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이후 예술계의 아름다웠던 시도

2020-04-29     에블린 피에예 l 기자

과거를 잊어버리기에 앞서 몇 가지 사건을 되새겨 보자. 1929년에는 다들 기억하듯 대공황이 있었다. 공포영화 제목처럼, 흔들리는 대문자로 쓰인 그 ‘대공황’ 말이다. 1933년에는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뉴딜 정책을 펼쳤다. 뉴딜 정책이 혁명은 아니었다. 새롭게 뜯어고치기만 하는 일이었다. 다만, 강력하게 해야 했다. 엄청난 변화가 필요했다. 당시 경제활동 인구 중 1/4이 실업 상태였고, 미국인 200만 명이 이재민이었으며, 사람들은 말 그대로 굶어 죽었다. 파업과 시위도 잦았다.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에서 묘사한 바에 의하면, 도로에는 대규모 이주행렬이 이어졌다.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 가뭄과 모래 폭풍 때문에 농경지를 잃은 중부지방 사람들이 과수원의 땅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루스벨트는 국가가 경제 분야에서 제어장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국가개입주의는 큰 혼란을 가져왔다. 국가가 농산물 가격, 대형 국책 사업 그리고 최저임금, 퇴직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자본주의를 폐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규제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와 관련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하워드 진은 뉴딜 정책이 “제도의 기둥들을 흔들 만큼 상당히 대담했지만, 그 기둥들을 대체할 만큼은 아니었다”라고 평가했다.(1)

기존 체제 옹호자들은, 효과적인 대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기 위해 침묵을 이용한다. 이 전략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1936년, 재당선 전날 루스벨트가 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그들은 나를 증오할 때 만큼은 모두 한마음이 된다. 나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한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기존 체제 옹호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효과적인 대안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하려고 침묵을 이용한다. 뉴딜 정책은 예술가들에게도 손을 뻗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음악가, 조형예술가, 작가, 연극인, 사진가도 급여를 받았다. ‘사회복지제도 수혜자’ 수를 줄이고, 대중교육 안에서 예술을 대중화하며, 국가문화를 창조하는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기억되는 예술가들 중 사진 작가 도로테아 랭이나 사진 저널리스트 에번스 워커 등에게는 대공황의 실상을 알리는 임무가 주어졌다. 향토색 짙은 그림들, 멕시코 벽화에서 영감을 받은 프레스코화들은 우체국을 미화했고, 국민을 찬양했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데쿠닝과 함께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들도 두각을 나타냈다. 마거릿 워커, 리처드 라이트, 대문호 랠프 엘리슨, 솔 벨로우 등 작가들은 지역을 소개하는 책자, 노예와 인디언이 등장하는 옛날이야기 모음집, 연대기 등을 자유롭게 제작했다.(2) 

사람들이 거의 접하지 않던 연극도, 전투적이고 춤이 곁들여진 뮤지컬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노조원이 극본을 쓰고 초반에 노동자들이 출연했었던 <Pins and Needles(핀과 바늘)>는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며 브로드웨이 대표작이 됐다. 또한, 오슨 웰스가 연출한 연극으로 브레히트 스타일(독일의 극작가,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고,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극화했다-역주)이 짙게 배인 <The Cradle will rock(요람은 흔들린다)>은 상연이 금지됐음에도, 당당히 무대에 올라 가치를 증명했다. 피아니스트와 작가만이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었고, 극장에 몰래 숨어있던 연기자들은 노래를 부를 때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악 부문에서는, 로맥스 부자(존과 앨런)의 블루스 곡, 노동가, 흑인영가가 가장 유명했고(3) 록 가수들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스벨트에게는 자본가 외에도 남부의 민주당원이라는 또 다른 적이 있었다. 이들은 뉴딜 정책이 너무 반(反)인종차별주의적이며, ‘빨갱이들의 음모’라고 규탄했다. 사실, 미국의 공산당이 여러 해 전부터 지식인들을 비롯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매우 우세했기 때문에 뉴딜 정책 전체가 가능했던 것이다. 보조금을 줄이고자 했던 반미활동위원회는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예술산업 관련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다시 민간자본을 찾아 나서야 했고, 자신들의 ‘구매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1950년대에는 정보기관 CIA가 예술가들을 맡았다. CIA는 유럽 내에 공산주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수집가들 그리고 언론과 함께 영리한 작전을 계획해, 자본주의 미국은 폴록을 위시한 가장 전위적인 예술에 열려있다는 인식을 심어 놓았다. 이것은 대단하면서도 조금 우울한 이야기인데, 추후 다시 언급하겠다. 우리는 연민과 관대함이 넘쳐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친절한 후원자들은 노트르담 성당에 기부하는 것일까? 병원에 기부하면 세금감면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문학과 음악 비평가. 극작가 겸 영화배우. 격주간지 <La Quinzaine littéraire>에도 비평 기사를 쓰고 있다. 영화 ‘L'inconnue de Strasbourg’(1998)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북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 ‘Ya bon les blancs’(1988, 프랑스)에는 배우로도 출연한 바 있다. 저서로는 『Le Grand Théâtre』(2000),  『L'almanach des contrariés』(2002), 『Une histoire du rock pour les ados』(Edgard Garcia 공저, 2013) 등이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Howard Zinn, ‘Beyond the New Deal’, The Nation, 2008년 3월 20일, 『Se révolter si nécessaire, Textes et discours (1962- 2009) 필요하다면, 반항하라: 원고 및 연설』, Agone, Marseille, 2014년.
(2) Jerre Mangione, ‘The Dream and the Deal’, The Federa Writer’s Project, 1935-1943, Syracuse University Press, 1996년.
(3) Alan Lomax, 『Le pays où naquit le blues(The Land Where The Blues Began)』, Les Fondeurs de briques, Saint-Sulpice,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