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군사 개입, 민중은 없다

2011-04-08     세르주 알리미

심지어 부서진 시계도 하루 두 번은 정확히 시간을 맞춘다. 미국, 프랑스, 영국이 리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허용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솔선수범해 수행한 사실이 리비아 체제를 단숨에 인정하지 않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공포정치 체제에 저항하는 비무장 저항운동은 때때로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국제경찰에 호소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불행에 온통 집중하는 비무장 저항운동은 국제경찰이 특히 팔레스타인이나 바레인 같은 다른 희생자들의 호소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국제경찰의 도움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비무장 저항운동은 국제경찰이 상부상조의 연합체라기보다는 억압적 군대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잊을 것이다. <<원문 보기>>
그러나 논리적으로 볼 때, 리비아의 저항 시민들이 극단적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아랍 영토에서 서구 열강의 새로운 전쟁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추락이라는 바람직스러운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개입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수단이다. 이 수단이 정당화된 명백한 이유는 ‘서구의 폭격’과 ‘리비아 시민의 짓밟힘’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택일하라는 독촉을 받음으로써, 유엔군이나 이집트군 혹은 범아랍군의 개입 같은 다른 해결 방법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서구가 과거에 행한 무모한 행동을 평가해보면, 그들이 현재 앞세우는 전반적 개입 동기는 전혀 신뢰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국가들이 (어떤 국가들인지는 차치하고) 다른 국가의 민주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자원과 군대를 희생한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최근의 역사는 그런 동기를 핑계 삼아 일으킨 전쟁이 처음에는 널리 미디어를 타는 만큼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만, 이어지는 다음 단계는 훨씬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가디슈·카불·바그다드는 이미 여러 해 전에 함락됐지만, 소말리아·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리비아의 저항 시민들은 이웃인 튀니지와 이집트처럼 자신만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뒤집고 싶었을 것이다. 프랑스·영국·미국의 군사 개입은 저항 시민들의 자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시민들을 강대국의 채무자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 상황에 대한 책임은 결국 국가원수인 카다피에게 있다. 반제국주의에서 서구에 우호적인 전제주의 통치로 이어지는 지난 40년간 카다피 체제의 광적인 억압이 없었다면, 또한 자신의 모든 반대자들을 ‘알카에다 스파이들’이나 ‘외국 정보기관에 협력해 돈을 받는 쥐새끼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격렬히 비난하지 않았다면 리비아 봉기의 미래는 오직 자국민의 손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리비아 폭격을 허용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1973호는 가난 때문에 벌어진 시민봉기를 카다피가 군사적 수단으로 진압하려는 것을 방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안보리 결의는 위선자들의 파티와 유사하다. 카다피 군대가 폭격을 받은 것은 카다피가 독재자 중에 가장 나쁘거나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질러서가 아니다. 군사적 공격에서 그를 보호해주거나 국제사회에서 그를 지켜줄 강력한 친구들이 없고, 핵무기가 없는 가장 약자였기 때문이다.

카다피에게 취해진 예외적 군사 개입은 ‘법을 위반하면 어디에서건 제재를 받는다’는 명백한 원칙을 제시하는 국제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외교적 세탁도 돈세탁과 마찬가지다. 한순간의 선행이 수십 년간의 파렴치한 행실을 무마해버린다. 프랑스 대통령은, 체제의 본질을 인정하고 2007년 자신이 환대한 예전의 사업 파트너에게 폭격을 가했다. 사람들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에게 지난 1월 제공한 ‘프랑스 군대의 노하우’를 카다피에게 제공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로마를 12번 방문한 리비아 지도자의 ‘절친한 친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마지못해 고결한 연합군에 합류한다.

미·영·프, 카다피가 만만했다

민주주의의 성장에 강력히 도전받는 노구(老軀)의 지도자들은 아랍연맹 내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미국의 최초 미사일이 발사되자마자, 아랍연맹은 재빠르게 유엔 활동에 합류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안보리 결의에 반대하고, 그 범위를 축소하거나 확전 위험성을 축소하기 위한 결의안을 수정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러시아와 중국은 무력 사용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국제 공동체’가 올바르고 완벽한 조처를 취하려면, 유엔 결의 1973호가 리비아의 임의 구금, 강제 이주, 고문, 약식 처형을 비난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관타나모, 체첸, 중국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지도 함께 지적해야 한다.
‘민간인 보호’도 절대적 요구 사항이 아니다. 민간인 보호를 위한다면 무장 분쟁이 발생한 시기에는 군사적 목표에 대해, 다시 말해 군인들에게 폭격해야 하는데 군인들 역시 비무장 시민들과 섞여 있다. 또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그 지역을 정찰하는 비행기들이 격추될 수 있고, 조종사들이 체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특공대들이 지상에 침투하는 일을 정당화할 것이다.(1)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어휘를 사용할 수 있지만, 끝없는 전쟁을 완곡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쟁은 그것을 결정하고 끌고 가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전쟁이 짧고 즐거우리라는 환상을 품으면서 그것을 요청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집에서 증오도 ‘실책’도 없는 완벽한 전쟁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할 임무를 부여받은 군대는 자신의 성향, 방법, 욕구에 따라 실행할 것이다. 후퇴하면서 기관총에 사살된 리비아 군인들의 주검도 벵가지의 환호하는 대중과 마찬가지로, 유엔 결의 1973호의 결과다.

리비아 사태 앞에 양분된 진보

전세계의 진보주의 세력은 리비아 사태를 두고 자신들이 억압받는 주민들과의 연대감에 강조점을 두느냐, 아니면 서구의 전쟁에 반대하는 데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양분돼 있다. 두 가지 판단 기준은 모두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기준이 동시에 만족되기를 항상 요구할 수는 없다. 선택해야 할 때는, ‘반제국주의자’라는 라벨을 국제 무대에서 획득한 인물이 국내 무대에서 자국민들에게 어떤 일을 겪게 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카디피가 내린 진압 명령에 대해 남미의 여러 좌파 정부(베네수엘라·쿠바·니카라과·볼리비아)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서구’에 대한 그의 저항이 진정성을 띤 것이 아닌 순전히 겉치레에 불과한 데 따른 당혹감 때문이다. 카다피는 자신을 희생자로 만든 ‘제국주의 음모’를 규탄하지만, 그는 이미 예전의 제국주의 열강에 “우리는 모두 대테러리즘 전투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정보기관들이 협조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 몇 년간 당신들을 많이 도와주었다”(2)라고 단언한 후였다.
우고 차베스, 다니엘 오르테가,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리비아 독재자는 자신을 공격한 이유가 ‘석유를 통제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석유는 영국의 BP, 이탈리아의 ENI와 미국 기업들에 의해 이미 개발됐다. 게다가 몇 주 전에 국제통화기금(IMF)은 ‘리비아의 훌륭한 거시경제 성과와 민간 부문 역할이 진전된 점’을(3) 높이 평가했다. 카다피의 친구 벤 알리도 2008년 11월 유사한 칭찬을 받았지만, 트리폴리에서 막 도착한 IMF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개인적으로 언급한 것에 불과했다.(4)
카라카스(베네수엘라 수도)와 아바나(쿠바 수도)에서 복원된 카다피의 혁명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며 고색창연한 면모는, 블레어의 ‘제3의 길’의 이론적 제공자인 앤서니 기든스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는 2007년 리비아가 조만간 “번영하고, 평등하고, 미래지향적인 북아프리카의 노르웨이”(5)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잘 속은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판단해볼 때, 리비아의 지도자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쳤다고 믿기는 어렵다.

카다피는 결코 차베스가 아니다

남미 좌파 정부들이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된다. 좌파 정부들은 그에게서 자신의 적(미국)의 적을 보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를 자신의 친구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다피에게 전화해 튀니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고 말할 정도로 차베스가 북아프리카에 무지했기 때문에, 남미 좌파 정부들은 ‘미디어가  조작한 엄청난 거짓 선전’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엄청난 거짓 선전을 들으면서 그들은 과거의 개별적 기억을 상기했는데, 그것이 리비아의 특수상황과 관계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나는 거기서 벌어지고 있고, 벌어졌던 일이 지난 4월 11일의 나, 우고 차베스를 왜 상기시키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2002년 4월 11일, 정보를 조작하면서 미디어가 지지한 쿠데타 세력이 차베스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그 밖에 다른 많은 요인이 리비아 상황에 잘못된 분석을 유도했다. 즉, 미국의 남미에 대한 수십 년간의 폭력적 지배와 군사적 개입에 의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해석, 베네수엘라가 아프리카에 뿌리내리도록 리비아가 도와주었다는 사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두 나라가 행한 역할, 좀더 밀접한 남-남 관계라는 의미에서 외교 균형을 다시 잡으려는 카라카스의 지정학적 움직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여기에다 자국이 다른 나라들과 선린관계를 맺는 것이 다른 나라 수반들과 개인적 친분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인식하는 차베스 대통령의 성향이 가미된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과 친구였다. 나는 카라카스 정상회의에 왔던 압둘라 왕과 친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으며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 카타르 국왕과 시리아 대통령의 친구인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도 여기에 왔다.” 카다피 체제가 국민을 억압하기 시작했을 때, 이런 우정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서 그렇게 오랫동안 내 친구였던 사람을 포기한다면 나는 비겁자일 것이다.”(6) 그러나 진정한 용기를 가졌다면, 아랍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이란, 시리아, 벨라루스에서도 그런 고려사항들을 무시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차베스는 아프리카 대륙의 시민봉기를 자신이 잘 아는 남미의 좌파운동과 유사한 것으로 제시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제국주의와 독재의 적대적 공생

외교는 모든 나라에서 의회의 모든 통제와 대중의 모든 표결과 무관한 불투명한 결정을 내리는 권력의 독단적 나쁜 버릇이 가장 잘 먹히는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안보리에서처럼 전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외교가 자부할 때, 전쟁과 민주주의라는 대조는 필연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끔은 천연자원 보호에 대한 진보적 논거와 반서구적인 지정학적 책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던 리비아 지도자는 오랫동안 종교 간 대립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던지려는 유혹에 빠졌다. 지난 3월 20일 카다피는 “서구 기독교 강대국들이 리비아 국민을 필두로 한 이슬람 국민에게 적대적인 제2차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목적은 이슬람을 지구상에서 말살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보다 13일 전에 카다피는 자신에 대한 공격을 팔레스타인 국민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작전에 비유했다. “가자지구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극단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전차를 동원해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 일부 리비아 군대가 알카에다의 소규모 그룹을 격파해야 했다.”(7) 아랍 세계에서 이 지도자의 대중성을 확대시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급작스러운 정책의 방향 전환은 적어도 한 가지 미덕이 있다. 이 방향 전환은 십자군전쟁과 제국들이라는 신보수주의적 주제를 앞뒤로 전도시키면서 재생산하는 담론의 정치적 유해성을 상기시킨다. 세속인들과 종교인들이 대립하고 있음에도, 아랍의 민중봉기는 반서구주의에 불과하면서 반제국주의라고 주장하는 담론에 종말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담론은 서구에 대한 증오에 싸여 강권통치, 원주민 경멸, 종교전쟁같이 서구에서 발견된 가장 나쁜 것들과 계몽철학에서 사회안전까지 서구가 허용한 가장 좋은 것들을 혼동하고 있다.

미래 선택의 주체는 아랍 민중

1979년 이란혁명이 발생하고 겨우 2년이 지나, 시리아의 근본주의 사상가인 사디크 잘랄 알아즘은 세속적인 민족주의와 혁명적 공산주의의 길을 거부하면서 종교적 진정성의 회귀를 통해 서구를 물리치자고 호소하는 ‘역오리엔탈리즘’의 특성을 상세히 설명했다. 질베르 아쉬카르는 이런 문화적 분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했다. “오리엔트의 해방 단계는 민주주의, 세속성, 여성해방과 같은 ‘서구식’ 가치 척도에 의해 측정돼서도 안 되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슬람 오리엔트는 서구 과학의 인식론적 도구로는 이해될 수 없다. 서구 현상들과의 어떤 유추도 적절하지 않다. 이슬람 대중을 움직이는 요인은 문화적인 것, 다시 말해 종교적인 것이다. 종교적 중요성은 서구의 정치적 역동성을 결정짓는 경제적·사회적 요인들을 초월한다. 이슬람 국가들이 르네상스로 가는 유일한 길은 이슬람을 통해서다. 결국 ‘이슬람으로의 회귀’ 깃발을 흔드는 것은, 서구 시각에서 볼 때처럼, 억압적이거나 반동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의 문화적 지배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진보주의적이다.” (8)
정치에 대한 이런 근본주의적 접근은 아직 유효할 것이다. 튀니지에 몰아닥친 충격의 물결 이후 이런  접근이 ‘서구에 반대하는 것도 서구를 섬기는 것도 아닌’,(9) 즉 어중간한 상태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은, 때로는 미국의 동맹국(이집트)을 때로는 미국의 적대국(시리아)을 표적으로 삼는 아랍 사람들에 의해 본격 시작되었다. 더 이상 아랍 사람들은 개인 자유의 옹호, 양심의 자유, 정치적 민주주의, 그리고 노조활동과 여성운동이 보편주의를 가장한 서구적 가치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노회한 지도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들어가는 경찰국가적 체제, 사회적 불공정, 전체주의에 대한 거부를 표시한다. 아랍 사람들은 또 다른 거대한 혁명적 충동을 상기시키는 모든 일을, 나아가 사람들이 흔히 다른 이유 때문에 잠시 잃었던 사회적·민주주의적 성취를 이뤄내는 데 열정이 있다. 서구가 50보나 100보로 그저 똑같은 일이 연속 반복되는 ‘암종병’에 걸린 것 같은 아랍 정치 체제에 공포와 무기력증으로분열된 바로 그 순간에도…

글 · 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번역 ·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각주>
(1) 이 점에 대해 필리프 레이마리의 ‘리비아, 비행금지구역의 쟁점’ 참조. http://blog.mondediplo.net/2011-03-07-Libye-Exclusion-disent-ils.
(2) 주간지 <주르날 뒤 디망슈>와의 대담, 파리, 2011년 3월 6일.
(3) ‘국제통화기금이 카다피를 극찬하다’, <르카나르 앙셰네>, 2011년 3월 9일.
(4) www.dailymotion.com/video/xgkt4x_strauss-kahn-ou-le-genie-du-fmi-soutient-ben-ali_news 참조.
(5) 앤서니 기든스, ‘카다피 대령과의 한담’, <가디언>, 런던, 2007년 3월 9일.
(6) 2011년 2월 25일, www.aporrea.org/actualidad/n175812.html.
(7) <프랑스24>, 2011년 3월 7일, www.dailymotion.com/video/xhey3a_interview-de-kadhafi-07-03-2011-pour-france24-part-2-2_news.
(8) 질베르 아쉬카르, ‘회귀하는 오리엔탈리즘: 1979년 이후 프랑스 오리엔탈리즘의 몇 가지 경향’, <무브망>, 54호, 2008년 2월, 라데쿠베르트, 파리.
(8) 알랭 그레슈, ‘깨어나는 아랍인들 서구 지배 전략을 흔들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 지난 3월 19일 발표된 담화에서 레바논 헤즈볼라의 사무총장 하산 나스랄라는 “미국이 아랍 혁명들을 조작하고 이끌고 유발시킨다는 모든 비난은, 아랍 사람들이 볼 때 불공정한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