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티를 재창조하라

우리를 해방시킬 상호관계성

2020-04-29     에블린 피에예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생태계가 파괴되고 현재의 ‘시스템’이 곤경에 처하면서, 새로운 경향이 등장했다. 이 경향은 인간의 자연 지배를 거부한다. 이와 함께 ‘이기적 유전자’의 근거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생명체가 상생하는 힘을 예찬한다. 인류학을 재정립하려는 이 계획은 모두를 해방시키는 정치적 운동이 될 수 있을까?

 

G5(프랑스의 예술 프로젝트로, G5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 기계의 5가지 생명체계를 상징한다-역주)의 최근 공연에서 로시오 베렝게르는 생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세계 최초의 종간(Interspecies) 법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로시오 베렝게르는 “인간이라는 개념에는 오만함이 존재하며, 그 개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의 지평”(1)을 열어보고자 한다. 같은 취지로 브장송 국립연극학교는 연극·영화·학회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이 프로그램들에 대한 소개는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인간이 이 지구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구가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두 부류가 너무 오랫동안 논쟁만 해온 게 아닐까? 예술이 이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하고, 우리에게 공동의 미래를 되돌려줄 수 있다면?”(2) SF 소설가인 알랭 다마지오 역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관계”라고 역설한다. 동시에 “동물, 식물, 자연이 외적으로 한데 엮이는 것”(3)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타성과 평등을 열망하고, 인간과 다른 세계와의 단절에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대처할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현재 ‘인류세(Anthropocene)’에 와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들을 과감하게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류세’는 불과 20여 년 전 제기된 개념이나, 그 의미는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는 현재 새로운 지질시대에 진입했으며, 인간과 인간의 활동이 지구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해석한다. 기후와 환경 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관련 분석들을 통해 과거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였던 인간은 이제 ‘잠재적 파괴자’이며, 그런 만큼 인간의 위상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경향이 등장했다. 더불어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인간중심 체계는 흔히 서양사회의 전유물이자, 자본주의와 동일시되는 근대성의 개념으로 여겨졌다. 또한 인간이 다른 생명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낡은 이념이 팽창했다. 이에 맞서, 인간중심 체계를 거부하고 인간의 독재를 규탄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결집했다. 이런 운동들은 ‘자디스트(Zadiste; 개발 지연 지역(Zone d'Amenagement Differe)의 약자 ZA를 지켜야 할 지역(Zone à Defendre)으로 바꿔 사용하는 프랑스 근본주의 환경운동가들-역주)’에서 ‘케어(보살핌)’ 지지자, 다른 생물 종에 대한 인간 종의 우위를 거부하는 반(反)종차별주의자, 자연파괴와 여성억압에 반대하는 생태 페미니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생명체 내에서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공동의 미래를 위해 고민한다.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공정한 관계들이 다시 맺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요즘 유행하는 소위 ‘온정’과 타자에 대한 열린 마음, 연대의식으로 인해 세상은 마침내 생명력을 얻었다.(4) 

이런 세상을 향한 긴장감이, 운동가들만의 것은 아니다. 환경 등 많은 것들이 위협받고 있는, 불평등하고 불안한 사회 속에서 이런 긴장감은 곳곳에 퍼져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과학사 전문가인 도나 해러웨이, 농업 기술자이며 콜랩솔로그(Collapsologue; 산업문명의 붕괴와 이를 계승할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역주)인 파블로 세르비뉴,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 사회학자 알랭 카예,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등 수많은 지식인들을 통해 오늘날 이런 요구의 확산을 뒷받침해온 것은 ‘인간의 개념’이다. 

 

“생명이란 하나의 협력체” 

‘인간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을 우선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비난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기반에 새로운 가치관의 자리를 마련할 ‘종’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성’이 확인되면 비로소 새로운 존재론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5)에 의하면 생물학은, 생명이 “상호관계성, 다양성, 협력, 항상성 및 공생”을 근간으로 하고, 박테리아에서 식물까지 생명체 전체가 존재해야 인간의 생명도 존속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생명이란 하나의 협력체다.”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상호의존성과 ‘상호연결성’은 “각 생명체가 서로의 미래의 가능성을 상호 강화하기” 위해 “다른 피조물과 유기체(식물, 동물, 미생물)에 대해 일종의 계약을 맺음”으로써 “협력관계를 바로잡고 구축하도록” 유도한다.(6) 그러나 인간은 자아에 갇혀 자신만이 특별하고 우월한 생명체라고 자만하며, 이 세상을 강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전쟁터로 바라본다. 이런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이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소위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에 맞서는, 오래된 개념을 내세울 수 있다. 그것은 ‘상부상조’와 ‘협동심’이다. 지금까지 과소평가돼왔으며, 심지어 자본주의 이념으로부터 무시당해온 이 능력은 ‘지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인류에도 존재하는 한 가지 특성에 불과하다. 이 주장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반대되며,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인간사회의 자연선택 이론을 새로운 인간의 관점으로 바꾼다. 즉 경쟁을 선호하는 인간의 성향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협력의 힘을 재평가하는 관점이다. 이런 주장은 흔히 인지과학 및 생물학 분야에서 파블로 세르비뉴와 고티에 샤펠(7) 같은 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들로 뒷받침된다. 이들은 ‘인간의 자발적 상부상조’ 정신이 생물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마르셀 모스는 모든 인간 사회가 시장이나 계약이 아닌 ‘주기, 받기, 되돌리기’라는 3중 의무의 지배를 받는다고 가정하며, 알랭 카예는 이 이론을 근거로 삼는다.(8) ‘인간 본성’의 개념은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일부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단호하게 반박하고, 더 이상 ‘선’과 ‘악’ 같은 도덕적 이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대신 유전자를 포함해, 사회라는 틀과 이념을 작동시키는 잠재성 전체로 정의되는 개념으로 구상된다.  

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19세기에 이미 상호의존과 연대의식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눈부신 성공을 거둔 바 있다.(9) 생시몽주의라는 개혁주의 사상의 주창자인 생시몽 공작,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1760~1825)는 사회에 ‘유기체’라는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즉, 결속과 협력이라는 기관의 법칙에 따라, 어떤 기관도 다른 기관 없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 피에르 르루(1797~1871)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 및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한 인간과 연결된 타인과 세계가 그의 존재를 결정하고 드러내며, 스스로를 드러내준다.”(10) 그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연대정신은 인간의 의무”

정계에서는 이런 주장이 더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가령, 급진사회당의 탁월한 당원이자 수차례 총리를 지낸 레옹 부르주아(1851~1925)는 ‘연대주의 사상’을 주장했다.(11) 모든 인간은 인간 집단에 빚을 지고 태어나며 이 채무에는 권리와 의무가 포함된다. 모든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우애의 관계, 이것이 바로 연대정신이다. 레옹 부르주아는 누구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국가가 사회의 보호원칙을 세우고 퇴직 노동자 단체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개념을 대표적으로 반영하는 인물은 아마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21)일 것이다. 그는 무정부주의 전투적 이론가이며 노동자 자주관리를 주창한 주요 사상가다. 크로포트킨은 각 종에서 “상부상조가 일반적 법칙”이며 “자연을 지배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상호 공감의 본능”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박애의 감정과 자신을 집단과 부분적으로 동일시하는 감정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감정이 정의, 평등, 헌신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12)

그는 다시 자연에 관한 고찰로 돌아와서 이렇게 진단했다. “경쟁은 없다! (…) 덤불과 숲, 강과 바다는 우리에게 이런 강령을 제안한다. 단결하라! 상부상조 정신을 실천하라! 그것이 바로 개인과 모든 인간에게 최고의 안전, 신체적·지적·도덕적 진보와 존재를 최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13) 크로포트킨은 현대 문명에 매우 비판적이고, 혈연 및 지연사회가 축적한 부에 촉각을 세웠다. 그런 그가 성공의 모범 사례로 제시한 것은 바로 길드를 통해 우애를 유지한 중세시대였다. 

현재 수많은 주제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런 개념들을 모든 생명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반 서양 숭배 사상(Anti-occidentalisme)으로 낙인찍힌 것들도 있다. 이 주제의 공리적 ‘논거’와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상부상조 및 협력 정신을 넘어 주류를 이루는 것은 ‘상호관계성’이다. 상호관계성에는 계급을 구축하는 규범들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담겨있다. 상호관계성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계급이란, 인간의 오만에서 양분을 흡수한 배타성이기 때문이다. 상호관계성을 위해서는, 나와 남, 합리와 비합리, 개인과 집단, 현대사회와 고대부족사회를 가르는 해묵은 대립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

이 상호관계성은 애니미즘을 숭배하는 집단이나 대지, 지구 등 계몽주의가 무시해온 것들을 작동시킨다.(14) 이때 중요한 것은, 브뤼노 라투르의 표현을 빌면 ‘행동의 힘’을 파악하는 것이다.(15) 상호관계성은 생명론을 표방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 주목한다. 신자유주의 질서를 따르는 ‘세계화된’ 세상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대개 역동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난다.(16) 

어떻게 해야, 이런 사실과 발견을 집단적 정치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모두가 행복한 해방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본주의와 결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해방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결정된 삶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이 생산적 활동보다 우선시돼야 한다”고 본다. 이 해방된 공간에서 ‘나’는 자신을 ‘자기 자신을 넘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다수의 자손들로 구성된 존재’로 인식한다.(17)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상호협력과 개별성의 발현, 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우선 지역적 차원에서,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 조심스럽게, 하나씩 실현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이다. 그것은 영적이고, 때로는 과학만능주의로 포장되는 범신론에 가까우며, 극도로 서정적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생명과 상호연결성에 대한 존중은 무엇에 대해, 무엇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해방자 역할을 할 것인가? “매혹적인 낙관주의로 무장한, 인간중심에서 벗어난 이 전환점이 자본주의가 결정한 상황들을 바꾸는 과정에서 드러난 정치적 무능력의 증상에 지나지 않았다면?”(18) 두 에세이스트는 이 전환점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회의 불의, 착취, 소외에 맞선 투쟁은 상호관계성을 찬양하는 목소리에 가려 자취를 감춘다. 정신의 고양, 알랭 카예를 인용하자면 ‘이해타산의 공리’를 거부하는 이런 선동의 목소리는 진보를 거부하는 회의론자, 감정적인 몽상가, 계급투쟁을 희석하는 생명공동체에 소속된 열성분자들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반면, 유물론적 시각은 이런 목소리에 비판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생하는 세상을 향한 열망이 담긴 이 목소리는, 진보주의 세력의 쇄신에 일부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문학과 음악 비평가. 극작가 겸 영화배우. 격주간지 <La Quinzaine littéraire>에도 비평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 ‘L'inconnue de Strasbourg’(1998)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북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 ‘Ya bon les blancs’(1988, 프랑스)에는 배우로도 출연한 바 있다. 저서는 『Le Grand Théâtre』(2000),  『L'almanach des contrariés』(2002), 『Une histoire du rock pour les ados』(Edgard Garcia 공저, 2013) 등.

번역·조민영 sandbird@hanmail.net
번역위원


(1) Catherine Mary, ‘Rocio Berenguer, chorégraphe de l’après-anthropocène 로시오 베렝게르, 포스트 인류세 시대의 안무가‘, <르몽드>, 2020년 2월 8일.
(2) <Habiter les possibles. Anthropocène #1 가능성을 살다. 인류세 1막>, Les 2 scènes - Scène nationale de Besançon, 5월 18일까지. 
(3)  Alain Damasio, ‘Le transhumanisme est une impasse totale 트랜스휴머니즘은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있다‘, <Le Point>, 2019년 4월 19일.
(4) Clothilde Dozier, Samuel Dumoulin, ‘la bienveillance, cache-misère de la sélection sociale à l’école ‘격려중심교육’이 만든 과잉친절학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9년 9월호.
(5) Glenn Albrecht, 『Les émotions de la Terre 지구의 감정』,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20년.
(6) Donna Harraway, ‘Réparer la Terre à l’ère du chthulucène 슈툴루센의 시대에 지구를 고쳐라‘, 20 penseurs pour 2020, <Philosophie Magazine Editeur>, Paris, 2019년.
(7) Pablo Servigne, Gauthier Chapelle, 『L’entraide. L’autre loi de la jungle 상부상조. 정글의 또 다른 법칙』,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9년.
(8) Alain Caillé, 『Extensions du domaine du don 증여영역의 확장』, Actes Sud, Arles, 2019년.
(9) Marie–Claude Blais, 『La solidarité. Histoire d’une idée 연대의식. 개념의 역사』, Gallimard, Paris, 2007년.
(10) Pierre Leroux, 『De l’Humanité, de son principe et de son avenir 인간성에 관하여, 인간의 원칙과 미래에 관하여』, Miguel Abensour et Patrice Vermeren, Fayard, Paris, 1985년.
(11) Léon Bourgeois, 『Solidarité 연대』, Le Bord de l’eau, Latresne, 2008년.
(12) Pierre Kropotkine, 『L’éthique 윤리』, Stock, Paris, 1979년.
(13) Pierre Kropotkine, 『L’entraide, un facteur de l’évolution 상부상조, 진화의 요인』, Ecosociété, Paris, 2001년. / Renaud Garcia, 『Pierre Kropotkine & l’économie par l’entraide 표트르 크로포트킨 & 상부상조에 의한 경제』, Le passager clandestin, Paris, 2019년.
(14) Philippe Descola, ‘Les Natures en question 문제의 자연’ 학회, Odile Jacob 기획, Paris, 2018년.
(15) Emanuele Coccia, ‘Gaïa ou l’anti-Léviathan 가이아 혹은 안티리바이어던‘, <Critique>, n° 860–861, 2019년 1-2월호.
(16) Serge Halimi, ‘Notre utopie contre la leur 우리의 유토피아 vs 그들의 유토피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8년 5월호.
(17) Jérôme Baschet, 『Une juste colère. Interrompre la destruction du monde 정당한 분노. 세상의 파괴를 중단하라』, Divergences, Paris, 2019년. 
(18) Léna Balaud, Antoine Chopot, ‘Suivre la forêt 숲을 따라서’, <20 penseurs pour 2020>, op. cit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