vol. 3, n° 1, 1929.
(5) Kevin Narizny,  『The Political Economy of Grand Strateg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7.
(6) Paul Hanebrink, ‘Quand la haine du communisme alimentait l’antisémitisme(신나치즘으로 진화한 유대-볼셰비즘의 신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호․한국어판, 2020년 1월호. 
(7) Richard Norton-Taylor, ‘Zinoviev Letter was a Dirty Trick by MI6’, <The Guardian>, 런던, 1999년 2월 4일.
(8) Gabriel Gorodetsy, ‘Un autre récit des Accords de Munich(1938년 뮌헨 협정의 이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0월호. 
(9) 다음 서적에서 인용 Anne Perkins, 『Baldwin』, Haus Publishing, 런던,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