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주의적 지식인들의 ‘사르트르 거부’

사르트르 사후 40주년

2020-04-29     안 마티외 l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학과 부교수

1980년 4월 19일, 장폴 사르트르의 장례식에는 거의 1세기 전 빅토르 위고가 사망했을 때만큼이나 수많은 애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르트르의 타계로 앙가주망(참여)을 표방하거나, 혹은 관습의 코르셋을 거부하던 시대는 이내 막을 내린 듯 했다. 결국 지식인의 세계는 미디어 노출을 일삼는 진영과 학계의 폐쇄성을 지향하는 진영,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지만 두 진영 모두, 사르트르식 지식인 모델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그야말로 ‘사르트르의 역설’이라고 할까? “철학자, 비평가, 소설가, 극작가, 사상의 모든 전선에서 전방위 활동을 보여준 종합 지식인”(1)의 현신이 사후 조국에서 명성에 적합한 위상을 누리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한층 더 역설적인 사실은, 오히려 국외에서는 여전히 그의 사상과 저술에 높은 평가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프랑스가 순응주의(획일주의)의 등불로 자신을 비춰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현 프랑스 사회의 순응주의는 심지어 (사이비) TV·라디오 토론회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지 못할 만큼 견고하다. 편협한 자, 인습에 젖은 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끊임없이 투쟁하고 위험을 감행한 자와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사르트르를 ‘프랑스적’ 참여지식인의 대명사로 인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유일하게 모두가 동의하는 그의 작품은 『말 Les Mots』(1961) 정도에 그친다. ‘작가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작품에는 수많은 해설이 뒤따랐는데, 이는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실상 작가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한 서술이 담긴 이 자전적 소설은, 누구에게도 불편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유일사상을 표방하는 자들은,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사르트르를 혐오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게 해줄, 그를 ‘장신구 상점’에 처박아버릴 구실임을 알아차렸다.

 

그를 향한 비난과 혐오의 시선들

사르트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적 인물로 치부된다. 심지어 ‘뼛속까지 오류 투성이’, ‘지극히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2) 여기서 잠시 이 『자유의 길 Chemin de liberté』의 저자가 세상을 떠나고 수년 후,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기 오켕겜이 남긴 깊은 울림을 주는 글귀를 살펴보자. 

“그대의 인색하고, 빈약하고, 청교도적이고, 공론가적인 영혼은 수없이 사르트르를 향한 살의를 품어왔다. 하지만 그대가 그를 부인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그를 생생하게 깨어나게 할 뿐이다. 그대가 그를 떼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는 세차게 그대의 목을 옥죄어온다. 그리고 그대를 함께 죽음의 늪으로 끌고 간다. 진정한 사르트르는 그대가 그토록 그를 가둬놓기 원하는 변절과 배반의 무덤에서 홀연히 깨어나곤 한다.”(3)

만일 생전이었다면 모두가 대적하기를 두려워했을 사르트르지만, 1980년 타계 이후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르트르를 향한 대표적인 비난 중 하나는, “문학에는 도통 재주가 없는 철학자”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중고생 수준의 이런 농담이 대학가에서 널리 유행했다. 급기야는 대학교수들에게까지 전염돼, 일종의 학설로 둔갑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문학 자체만 놓고 보면,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그의 첫 소설 『구토 La Nausée』(1938)나 중편 소설집『벽 Le Mur』(1939), 혹은 안타깝게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3부작 장편소설 『자유의 길 Chemin de liberté』(1945~1949) 정도는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모두 다 다채로운 문체와 서술방식을 자랑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영원토록 지성과 인격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칠, 모든 종류의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보편성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이런 요소들이야말로 걸작의 특징 아니겠는가.

그의 희곡 세계는 또 어떤가? 다채롭고, 창의적이며, 시의성 있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닫힌 방 Huis clos』(1944)이나 『더러운 손 Les Mains sales』(1948)은 오늘날에도 무대 위에 오르고 있다. 또한 『네크라소프 Nekrassov』(1956)나 『알토나의 유폐자들 Séquestrés d'Altona』(1959) 등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는 문제작들이다. 전자가 언론의 기만적 행태와 무분별한 교조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면, 후자는 폭력으로 얼룩진 시대, 목적과 수단의 문제에 대해 깊은 경종을 울린다.

 

“작가는 침묵 또한 책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연히 정치적 성격의 글들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정치 텍스트는 가장 논란이 무성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불편한 상황 속에 존재했기에, 지금까지도 불편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는 1945년 <현대 Les Temps modernes>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변했다. 

“작가는 자기 시대라는 상황 속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반향을 일으킨다. 때로는 침묵도 마찬가지다. 나는 플로베르와 공쿠르가 파리코뮌 이후 탄압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탄압을 막기 위해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그들의 일은 아니었노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칼라스 재판이 볼테르의 일이었던가? 드레퓌스 사건이 졸라의 일이었던가? 콩고 문제가 지드의 일이었던가? 이 작가들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저마다 작가로서 책임을 다했다.”(4)

제2차 세계대전은 사르트르가 본격적으로 사회참여(앙가주망)에 뛰어드는 전기가 됐다. 1939년 9월 참전 후 1940년 6월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힌 사르트르는 트리어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그는 동지애와 형제애를 경험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바리오나, 혹은 천둥의 아들 Bariona, ou le Fils du tonnerre』이라는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41년 3월 그는 민간인으로 가장한 덕분에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이후 파리로 돌아가서는 사회참여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한동안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이름의 지하단체를 결성해, 자유지역(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비시 정부의 관할권에 있던 독일군 비점령지역-역주)으로 앙드레 지드와 앙드레 말로를 찾아가기까지 했다. 그가 쓴 희곡작품, 『파리떼 Les Mouches』는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의 저항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43~44년, 사르트르는 자크 드쿠르와 장 폴랑이 은밀히 설립한 전국작가위원회의 기관지 <레트르 프랑세즈 Lettres françaises>의 활동에 동참했다.(5)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사르트르는 조르주 폴리체도, 클로드 부르데도 아니었다. 의외일 수 있겠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어떤 정치적 지평도 보여주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증언하든, 그가 중편소설 『벽』의 저자라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그는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들에 철저히 무관심했다.(6) 

사르트르가 보부아르에게 보낸 편지들만 참고해도, 그가 처음으로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뮌헨회담 두 달 전인 1938년 7월이라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그들은 인민전선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에 이토록 정치에 무관심했던 탓에 그는 평생 젊은 시절의 교우, 니장의 유령만 쫓으며 사는 인물로 간주된 것이다. 사르트르와 달리, 니장은 1920년대 말 일찌감치 사회참여에 온몸으로 투신했다.

사르트르는 1948년 2월 민주혁명연합(RDR) 집행위원회에 합류했다. 그 전에 다비드 루세를 비롯한 좌파와 극좌파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한데 뜻을 모아 이 정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당을 떠난 후(1949년 10월) RDR도 유명을 달리했다. 사실상 RDR은 사르트르가 직접 정당 활동에 참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1952년 중순부터 1956년 말까지, 사르트르는 경찰탄압과 사법탄압을 몸소 경험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 공산당(PCF)의 적극적인 동조자로 변신했다. 사실 그전까지 그는 PCF에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작가연맹 의장이 1948년 그를 ‘타자를 치는 하이에나’라고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1956년 11월, 그는 결국 소련이 헝가리 혁명을 무력진압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내 PCF와 결별을 선택했다. 늘 그렇듯이 그가 쓴 신문 사설에는 대개 당시 그가 교우하던 인사들이 선호하는 단골 주제와 어휘들로 가득했다. 가령 1955년 프랑스와 소련에서 발표한 글들은 골수 공산주의자들에 버금가는 수사들이 넘쳤다. 그럼에도 그 시절 그가 쓴 신문 사설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지도층이나 언론의 기만적 행태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모든 독자들은 우리가 정부 정책을 얼마나 해롭게 여기는지, 또한 그런 정책에 영감을 준 이들을 얼마나 경멸하는지 이미 여실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임무는 그 사실이 진실임을 끊임없이 입증하는 데 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은 오로지 진실을 입증할 때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비도를 범죄자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다면, 그를 중대 죄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의 손에 묻은 피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의 눈에 낀 티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용어의 문제일 뿐이다.”(7)

 

인생 최대의 투쟁, 알제리 반전운동

PCF와 함께 한 마지막 몇 달은 공교롭게도 사르트르가 알제리 전쟁에 저항해 반전운동을 벌이던 시기와도 겹친다. 알제리 반전운동은 사르트르 인생 최대의 대대적 투쟁을 의미했다.(8) 그의 맹렬한 반식민주의, 역사적, 지성적, 윤리적 책임 앞에 프랑스인을 가차 없이 세우던 그의 냉혹한 연설. 실상 이는 평생 그가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거짓으로 가장된 순진무구함, 회피, 불성실, 고독, 침묵, 애초에 부인했다가 결국엔 모두가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공모행위. 사실상 이 모든 것은 바로 1945년 우리가 집단책임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당시 독일의 국민들이 수용소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당시 우리는 “제발! 저들은 이미 전부 알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옳았다. 저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야 우리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제는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어찌 우리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어찌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인가?”(9)

어떤 이들은 사르트르가 당시 거의 추방자로 통하던 마르티니크 섬 출신의 정신과 의사이며 저술가인 프란츠 파농과 교우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사실상 사르트르는 제3세계주의의 교본으로 통하는 파농의 저서『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Les Damnés de la terre』(1961)에 서문을 헌사했다. 서문에서 그는 그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오만한 나라의 거짓말을 정조준했다. “참 말은 청산유수이지 않은가? 자유, 평등, 박애, 사랑, 명예, 조국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러나 그런 것들도 결국엔 우리가 더러운 깜둥이니, 더러운 유대인이니, 더러운 쥐새끼(북아프리카 아랍인을 의미하는 속어-역주)니 하는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쏟아내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한다.”(10)

 

“까뮈에 대한 암살 미수”라는 죄목 씌워

사르트르의 급진성과 전복성은 실상 문학과 언론시장의 소유주들이 그에게 보이는 분노를 잣대로 평가된다. 저들은 셀린느에게도 그토록 맹렬한 분노를 퍼붓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셀린느는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훌륭한 문체라는 면죄부를 얻어 구원받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압제자들에게 맞서 항거한 이들과 우애를 나누는,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비방은 날개 달린 말처럼 순식간에 천 리까지 내달렸다. 수많은 ‘살롱의 검객’ 중 한 유명한 논객은 사르트르에게 “카뮈에 대한 암살 미수”라는 죄목까지 씌워 비판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배경은 알제리 전쟁이었다. 

식탁에는 다시금 저 유명한 “결코 틀리는 법이 없는 철학자(카뮈)”(11)라는 요리가 선을 보였다. 저들은 개인적 상황의 특수성을 들어『이방인 L'étranger』의 작가의, 중대한 역사적 현안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정당화했다. 반면 민중의 자결권을 요구하는 용맹한 투쟁(심지어 위험한 투쟁이었다. 극우세력이 사르트르의 집에 플라스틱 폭탄 테러까지 벌였으니 말이다)은 멸시했다. 언론은 이를 그가 프롤레타리아 좌파 마오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던 1970년, 비양쿠르의 한 공장 앞 드럼통 위에서 했던 연설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기회로 악용했다. 

몇 달 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자, 제도권 어용지식인의 종결자로 통하는 칼럼니스트 자크 쥐리야르는 <피가로>에 사르트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난을 쏟아놓았다. “형편없는 소설가, 차마 무대에 올릴 수 없는 망작만 내놓는 극작가, 말만 장황할 뿐 독창성은 찾아볼 수 없는 철학가. 사실상 그는 모든 독재정권을 예찬한 절대자유주의자이자,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모든 살육을 정당화한 고매하신 영혼이다. (...) 자유주의 정권을 엄혹하게, 때로는 광적으로 대했으며, 작가로서 양심의 가책을 드러내는 것을 마치 지적 안이함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처럼 여기던 자의적 사기꾼이다. 사실상 사기는 그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자들을 양산한 유일한 분야이기도 하다.”(12) 

대체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사르트르를 비판하는 것일까?

 

변화는 ‘아니요’라는 외침에서 시작된다

‘사르트르를 위한 정치적 변론’(13)에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의 작품을 ‘상황 속’에서 이해하고, 그의 작품이 지닌 오류나 극단성, 약점만이 아니라 탁월함, 타당함, 시의성까지도 고루 평가하는 것이리라. 시의성이라니 뜬금없다고 생각하는가? 참여지식인이라는 모델이 오늘날 시대착오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1983년, 사르트르 타계 3년 후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식인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지식인을 빛내주던 (...) 모든 시대적, 구조적 상황은 오늘날 사라져가고 있다. 국가 관료주의의 압박, 언론과 문화시장의 달콤한 유혹은 지식인의 장, 지식인을 재생산하고 온전히 평가하는 고유의 장으로부터 자율성을 빼앗았다. 이런 현실은 사르트르식 지식인 모델에 담겨 있던 희귀하고 소중한 가치,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적’ 규범에 맞서는 가치를 위협한다. 그것은 세속적 특권(일례로 노벨상)과 권력은 거부하고, 모든 한시적 권력에 맞서 당당히 ‘아니요’를 외칠 수 있는 지식인 고유의 특권은 긍정하는 태도일 것이다.”(14)

현재 우리가 지켜볼 수 있는 사르트르를 향한 거부는 동전의 양면처럼, 밝은 빛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TV 화면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비양심적 사이비 지식인들. 그런 이들에게 사르트르는 오로지 자신의 사상과 연구, 저술, 결단에 의해서만 지식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잦은 방송 출연과 넓은 인맥으로 지식인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고, 사회 투쟁과 권리 주장은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용인할 수 있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결코 나지막하게 ‘좋아요’를 속삭이는 것만으로는 공익을 위한 어떤 변화도 끌어낼 수 없다. 모든 변화는 단호하게 ‘아니요’를 외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모든 투쟁의 시초에는 언제나 거부가 존재했다. 사르트르를 거부하는 지식인과 언론인들도 내심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르트르의 말을 왜곡하고, 수치스럽게 억압하는 것은 모든 관습과 권력의 지배에 저항할 수 있는 우리의 자유를 훼손하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말이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게 만들어, 결국 본래 말의 뜻을 왜곡하려는 처사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했듯, 진정한 지식인의 책무란 때로는 말을 ‘장전된 권총’처럼 사용하는 데 있지 않은가.  

 

 

글·안 마티외 Anne Mathieu
로렌대학 문학·저널리즘학과 부교수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14) Pierre Bourdieu, ‘Sartre, l'invention de l'intellectuel total 사르트르, 종합 지식인의 탄생’, <Libération>, 1983년 3월 31일, Agone 출판사에서 재출간, 제26~27호, 2002년.
(2) Claude Imbert, ‘Sartre, la passion de l'erreur 사르트르, 오류를 향한 열정’, <Le Point>, 2000년 1월 14일.
(3) Guy Hocquenghem, 『Lettres ouverte à ceux qui sont passés du col Mao au Rotary 마오 고개를 넘어 로타리 클럽으로 넘어간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86), Contre-feux 총서, Agone, Marseille, 2003년.
(4) Jean-Paul Sartre, ‘Présentation des Temps modernes 현대지 창간사’, <Les Temps modernes>, 1945년 10월 1일(『Situations II상황 2』, Gallimard, Paris, 1948년에 재인용)
(5) Michel Contat, Michel Rybalka, 『Les Ecrits de Sartre 사르트르의 글』, Gallimard, Paris, 1970년. Annie Cohen-Soal, 『Sartre 사르트르』(Gallimard, Paris, 1985년)도 참조.
(6) Anne Mathieu, ‘Jean-Paul Sartre et l'Espagne : du “Mur” à la préface au Procès de Burgos 장 폴 사르트르와 스페인 : “벽”부터 부르고스의 재판 서문까지’, <Roman 20-50>, 2007년 6월.
(7) Jean-Paul Sartre, ‘A nos lecteurs 우리 독자들에게’, <Les Temps modernes>, 1954년 5월.
(8) ‘Jean-Paul Sartre et la guerre d'Algérie 장 폴 사르트르와 알제리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4년 11월호.
(9) Jean-Paul Sartre, ‘Le colonialisme est un système 식민주의는 시스템이다’, <Les Temps modernes>, 1956년 3~4월호, (『Situations V상황 5』, Gallimard, Paris, 1964년에 다시 실음)
(10) Jean-Paul Sartre, Frantz Fanon, 『Les Damnés de la terre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서문, Cahiers libres, Maspero, Paris, 1961년(앞의 책『Situations V상황 5』에 재게재)
(11) Michel Onfray, ‘La tentative d'assassinat de Sartre contre Camus 카뮈를 향한 사르트르의 암살 시도’, <Le Point>, 2012년 1월 5일 ; ‘Le philosophe qui ne s'est jamais trompé. Comment Sartre a tenté de la tuer 결코 틀리는 법이 없었던 철학자. 어떻게 그를 사르트르가 살해하려 했는가’, 위와 동일.
(12) Jacques Julliard, ‘Pourquoi les intellectuels n'aiment pas la liberté 어찌하여 지식인들은 자유를 좋아하지 않는가’, <Le Figaro>, 2019년 7월 1일.
(13) Ian H. Birchall, 『Sartre et l'extrême gauche française 사르트르와 프랑스 극좌세력, La Fabrique, Paris,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