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이스라엘, 국위 회복과 물질적 필요의 관계

2020-03-31     다니엘 마르베키 l 연구원

2차 세계대전 직후, 전후 복구사업에 열을 올리던 독일연방공화국(이하 ‘서독’)은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동정을 사려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독은 중동의 정치지형 형성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독이 이스라엘로부터 사면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항상 노출될 준비가 돼 있던 이면의 진실을 모두 은폐하지는 못했다.

 

2018년 4월, 독일 의회는 히브리인들이 세운 국가, 이스라엘의 건국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다. 토론 중 마르틴 슐츠는 사회민주당(SPD)을 대표해 말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보호함으로써 과거의 악령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1)” 중도좌파 진영의 생태환경당 대변인은 이날 열린 토론의 핵심을 다음 한 문장으로 포착해냈다.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는, 우리들이 존재할 권리와 같습니다.”

라인강이 가로지르는 나라, 독일의 정치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상 그들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나치가 패망한 뒤 서독은 이스라엘과의 유대를 돈독히 함으로써, 국민이 진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살펴보면, 양국 사이의 역사적 진실뿐만 아니라 독일인들의 내면과 심리상태를 상당 부분 확인할 수 있다. 

서독과 이스라엘, 이 두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로 인해 생겨났다. 양국은 1952년 9월 10일에 체결된 배상협정으로 화해했다.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나치 통치하의 ‘제3제국’이, 어떻게 불과 몇 년 만에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이스라엘과 적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었을까?

 

속죄인가, 힘에 대한 두려움인가

이스라엘과 서독 사이의 관계를 ‘윤리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독일인들의 공식적인 수사적 표현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앞서 역사가들이 예증했듯이, 전후 서독 사회는 윤리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치 시절의 전직 관리들은 전후에도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했고, 서독 민중들은 패전 직후 고삐 풀린 야만성에 노출된 채 깊은 수렁에 빠졌다.

이 주제에 대해 가장 명료한 설명을 제공하는 인물은, 전후 집권한 첫 수상이자 서독을 ‘르네상스’ 시대로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콘라드 아데나워다. 그는 총리직에서 퇴임한 지 2년 후인 1966년, 시청률이 가장 높은 황금시간대에 서독의 한 텔레비전 방송사와 인터뷰를 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과거 독일이 범했던 전쟁 범죄를 속죄하고 배상하는 일은 우리 독일이 예전에 누리던 국제적인 위상을 되찾는 데 필요한 전제조건이었습니다.” 곧바로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결코 오늘날 유대인들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은 대단히 막강합니다.”

아데나워의 이 말에 의하면, 서독이 이스라엘에 배상한 것은 윤리적 차원에서라기보다는 훼손된 국위 회복을 위한 조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아데나워는 ‘오늘날’, ‘유대인의 힘’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한편, 유대인들의 세력확대를 경계하는 반유대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아데나워가 이스라엘에 대해 취한 정책은 다음 두 가지 요인에 기인했다. 하나는 서독의 국력을 회복하려는 강렬한 욕구,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 서구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한 과도한 평가다. 

이 두 가지가 독일인들의 실질적인 동기였던 것이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이스라엘 건국에 앞장섰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어찌하여 나치의 잔재를 미처 청산하지 못한, 서독의 피 묻은 손을 잡았던 것일까? 유대인 학살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스라엘 건국 당시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했다. 당시 이스라엘 국민 가운데 가족이나 친척이 희생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빠진 유럽 난민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서독의 손을 잡았던 이유는 단 하나, 서독이 이스라엘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독립 전쟁 중 팔레스타인 인구 대부분을 강제 퇴거시켰다. 전쟁 탓에 경제적·군사적으로 피폐해진 이스라엘은 한동안 중동에서 가장 취약한 국가로 남게 됐다. 

1952년, 서독과 이스라엘 양국이 맺은 협정은 서독이 배상금 지급을 약속한 최초의 주요 조약이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국가 차원의 배상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이 조약은 훗날 시행될 유대인 개인 배상의 근거를 마련했다. 서독은 이스라엘 정부에 34억 5천만 독일 마르크를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오늘날 대략 70억 유로에 달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이 금액의 2/3가 원자재, 기계, 선박 등 물품의 형태로 지급됐다. 그리고 나머지 1/3은 영국기업으로부터 원유를 사들이는 데 쓰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화석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나훔 골드만은 세계 유대인회의 의장 시절, 이 협정이 ‘정당한 형태의 구조 행위’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서독은 국민총생산량의 0.2% 이내의 저렴한 비용으로 연간 지급할 배상액 문제를 해결했다. 뿐만 아니라, 양국 간 관계가 개선됨으로써 독일은 수출부문 생산이 활성화돼 ‘경제적 기적’을 거두기까지 했다. 

 

전쟁 범죄를 덮기 위한 지원, 핵 개발에 쓰인 자금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군사적 측면에서도 유익이 컸다. 양국 사이의 ‘관계 정상화’ 덕분에 이스라엘의 군사적 입지는 신속히 강화됐다.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와 1967년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6일 전쟁)에 이르기까지, 서독은 프랑스와 함께 이스라엘 군대를 적극적으로 원조하고 나섰다. 이 두 국가로부터 효과적으로 군사원조를 받아낸 이스라엘의 지도자 시몬 페레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돈을 줬지만, 무기는 주지 않았다. 프랑스는 우리에게 무기를 줬지만, 돈은 주지 않았다. 반면 서독은 무기를 줌으로써, 나치 정권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덮으려 했다.”

서독 외교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원조는 1957년부터 시작됐다. 이 원조를 통해 소형 무기, 순찰선 및 훈련 프로그램 등이 이스라엘에 공급됐다. 양국 사이에 무기계약이 처음으로 체결된 1962년 이후로, 서독은 중포, 비행기, 헬리콥터, 선박 및 잠수함 등 다양한 전쟁무기를 이스라엘에 공급해왔다. 1964년, 미국 대통령은 서독 총리에게 미국을 대신해 이스라엘에 150대의 패튼 탱크를 추가 공급하도록 지시했다. 그 당시 미국은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중립적인 매개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에, 1967년 이전까지 이스라엘 국방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서독의 지원은 대단한 효과를 냈다. 1965년, 서독의 수도 본에 세워진 이스라엘 대사관에 취임한 초대 대사, 아셔 벤 나탄은 서독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중동에서 군사적 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며칠 만에 끝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끊임없이 주변국들의 정세를 살피고 있다. 서독의 이스라엘 원조는 이스라엘의 국가 발전에 엄청난 도움이 됐고, 군사적인 지원 역시 이스라엘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언급은 불과 2년 후 사실로 입증됐다. 1967년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은 불과 6일 만에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서독이 이스라엘군을 지원하는 일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48시간이 지난 뒤에 주(駐) 이스라엘 서독 대사가 서독의 본으로 한 통의 전보를 보냈다. 이 전보의 내용은 짧았지만, 당시 상황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수뇌부의 한 장교가 한 말에 의하면, 우리 독일이 이스라엘에 제공한 최첨단 기술의 장갑 탱크만큼 강력한 화력을 뽐내는 무기는 없었다."

이 전쟁은 당시 프랑스와 서독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막대한 지원을 퍼부었는지 잘 보여준다. 프랑스제 미라주 비행기가 공중전을 장악하는 한편, 독일제 전차는 이집트에서 벌어진 지상 전투 현장을 장악했다. 아랍 국가 대표들은 서독이 이스라엘에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좀처럼 불평하지 못했다. 

한편, 서독은 이스라엘에 6억 6,400만 독일 마르크를 대출해주는 형태로 경제적 지원을 했다. 이 거래는 ‘동업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이뤄졌지만, 무기 선적을 하듯 은밀한 계약 하에 진행됐다. 1965년 양국 간 외교 관계가 확립되면서 이 대출은 공식적인 개발원조금으로 전환됐다. 수십 년 뒤인 2015년에 친(親)이스라엘 계열의 독일 보수 신문 『디 벨트(Die Welt)』에 칼럼이 하나 실렸다. 칼럼의 주요 내용은 독일 국방부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핵확산 전문가, 한스 륄레의 충격적인 폭로였다. 륄레는 이스라엘이 서독으로부터 유입된 자금을 핵개발 프로그램에 전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서독이 수행한 역할을 고려해보면,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하지만 사실 여부 검증은 매우 어렵다.

 

우아하게 표현된 인종주의적 관점

서독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독일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대면하기도 전에 훨씬 빠른 속도로 전개됐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런 시차 속에서, 독일인들이 견지해오던 반유대주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갑작스러운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이 사례를 예증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을 피고로 한 전범 재판에서 독일 측 참관인 대표자 게하르트 폰 프로이쉔은 ‘이전 세대와 현격히 대조되는 전도유망한 이스라엘 청년들’을 찬양하며 최종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이 청년들(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 이민자들의 자녀들)은 일반적인 유대인들과는 외형이 다릅니다. 그들은 주로 큰 키에 파란 눈, 반듯한 이목구비를 지녔으며 유연한 동작을 구사합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대인의 특징을 새로운 형태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 ‘우아하게 표현된 인종주의적 관점’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인들의 다소 자기중심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즉, 히브리인을 아리아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역설은 양국관계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서독언론 중 특히 스프링거 그룹의 신문 지면에서 이와 비슷한 자기애를 엿볼 수 있다. 1967년에 발발한 6일 전쟁 관련 보도에서 이스라엘인들이 거둔 승리는 ‘빛나는 쾌거’로 찬사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모쉐 다얀 장군은 독일육군이 자랑하는 에르빈 롬멜 장군의 뒤를 잇는 장군으로 추켜세워졌다. 한편 패배한 아랍 군대는 경멸의 대상이 돼, 한때 독일인들이 전승 소식을 통해 누렸던 승리감의 향수를 한껏 불러일으켰다. 

이런 양국관계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 최초의 주 서독 대사이자 전 독일육군 장군으로서 철십자상을 받기도 한 롤프 파울스다. 그가 남긴 비망록에는 이스라엘인들과 나눈 대화 내용과 자신의 의견이 적혀있다.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돈과 권력에 결부돼 있다. 1965년,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상 돈만 밝힌다"라며 분노했다. 그러면서도 파울스는 "세계 여론 지형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크다"라고 확신하면서, 서독이 이스라엘에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서독이 경제적 지원을 차단한다면,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당장 뉴욕을 박차고 나와서, 예루살렘에서부터 런던까지 맹견들을 쭉 풀어놓았을 것이다.”

 

서독,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난민

서독이 이스라엘에 대해 취한 정책들은 오늘날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 정책을 비판하는 자들은 서독이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운명보다, 이스라엘의 안보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서독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와 후원은 윤리적인 측면과 무관했다. 서독은 이스라엘의 전후 복구사업과 군사력 확대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 한편, 서독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존재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은 물론 식민지 영토 내에서도 인구 이주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시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힘이 없는 이들이 처한 곤경까지 헤아릴 리 만무했다. 

오늘날 독일 정부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인도주의적 원조 체제를 구축하려면, 아랍 국가들 사이에 선의의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에 충분한 지원을 해줄지 독일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이 인도주의적 지원으로 인해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조심해왔다. 오늘날 독일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동(東)예루살렘을 포함한 지역을 스스로 방어함으로써 민족자결 정신을 추구하도록 장려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여전히 중요한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독과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를 변화시킨 첫 번째 전환점은 1967년의 6일 전쟁 직후에 찾아왔다. 이스라엘에 미국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배치되면서, 서독의 역할은 뒷자리로 밀려났다. 이런 양국관계는 냉전의 격변, 유럽 통합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베를린 장벽의 붕괴(1989년) 및 독일 통일(1990년) 등 주요 사건을 거치며 급격하게 변모하고 발전해왔다.  

 

 

글·다니엘 마르베키 Daniel Marwecki 
영국 런던에 있는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대학교 및 리즈(Leeds) 대학교에서 강사 및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Germany and Israel : Whitewashing and Statebuilding』(Hurst, 2020) 등이 있다. 

번역·이근혁 hunpirit@hanmail.net
번역위원


(1) 이 각주와 이후에 참조한 모든 내용은 저자가 출간한 다음 저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Germany and Israel : Whitewashing and Statebuilding, London : Hurst』, 2020년 4월 30일.

 

양날의 검이 된 할슈타인 원칙

독일연방공화국(옛 서독)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우방 국가였다면, 독일민주공화국(옛 동독)은 팔레스타인의 편에 섰다. 이런 외교적 균형은 냉전 과정에서 생긴 분열보다 더 많은 것을 반영해왔다. 서독이 시오니즘을 지지했던 반면, 동독은 극렬하게 시오니즘을 거부했던 것이다.

서독과 동독이 중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달랐던 것은 상당 부분 ‘할슈타인 원칙’에서 비롯됐다. 아데나워 수상 집권 시절, 외교부 장관이었던 발터 할슈타인이 1955년에 세운 이 원칙은 서독 정부로 하여금 동독을 제3국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동독에 각종 제재나 외교적 관계의 단절 등 ‘적대적인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이집트 나세르 주의자들이 이끄는 아랍 국가들에 위력적인 지렛대를 마련해줬다. 

이들 아랍 국가들은 서독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면, 동독을 외교적으로 승인하겠다며 서독을 협박할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본에 위치한 서독 외교부는 1956년 이후 이스라엘 정부가 독일과 외교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정숙한 면사포 차림으로, 이스라엘과의 대면을 피했던 것이다. 

 

글·다니엘 마르베키 Daniel Marwecki 

번역·이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