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장의 상업화, 남루해지는 삶의 뒷모습
“각자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해보기 바란다. 이데올로기적인 선입견을 배제하고, 민영보험 등을 비롯한 그 어떤 해법도 빠뜨리지 마라.” 지난 2월 8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복지 방안’을 주제로 열린 한 토론회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렇게 주문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재원 마련에 사회보장제도 대신 민영보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사르코지 대통령은 현재 유럽연합에 불고 있는 사회보장제도 민영화 바람에 동참했다. 하지만 연대주의에 의거한 지원 메커니즘, 그 가운데서도 상호주의 운동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우수한지는 역사가 입증해주고 있다. 200여 년 전에 탄생한 상호주의 운동은 민주주의 가치와 가입자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국가 가치의 체계적 해체
역사적으로 볼 때, 보험이 여러 사회국가 탄생에 초석이 된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된 사회보장제도는 연대주의 모델(Solidarist Model)이나 상호주의 모델(Mutualist Model)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 모델에 수단을 제공한 것이 보험이었다. 덕분에 과거 민법에 따라 책임관계를 묻던 관행에서 벗어나 사회 전체가 책임을 분담하는 ‘사회화’ 제도가 확립될 수 있었다.(1) 그럼에도 1980년대까지 보험 용어는 기술적 또는 행정적 차원에서만 사용됐을 뿐이다. 연대성 개념도 1896∼1914년 갑작스레 관심이 증가했던 시기(이때 공화국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규정된 사회적 주체를 상호의존 관계로 묶어 결속시키려 했다)를 제외하고는,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2) 그러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대성 개념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장 사뮈).
연대성 개념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보험 운용 논리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새로운 버전의 연대성 개념에서, 유럽의 여러 지도자가 말하는 위험이란 처음에 사회보장제도 창시자들이 생각한 가치나 원칙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위험은 일종의 가정으로, 실질적인 발생 가능성에 대해 평가 과정을 거치는 대상이다. 한편 기술적 측면에서 위험은 보험회사가 구축한 오성의 영역으로, 보험사는 액운을 비롯한 개인의 체험을 완전히 객관적인 돌발 사건으로 치부함으로써 이를 손해 책임 분담 원칙에 의거해 관리하려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위험은 그저 하나의 관리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화를 토대로 한 사회보장제도의 설립 취지를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이 결코 아닌 셈이다. 위험은 수단에 불과하기에 실제 추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으며, 위험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집단적 권리와 관련한 사회보장 영역을 전부 아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험으론 아우를 수 없는 연대성
한편 위험과 보험이라는 개념만으로는 집단적 권리와 관련한 사회보장 영역의 급여 수준이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집단적 영역의 사회복지는 만인에게 제공해야 하는가, 아니면 일정한 계층에게만 국한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위험과 보험이라는 개념만으로는 통합적인 제도를 구축할 수 없다.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보호할 수 있는 영역(질병·출산·노령·장애·산재·직업병·가족부양) 외에 공공서비스나 노동법에 의거해 보호해야 하는 영역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사람 고려하지 않고, 사랑도 없고
상황이 이런데도 오늘날 위험과 보험이라는 개념은 만족스럽고 합당한 판단 기준인 양 인식되고 있다. 탈산업화 사회의 ‘복지국가’(Etat-Providence) 위기를 해결할 해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경제학자 프랑수아 에발드와 드니 케슬레르는 이런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위험이 “최고의 가치”라고 치켜세운다. 또 “현시대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인식의 핵심”이요, “정치제도의 원칙”이라고 말한다.(4) 사회학자 피에르 로장발롱도 “보험 운용의 논리가 사회계약의 근간”이라고 주장한다.(5) 그가 말하는 “거대 이데올로기나 거대 서사가 붕괴”된 환멸의 시대에는 그 무엇도 합리화 과정을 막을 수 없다. 사법은 물론 행정, 심지어 정치까지 객관적인 법칙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여기에는 개인에 대한 고려도, 증오도, 고로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적 선택은 역사적 필연으로 해석된다. 위험 관리와 정치 활동 목적 자체만이 중요한 이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최소주의로 치닫는 사회보장
정작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한결같은 방향으로 변화해온 사회보장제도는 비록 형태는 다양할지언정 오히려 19세기 최소주의 복지 정책과 맥을 같이한다. 요즘 유럽국들은 집행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부조 논리에 따라 극빈곤층에게만 최소한의 복지 혜택과 급여를 제공하는 최소주의 복지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업·질병·노령 등을 대상으로 한 기존 사회보장 영역은 축소되고, 대신 공제조합 같은 부수적 제도 이용이 확대되거나 민영저축과 보험시장이 발달하고 있다.
원칙과 규칙, 가치의 공론화 시급
오늘날 보험을 다루는 고위 지도층은 ‘매우 특별한 구심점’ 역할을 하거나 ‘권력과 정보의 교차점’에 위치한다.(6) 이에 매료된 에발드는 자신의 학문을 총동원해 보험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 열심이다.(7) 에발드를 주축으로 하거나, 또는 그와는 독립적으로 보험이라는 개념과 직업이 얼마나 훌륭하고 합리적인지를 증명하려는 진정한 지식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투쟁은 결실을 맺기도 한다. 최근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신사회위험’(New Social Risks)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신사회위험이라는 다의적인 개념에는 빈곤, 소외, 자율성 상실, 한부모가정, 고용 (부)적격성 등 참으로 다양한 의미가 함축돼 있다. ‘탈산업화’ 사회로 이행하면서 나타난 이 현상들은 위험 범주를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사회보장과 사회적 권리를 총체적으로 손질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는 합리성(철학가 에드가 모랭도 합리성이란 “현실에 대항하는 이념이라는 만능 무기”라고 지적한다)만을 고려한 기술적 차원의 손질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어떤 판단 기준으로도 사회질서 재편이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이 말한 것처럼 왜 취약한 영역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확대시키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어찌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는, 몰락한 사회적 주체들을 교묘한 방식으로 감시·통제하거나, 강제로 사회적 부조에 기대어 살아가게 만듦으로써 고용 불안정을 제도화하는 것일까?
그러니 이제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원칙과 규칙, 가치 등을 공론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개인이 운명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 더욱 자율적인 위상을 부여받을 수 있는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논의 과정이 없다면, 결국 오늘날 부활한 연대성 개념은 그저 국민의 합의를 피해가기 위한 술수에 불과할 뿐이다.
글 · 노엘 뷔르기 Noёlle Burgi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소르본 사회 정치과학 유럽센터 연구원. 주요 저서로 <소외 기계: 고용 복귀라는 환상>(라데쿠베르트 출판사·파리·2006)이 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프랑수아 에발드, <복지국가>, 그라세 출판사, 파리, 1986.
(2) 마리 클레르 블레, <연대성: 사고의 역사>, 갈리마르 출판사, 파리, 2007.
(3) 크리스토프 라모, ‘사회국가론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보험 운용 논리의 공헌과 한계’, <Revue française des affaires sociales>, 파리, 제1호, 2007.
(4) 프랑수아 에발드·드니 케슬레르, ‘위험과 정치의 결탁’, <르데바>, 제109호, 파리, 2000년 3~4월.
(5) 피에르 로장발롱, <새로운 사회문제>, 르쇠유 출판사, ‘Points-Essais’ 총서, 파리, 1995.
(6) 제라르 크넬·드니 케슬레르, ‘CNRS 연구직에서 MEDEF 회장직까지(1976~98)’, 박사예비과정(DEA) 논문(정부(정치제도) 섹션), 파리1대학.
(7) 에드가 모랭, <방법>, 제4권, <관념>, 르쇠유 출판사, 파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