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지키려면 임금 깎아라? 캉드쉬, 궤변의 경제학

2011-04-08     프레데리크 로르동

유럽 부채 위기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유럽이사회가 열리기 전날인 3월 23일, 포르투갈 의회는 복지예산 삭감을 통한 적자 감축안을 부결했다. 그러나 유로존 국가는 고집스럽게 현 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긴축’이라는 쓴약만 처방하고 있다.

민간금융 위기의 해결책으로 전례 없는 ‘공공’ 재정 긴축을 시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이번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경쟁력 강화 협정’을 들고 나왔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를 들고 나오는 역설적인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장기적 경기변동에서 비롯된 위기 속에서 경제정책의 기본 원칙을 반성하기는커녕 실패한 정책을 더욱 옹호하는 형국이다. 재정 적자를 감축해야 한다는 원칙에만 사로잡혀 실패가 예견되는 긴축정책만으로도 모자라 그것의 법제화를 강요하고 있다. ‘긴축은 성장 전략의 하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장관이 ‘Rilance’(Rigueur+Relance: 긴축+성장) 같은 신조어까지 만드는 해프닝을 벌여도, 유럽 경제가 이들이 원하는 바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부인할 수는 없다. 유럽의 정치가들이 처음으로 의견 일치를 본 셈이다. 문제는 다 함께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성장 없는 긴축, 경기 침체 불 보듯

과거 긴축정책이 이따금 성공을 거둘 수 있던 것은 금리 인하, 통화가치 평가절하가 함께 이루어졌거나 경제성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게 불가능한 현 시점에서 ‘전례 없는’ 긴축재정 정책을 유럽 전체로 ‘전례 없이’ 확장한다면 부정적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다시 한번 경기가 침체될 것이다. 설사 예산 적자 감축 노력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부채 증가 속도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이 부진한 상황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 현재 추진 중인 긴축정책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 은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다.
유로존 정부들은 자신의 정책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재정위기(그리스, 아일랜드 등)를 관리할 목적으로 마련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이 2013년 종료되더라도 범유럽 상설 구제금융기관인 유럽안정화메커니즘(ESM)을 도입해 장래의 국가 디폴트에 대응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정치적 장애물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지원금을 받는 국가의 ‘도덕적 해이’ 가능성을 이유로 자금 운용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지원 가능성만 믿고 재정에 신중을 기하지 않는 국가가 생겨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프랑스는 독일이 받아들일 만한 반대급부를 생각해냈다. 구제금융기관을 설립하는 대신 지원제도 남용을 막는 규제 장치를 도입하도록 제안한 것이다. 이로써 공공재정 균형을 위한 조처가 법제화되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비논리적인 조처는 곧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과학(혹은 지혜)의 권위로 다시금 포장된다. 미셸 캉드쉬는 그중 한 명으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최근 사람들의 입맛에 꼭 맞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위원장직을 떠나 장기간 휴식을 취한 그가 다시 무대로 복귀한 것이다. 그의 논리적(?) 주장을 한번 살펴보자. “재정 적자와 부채 문제를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국가 복지제도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체제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정치인들이 시장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국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1)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의 전제에 위배되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 전제란 사회복지제도의 체계적인 해체와 국가조직법(2)에 구속되는 재정 관련 법안들의 한계를 말한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펼치고 있는 논리에 충실한 미셸 캉드쉬의 보고서는 중요한 가치를 수호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가치에 역행하는 처방을 권고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간접적 방법을 통한 사회보장제도 해체가 정면 충돌보다 효과적임을 깨달은 신자유주의자들은, 복지국가가 스스로 허리띠를 졸라매도록 유도함으로써 결국 민간금융에 손을 내밀게끔 만드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복지 지출의 강제적이고 무리한 삭감은 이미 파리원호의료센터(AP-HP)의 경우처럼, 민간서비스 수요 증가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수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민간기업들의 서비스 혜택을 누려본 소비자는 공공서비스의 질 낮은 서비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어쨌든 현재 사회복지 관련 새 기본법에 구속되는 공공재정법이 사회복지제도 해체 프로그램 속에 ‘합법적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부는 ‘프랑스의 사회복지 모델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사회보장 해체 위한 우회 전략

캉드쉬 보고서는 국가 재정 정책을 금융시장의 지배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동시에 금융시장에 모든 것을 내주는 조처나 다름없는 재정 관련 법제화를 주장함으로써 극단적인 논리적 모순을 보인다. 재정 균형을 위한 법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태도에 투자자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이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국회가 구제자금 집행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마치 자동적인 집행이 보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12년 발효를 목표로 2007년 의결된 재정 균형을 위한 정부조직법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법을 어길 것인지, 아니면 1929~33년의 대공황을 재현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만 강요하게 될 것이다. 캉드쉬 보고서는 ‘신뢰성’ 회복을 절대명제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자 동의를 구하는 것’이 신뢰성이라면 이는 완전한 복종과 다름없다. 투자자로부터의 독립을 원한다면 항상 그들의 손익만 염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캉드쉬는 이미 저지른 역사적 오류로도 모자라 새로운 오류를 계속 범하고 있다. 기독교도인 그는 오류를 범하면 사과할 줄도 안다. 가령 그는 러시아에 경제자유화를 강요하고 그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회제도를 해체하도록 함으로써 러시아 경제를 파탄시킨 책임을 인정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우리는 캉드쉬가 다시 한번 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지 모른다. 물론 현재는 “공공재정 균형만이 정의와 독립이라는 원칙하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열쇠”(3)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다. 일반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겪은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화려한 수사가 먹히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게 전부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캉드쉬 보고서는 충격의 연속이다. 민간금융에 제공하는 선물 보따리 속에는 ‘경쟁력 강화 협정’(4)도 포함돼 있다. 재정 긴축만으로는 ‘충격요법’ 효과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정 긴축 프로그램을 법제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유럽연합은 사르코지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의 주도로 경쟁력 강화 협정을 추진해 이미 실현한 ‘진보’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려 한다. 긴축재정 실패 가능성에 대한 자기고백이나 다름없는 이 협정은 현 위기의 책임이 민간금융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신자유주의 개혁 범위를 최대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번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재정 지출보다 세수가 더 빨리 줄 것

각국 정부는 재정지출 감축보다 세수 감소가 더 빠르게 진행될 경우 효과적인 재정 긴축을 위한 기초가 흔들릴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경기부양 대책 없이 어떻게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각국은 경쟁적으로 인플레이션 억제에 열을 올리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미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성장 없이 고용시장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혹은 수출만으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식의 (혹은 둘이 결합된 형태의) 상상적 해결책으로 등장한 바 있다. 영리한 독자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경우 전략적 변수는 다름 아닌 노동력 가격이다. 인플레이션과 연동되지 않는 임금 산정,(5) 퇴직 연령 67살로 연장(기업이 지급하는 총임금 중 사회보장 기여금 감축 효과) 등의 정책이 추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이를 위해 ‘협력’과 ‘합의’에 성공한 과정은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물론 이 합의는 부정적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다.
지난 20년간 각국이 경쟁적으로 추진해온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은 원래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만 초래했다. 우선 고용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임금 삭감에만 의존할 경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수요 감소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묘연해진다. 더욱이 현재의 생산력 가동률은 77%에 불과하다.(6) 유럽연합의 자기파괴적 정책은 이뿐만이 아니다. 유럽연합은 모든 회원국이 독일만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각국의 경쟁력과 임금은 서로 동등하지 않으며 인플레이션 억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이 정책이 모든 국가에 일반화된다면 기대한 이익이 모두에게 돌아갈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으로 귀결된다.

‘경쟁력’의 다른 이름, ‘임금 삭감’

각국 정부들은 이런 문제를 경시한 채 ‘경쟁력’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이 한마디면 임금과 생산력 등 고용시장을 둘러싼 모든 조건- 화폐, 법, 관례, 경쟁, 물적 조건- 과 관련한 사항을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 간 ‘공조’라는 핑계 아래 지속적인 상호감시 체제가 일반화되고 있다.(7) 유럽연합의 공식 성명에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됐다. 그 속에 사용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노동력 단가도 검토 사항에 포함’, ‘임금 결정 과정을 다시 검토할 것,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 협상 프로세스와 임금 산정 메커니즘의 통합 정도를 검토할 것’, ‘공공부문에서 타결된 임금협상안이 민간부문 경쟁력 강화 노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할 것’, ‘교육 시스템 개선을 위한 특정 개혁안에 동의’, ‘퇴직연금, 건강보험, 복지 서비스의 지속성’ 등. 완곡어법으로 표현했지만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실제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긴축재정’(사실상 복지국가 해체)과 ‘경쟁력 강화’(다양한 방법을 통한 임금 삭감)라는 두 가지 집착이 지금까지 경제정책에 질곡으로 작용해왔다. 지난 3월 11일 발표한 유로그룹(Eurogroup)의 성명은 지금껏 들어본 성명 중에서 가장 심각한 편에 속한다. ‘긴축을 통한 균형 찾기’라는 방식 자체가 만들어놓은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 우선 단기적으로, 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가정해야 한다. 은행들의 단독 혹은 연쇄 부도 가능성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이런 위험은 압류를 통한 국유화를 단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8) 공공재정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이다. (캉드쉬도 찬성하지 않을까?) 현재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은행·금융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기적으로는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국가 부채 위기 속에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한 자금 조달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부차적으로 신용평가회사의 위상 문제와도 직결된다.

지금이 은행·금융 개혁 적기

신용평가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한다면 결코 부차적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면 시장은 곧바로 동요하며 긴축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신용평가의 적실성을 논하는 것은 시장 논리, 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믿음과 의견에 지배당하는 시장에서 신용평가회사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주식의 미래 가치에 대한) 평가를 생존 근거로 삼는 금융계에서, 분업 논리에 의해 그 평가를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가 출현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재의 신용평가회사 빅3(9)가 문을 닫는다고 가정해보라. 아마 6개월도 안 돼서 새로운 신용평가회사가 출현할 것이다. 문제는 신용평가회사가 내리는 ‘판결’이 금융시장 투자자의 움직임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실제로 그 판결을 실현시킨다는 데 있다.
시장 논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시점에 신용평가 기준을 문제 삼는 것은 회계기준을 문제 삼는 것만큼이나 부차적인 문제에 속한다. 공공재정 자금 조달을 위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 두 가지 문제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은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 얼마나 큰 해악을 가져올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가령 (중앙은행을 통한) 유동성 투입이나 금융시장 외부 통로를 이용한 저축예금 동원 등의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10)
경쟁력과 관련해서는 우선 노동자 임금을 고려해야 하고, 환율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독일은 유로존에서 탈퇴하고 마르크를 다시 사용할 경우 마르크 통화가치가 상당히 높게 책정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지난 10년간 임금 디플레이션 덕분에 누릴 수 있던 행복한 시절과 작별해야 한다. 일찍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소비자물가와 연동해 환율을 계산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이를 위해 (일종의 세계은행인) ‘국제청산동맹’(ICU·International Claearing Union) 설립을 제안했다. 금융시장은 구조적으로 통일적인 자기조정을 수행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해야 한다. 금융시장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결정은 위험하다. 주기적으로 시장을 불안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투기를 억제하려면 제도적·정치적 교정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케인스의 혜안 “무역수지 국제 관리”

케인스의 ICU는 국제수지 적자에 대한 자금 조달 방법과 환율 조정을 위한 제도적 메커니즘을 제안한다. 각각의 국가는 국제수지 적자 혹은 무역 흑자 쿼터를 할당받는다. 적자폭이 할당량의 4분의 1을 초과한 국가는 통화가치를 5% 혹은 그 이상 평가절하하는 것이 허용된다. ICU 설립 제안의 가장 획기적인 장점은 무역수지 흑자 국가를 직접적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역수지 흑자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경쟁력 강화만을 외치는 시대착오적 중상주의자만 가질 뿐이다. 이 흑자는 대부분 일방적이고 경쟁적인 전략을 통해, 즉 타국에 불이익을 안겨주는 방식을 통해 얻어진다. 그 예로 독일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임금 디플레이션을 이웃 유럽 국가들의 희생으로 상쇄하고 있다. ICU는 흑자 상한치를 미리 규정하고 흑자국에 일종의 누진세를 적용한다. 이 국가들이 일방적인 무역 전략을 자제하고 자국의 국제수지를 조정해 이웃 국가들의 적자를 줄이는 데(혹은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환율은 정부기관의 인위적인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통화가치의 인위적인 평가절하가 주기적으로 통화시장에 몰고 오는 혼란을 예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통화가치 결정을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국제 통화시장에 ICU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해도 최소한 유로존에서만이라도 공동통화 정책에 반영할 수는 있다.(11) 대외적으로는 유로를 유럽의 공동통화로 사용하고 유럽 내부에서는 국가별 통화를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국가별 통화와 유로 대비 환율을 미리 고정하지 말고 ICU 같은 제도적·정치적 메커니즘을 통해 조정해가면 된다. 물론 공동통화 정책만으로 수출을 통한 기적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독일의 무역 흑자 1200억 달러(12)를 모든 유로존 국가에 재분배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유럽 경제위기의 진원지인 그리스·포르투갈·아일랜드처럼 무역 적자에 시달리는 국가들(13)에 통화가치 절하로 경제성장 가능성을 찾고 공공부채 비율(14)을 현실적으로 줄여갈 일말의 가능성을 제공할 수는 있다. 무엇보다 유럽연합 국가 간 경쟁을 지금과 다른 관점에서 사고하고 조정함으로써 퇴행적인 ‘유로 협정’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혹자는 지금까지 열거한 대안들이 현재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현재의 조건들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 앞으로 12개월 혹은 18개월 뒤에 일반화된 긴축재정의 부조리함이 드러나고 GDP 대비 부채비율이 계속 상승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투자자들은 그때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동시적인 디폴트 사태가 발생하고 금리가 치솟는 상황이 닥쳤을 때 EFSF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지난해 12월과 비교해봐도, ‘유로존 해체’라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현실성이 있다. 독일식의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우리 앞에 개혁을 위한 새로운 페이지가 열릴 것이다.

글 · 프레데리크 로르동 Frederique Lordon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공공재정 안정을 위한 법적 제도 확립’, 미셸 캉드쉬를위원장으로 하는 연구팀 발간 보고서, p.4, 2010년 6월 21일.
(2) 캉드쉬의 제안을 살펴보면, ‘공공재정 프로그램 기본법’(LCPFP)은 헌법에 의해 국가조직법으로 규정된다. 이 법은 개별 금융 관련 법의 상위 법으로서 일정 기간 재정 균형 목표치를 강제할 수 있다.
(3) id., p.36.
(4) 경쟁력 강화 협력보다 조금 더 완화된 내용의 ‘유로 협정’이 3월 11일 유로그룹 정상회의에서 발표됐다.
(5) 포르투갈, 벨기에, 룩셈부르크에서는 아직 시행 중이다.
(6) 2010년 말 기준이다. 2007년 가동률은 85.4%였다(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자료).
(7) ‘거시경제 관리의 새로운 틀’, 유로그룹 성명, 2011년 3월 11일.
(8) 여기서는 다소 거칠게 표현했지만, 이 아이디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언제까지 은행들을 구해줘야 하는가?’, La pompe ? phynance, http://blog.mondediplo.net을 참조할 것.
(9) 스탠더드앤드푸어스, 무디스, 피치.
(10) ‘빚쟁이의 국적을 따진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호 참조.
(11) Aurélien Bernier, <유럽연합에 반항하라>, Mille et une nuits, 파리, 2011, Jacques Sapir. <탈세계화>, Seuil, 파리, 2011 참조.
(12) ‘Eurostat 2009’ 자료.
(13) ‘2009년 현재, 세 국가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각각 11%, 10.31%, 2.94%.
(14) 포르투갈에 대한 신용평가 점수는 ‘경제성장률 미달’을 이유로 계속 하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