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가는 영국의 국민 건강

2020-03-31     마이클 마멋 l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 건강형평성연구소 소장

사회발전 측면에서 볼 때 영국은 10년을 잃어버렸다. 그 폐해도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기대수명을 기준으로 영국 국민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다. 100년 넘게 해마다 증가일로를 걷던 영국인의 기대수명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건강 불평등도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양상은 잉글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북아일랜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국민 건강이 주춤하면, 사회 전반의 발전에도 여지없이 제동이 걸린다. 전 세계적으로 축적된 데이터는 건강이 사회·경제 발전의 지표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번영하는 사회일수록 좋은 건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심각한 경제·사회격차는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국가 의료시스템의 재정이나 운영방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민 건강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밖에도 많다. 국민 건강은 생활조건과 노동환경, 노화 관리, 권력과 자원의 불평등 등의 요인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이 모두 더해져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구성하는 것이다.

영국의 기대수명은 19세기 말부터 꾸준히 증가하다 2011년을 기점으로 증가 폭이 크게 줄었다. 1981~2010년 기간에 기대수명이 여성의 경우 5년 반, 남성의 경우 4년마다 1년씩 증가했다. 2011~2018년에 들어서는 증가세가 크게 둔화하기 시작해, 여성은 28년, 남성은 15년이 지난 후에야 기대수명이 1년씩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합적 박탈지수(IMD, Index of Multiple Deprivation)는 소득·고용·교육·훈련·건강·생활 조건 관련 데이터를 아우르는 척도로, 유엔과 같은 기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다차원적 빈곤지수(MPI, Multidimensional Poverty Index)와 유사한 개념이다. 지역을 분류해 복합적 박탈지수를 측정한 결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영향을 보여주는 ‘건강의 사회 계층적 경사면(social gradient in health)’이 뚜렷하면서도 일관적으로 나타났다. 즉, 가난한 지역일수록 기대수명이 낮아졌다. 2016~18년을 기준으로, 영국에서 소득수준 상위 10% 지역 거주 남성들은 하위소득 10% 지역에 거주하는 남성들보다 수명이 9년 반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 그 격차가 7.7년이었다. 

 

‘건강 불평등’, 피할 수 없는 문제?

유병기간을 제외한 기대수명(건강수명)을 같은 조건에 대입할 경우 ‘사회 계층적 경사면’은 더욱 가파르게 나타난다. 유병상태로 보내는 비건강수명도 늘어났다. 2009~2011년과 2015~2017년 사이, 비건강수명이 남성은 15.8세에서 16.2세로, 여성은 18.7세에서 19.4세로 길어진 것이 확인됐다. 인종의 영향에 관한 정기적인 통계치가 불충분하다는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에 의하면 영국 소수민족(주로 흑인, 아시아인이나 혼혈인) 절반 인구의 건강수명이 백인보다 현저히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

건강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2008년, 고든 브라운 총리가 이끌던 노동당 정부는 영국 내 건강 불평등의 심각성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불평등 완화 방안에 관한 연구를 의뢰했다. 이에 따라 2011년에 설립된 미래보건평등연구소(Institute of Health Equity) 팀은 80명이 넘는 전문가로 구성된 9개 실무 그룹을 구성해 활용 가능한 각종 자료를 두루 검토했고, 도출된 내용을 전문위원회에서 논의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연구결과가 바로 2010년에 발표돼 ‘마멋 보고서’로 더 널리 알려진 ‘공정한 사회, 건강한 삶(Fair Society, Healthy Lives)’ 보고서다.(1) 비록 당초 노동당이 의뢰한 연구 프로젝트였지만, 이후 새로 들어선 보수당 주도의 연립정부 역시 이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영국 왕립공중보건협회가 회원들과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도 이 보고서가 공공장소와 직장에서의 금연과 ‘탄산음료세(Soda tax)’ 부과법에 이어 21세기 영국 공중보건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 3위에 선정됐다. 그러나 모든 연령대를 겨냥해 적극적인 공공정책을 펼치면,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영향을 미치고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보고서의 핵심 주장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재정 긴축은 2010년 선출된 정부와 2015년 선출된 보수 내각이 전면적으로 내세운 정책 기조로 자리 잡았다. 영국의 공공지출은 2009~2010년 국내총생산(GDP)의 42%를 차지했으나, 2018~2019년에는 35% 규모로 축소됐다. 그럴 때마다 정부는 경제 재성장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만일 누군가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진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금융위기로 잠시 주춤했던 최상위 1%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쌓게 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편다면 정부의 반박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펴낸 정책은 실제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정부는 가족수당을 40% 삭감했고, 최빈곤지역 공공지출을 31% 축소했으며(반면 가장 부유한 지역의 감소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고학년생과 고등교육 과정 학생 1인당 정부 지원금도 12% 삭감했다.(2)

 

긴축정책이 초래한 결과들

이런 긴축재정을 계획한 정책결정자들은 보조금이 ‘예산 퍼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구결과는 그들이 오판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멋 보고서가 나온 지 10년이 지난 현시점에 우리는 새로운 연구를 통해 2010년에 제시한 6가지 주요 권고안 중 다음 5가지 항목을 되짚어봤다. ‘모든 아동이 최선의 환경에서 자라나도록 하고, 교육과 지속적인 훈련을 보장하며, 고용 및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모든 이들이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며, 지속가능한 생활과 주거환경을 구축할 것’이 그 내용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부가 실시한 긴축정책이 지역 불평등을 키우고, 대부분의 사회적 건강 결정요인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3)

결국, 아동 빈곤율이 2009~2012년 28%에서 2015~2018년 31%로 증가했다(주거비를 포함한 소득기준 해당). 육아와 보육을 지역 차원에서 지원하는 정부 프로그램 ‘슈어 스타트(Sure Start)’ 참여보육원과 아동시설 1,000여 곳이 지역 공공지출 감소 문제로 문을 닫기도 했다. 정부가 설령 연령이 조금 더 높은 취학 직전 아동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해도 전체 감소분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인지·언어·사회·정서·행동과 같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능력을 습득하는 아동기가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바람직한 아동발달은 우수한 학업성과로 이어지고, 이는 성인기로 가면 더 나은 직업 선택 기회와 건강한 생활환경으로 이어진다.

그밖에도 주택난은 노숙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수입의 1/3 이상을 주거비에 쏟아부어야 하는 ‘주거 빈곤층’의 비율을 높인다. 모든 계층에 영향을 미치는 주택문제는 자연히 사회 계층 경사면을 가파르게 만든다(즉, 건강불평등을 심화한다). 10년 전만 해도 소득수준 하위 10%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28%를 차지하는 수준이었지만 2016~2017년 이 비율은 38%로 치솟았다. 

푸드뱅크(Food bank)에 의존해 살아가야 할 만큼 건강을 돌볼 여력이 없는 인구가 사회 전반에 걸쳐 날로 늘어만 간다.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마저 저버려야 할 만큼 어려운 생활여건에 놓인 소외계층 인구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국가 방임주의가 초래하는 각종 해악 가운데, 건강 불평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지 특정하기는 어렵다. 모든 요인이 서로 밀접히 연관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단, 10년 전에 마멋 보고서에서 밝힌 내용은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피할 수 있는 사회 불평등이 초래하는 건강 불평등은 피할 수도 있고, 대폭 완화할 수도 있다.”  


 

글·마이클 마멋 Michael Marmot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건강형평성연구소(Institute of Health Equity) 소장
※이 기사의 원문은 앞서 2020년 2월 영국의학저널(The British Medical Journal)에 게재됐다.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Michael Marmot, ‘Fair Society, Healthy Lives-The Marmot Review 공정한 사회, 건강한 삶-마멋 보고서’, Strategic Review of Health Inequalities in England Post-2010, Institute of Health Equity, 런던, 2010. Strategic Review of Health Inequalities in England Post-2010, Institute of Health Equity, Londres, 2010.
(2) Jack Britton, Christine Farquharson, Luke Sibieta, ‘Annual Report on Education Spending in England 영국의 교육 지출에 관한 연차 보고서’, The Institute for Fiscal Studies, 런던, 2019.
(3) ‘Health Equity in England: The Marmot Review 10 Years On 영국의 건강 평등: 마멋 보고서 출간 후 10년’, Institute of Health Equity, 런던, 2020, www.instituteofhealthequity.org The Marmot Review 10 Years On, Institute of Health Equity, Londres, 2020, www.instituteofhealthequit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