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러리로 전락한 부헨발트의 반파시스트들
강제 수용소 해방 75주년
1945년 4월 독일 바이마르에 있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나치 체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오랜 시련이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수감자들 가운데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동독 잔류라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대가로 목숨을 건지고 영웅적 서사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동독 정권이 그토록 찬양했던 그들의 행동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다시 심판대에 올랐다. 그리고 냉전의 승리자들은 또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추모는 정치적 행위다. 특정 의도를 감추기 위해 진부하고 반복적인 미사여구들로 치장된 지루한 연설이 이어진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해방 75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새로운 실험이 시도됐다. 1월 27일에 열린 추모식에서, 관련국들은 각자의 목표에 근거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표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지브 스터넬은 “올해의 유대인 학살 추모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는 구실로서 이용됐다”라고 비판했다(<Haaretz>, 1월 31일).(1)
역사의 증언에만 동원되는 고통과 투쟁의 당사자들
유대인 생존자들은 이미 들러리 역할로 밀려난 지 오래다. 이 모든 이벤트를 공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유대인 생존자들의 고통과 투쟁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 가장 먼저 해방을 맞았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두 번째 추모식이 4월에 열릴 예정이었다(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취소됨). 기념관이 위치한 튀링겐 주에서는 지난해 10월에 열린 주의회 선거에서 31%를 득표한 좌파당(Die Linke)에 이어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3.4%의 득표율로 제2당이 됐다.
AfD 의원들은 강제수용소가 있던 부헨발트, 다하우,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는 말들을 노골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의 관장인 볼크하르트 크니게는 “역사적 의식 약화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지적했다(독일 주간시사잡지 슈피겔, 2020년 1월 23일).(2) 물론 그렇다. 그러나 부헨발트 기념관 건립을 비롯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에 이뤄진 반파시즘 투쟁들이 이 역사적 의식 약화에 기여한 부분은 없는지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냉전 시대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부헨발트의 역사는 당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1937년 7월에 완공된 부헨발트는 나치가 세운 최초의 강제수용소 중 하나다. 이 수용소는 1945년 4월 11일 바이마르로 진군하던 미군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정상 운영됐다. 본래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같이 나치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부헨발트 수용소에는,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나치 친위대원들이 많은 유대인 가게를 약탈 및 파괴하고, 유대교 회당에 불을 지른 밤-역주)’에 체포된 1만여 명의 유대인들, 집시,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그리고 나치 체제가 ‘반사회적 인물’로 꼽은 이들이 수용돼 있었다.
우선 슈츠슈타펠(친위대)은 일반인 수감자들에게 수용소 내부의 행정을 맡겼다. 이는 1942년 정치범 수감자들이 잔혹한,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던 투쟁 끝에 이 일반인 수감자들의 권리를 빼앗을 때까지 지속됐다. 친위대는 수용소 수감자들을 전쟁물자 생산에 동원시키겠다고 결정하면서, ‘붉은색 삼각형’ 패치를 단 수감자들이 관리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3) 그 후 이들은 전략적 요직에 배치됐다. 예를 들어 수감자들을 다양한 작업반에 배정하는 일, 대량학살을 위해 유대인과 집시들을 평균 생존기간 2주인 도라 수용소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송하는 일 등이다. 이처럼 정치범들은 수감자들의 생사에 대해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을 소유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세계 각국의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이 부헨발트에 수용됐다. 프랑스인 2만 6,000여 명과 다수의 소련군들이 있었다. 그 중 8,483명은 친위대에 의해 즉결처형됐다. 8,000명 규모로 설계된 부헨발트 수용소는 전쟁 막바지에는 과밀 상태였다. 소련 붉은 군대의 진격으로 1944년 가을부터 동부에 위치한 수용소들의 수감자들을 강제이주시켰는데, 이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전부 부헨발트 수용소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1945년 1월 당시 부헨발트 수용소의 수감자는 무려 10만 명이었다. 미군이 부헨발트 수용소에 진입했을 때 생존자는 2만 1,000명에 불과했다. 반란의 기회를 엿보면서 은밀하게 활동 중이던 레지스탕스 세력은 최후의 친위대원들을 붙잡아 미군 측에 넘겼다. 이를 주도한 것은 대다수가 공산주의자인 독일의 정치범 수감자들이었다.
“발트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이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우고 있다.” 1946년 3월 5일 윈스턴 처칠의 이 연설로 냉전 시대가 시작된 직후, 미군 출신의 역사학자인 도널드 로빈슨은 ‘부헨발트에서 자행된 공산주의적인 잔혹 행위(Communist Atrocities at Buchenwald)’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시 새로운 힘의 균형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유럽에서 이 보고서는 반소련 정서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부헨발트에 수용됐었던 사회학자 오이겐 코곤(비 공산주의자)이 1946년에 발표한 책 『Der SS-Staat 친위대국』이었다.(4) 코곤은 수감자들 간 알력과 힘의 관계, 그리고 독일 정치범 수감자들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를 억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상세히 묘사했다.
1949년 10월에 탄생한 동독의 새로운 정부는 반파시즘 활동가들의 투쟁을 기반으로 수립됐다. 구소련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독일의 동쪽 영토를 장악하게 된 이 활동가들은 레지스탕스 운동의 후예를 자처하며 반파시즘의 영웅적 서사를 만드는데 몰두했다. 이들은 레지스탕스를 국교처럼 받들면서 1958년 지어진 부헨발트 수용소를 일종의 성지로 내세웠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평화와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했던 1945년 4월 19일 ‘부헨발트 선언’을 기념하는 행사를 매년 성대하게 개최했다.
‘부헨발트의 아이’, 동독 선전도구로 전락
그러나 수용소의 생존자들은 공식적인 영웅이기는 했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1950년대 초반에 벌어졌던 스탈린 숙청 작업의 희생자들이 쥐고 있었다. 13년의 세월 동안 감옥과 수용소를 오가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공산주의자 군 간부들은, 구소련에 대한 절대 복종이 일상화돼 있던, 모스크바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활동가들보다 훨씬 더 드세고 거칠었다.
1958년에는 독일민주공화국(RDA)이 수립됐고, 브루노 아피츠의 소설 『늑대들 사이에서 헐벗은 채로』가 13개국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5) 작가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실제로 수감됐던 경험을 바탕으로, 수용소 안에서 사랑받던 3살짜리 폴란드 유대인 아이가 정치범 수감자들에 의해 구조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소설은 동독 출신의 영화감독 프랑크 바이어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돼 1963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장편영화 <8과 1/2>을 제치고 감독상을 수상했다.(6)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아민 뮬러-스탈이 주인공이었다. 영화에 출연한 일부 배우와 단역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이었고, 촬영은 실제 수용소였던 장소에서 이뤄졌다.
한편,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 중 한 명은 영화에 등장하는 ‘부헨발트의 아이’가 자신의 조카임을 알게됐다. 슈테판 예르치 츠바이크의 사연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각색되기는 했지만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인 브루노 아피츠의 소설은, 한 아이의 구조가 수용소 내 공산주의자들의 휴머니즘을 상징한다고 해석되면서 동독의 국민소설로 등극했다. 흔히 그렇듯,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소설이 창작됐다. 아피츠의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이 꾸며졌고, 이는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공산주의 정권에 큰 힘을 실어줬다.
종교는 본래 모순적인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범 수감자들과 친위대 간의 관계, 그리고 수감자들 간의 관계처럼 애매모호한 부분들은 동독의 역사에서 제외됐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 프리모 레비가 인류의 법정에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규정했던 ‘그레이존(Gray zone)’에 대한 평가는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야 제대로 이뤄질 수 있었다.
마치 이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는 듯, 부헨발트 수용소와 부지의 재정비는 냉전 이후 독일의 우선과제들 중 하나로 떠올랐다. ‘Speziallager(특별창고)’의 재정비도 우선과제였는데, 이는 1945년 구소련이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간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가뒀던 수용소로 수감자의 3/4이 아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1999년에, 독일 정부는 완전히 ‘수리되고 리모델링된’ 기념관을 개관했다.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 서독 출신의 역사학자로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의 새로운 관장으로 임명된 볼크하르트 크니게는 과거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영웅이 아닌 희생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역사적 주체 개개인에 주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완벽하게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그저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서만 고려됐다. ‘부헨발트의 아이’인 슈테판 예르치 츠바이크의 구조를 기리는 기념판도 제거됐다. 70대 노인이 된 츠바이크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설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도 이에 대해 분노를 표했으나 기념관 관장의 소신과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안네 프랑크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대표 인물이었던 것처럼 ‘부헨발트의 아이’도 동독 역사의 상징적 인물이 됐지만 결국에는 버려진 셈이다.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에 의하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츠바이크를 포함해 모두 904명이다.
독일 통일 이후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 단체는,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동독의 ‘반파시즘 신화’를 철저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추방된 반파시즘』이라는 책을 출간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는 ‘붉은 삼각형의 감독관’이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서 살아남았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7)
‘공산주의자=나치’ 공식의 일반화
연대와 결속은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타블로이드 지와 유력 언론 매체들은 ‘부헨발트의 아이’와 친위대의 협력자였던 ‘붉은 삼각형의 감독관’ 이야기를 앞다퉈 실었다. ‘공산주의자=나치’라는 공식이 성립돼 널리 퍼졌고, 일부는 동독 정권에 기만당했다고 느꼈다. 나치 강제수용소는 볼셰비즘에 대한 방어작용이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의 논문이 서독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1986년 6월 6일자)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공산주의자와 나치를 동일시하는 인식은 점차 일반화됐다.(8)
또 다른 수용소 생존자인 다비드 루세는 소설 『Les Jours de notre mort 우리의 죽음의 날들』(Éditions du Pavois, 1947)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매일 선택을 강요받았던 정치범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Indignez-vous! 분노하라!』를 쓴 스테판 에셀,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임레 케르테스, 『Le Mort qu’il faut 죽어야 하는 사람』(Gallimard, 2001)의 호르헤 셈프런은 자신들도 츠바이크처럼, 수감자들을 관리하던 ‘붉은 삼각형의 감독관’이 강제이주 목록에서 이름을 지워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털어놓았다. 루세의 책은 단 한 번도 독일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세의 책을 읽지 않고 나치 수용소의 실상을 논하는 것은, 흡사 역사학자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지 않고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를 연구하는 것과 같다. 부헨발트 수용소 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Leitmotive der DDR 동독의 전설’은 동독 ‘신화’가 어떻게 몰락했는지에 관한 전시로, 동독의 정치범들이 저지른 각종 ‘범죄들’이 주요 내용이다. 반나치즘을 내세웠던 동독 정권의 수립자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전체주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와 나치 체제는 결국 같다는 것이 동독 역사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이다.(9)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청산재단(Bundesstiftung zur Aufarbeitung der SED-Diktatur)이 장려하고 자금을 조달하며, 홍보하고 있는 기념정책에 의하면, 반파시즘은 동독의 국교, 반공주의는 서독의 국교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접근법은 본의 아니게 AfD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서독의 극우세력에서 파생된 이 정당은 언론과 과학서적을 통해 동독의 과거사를 한결같이 악마처럼 묘사하면서, 스스로를 공산주의 정권의 희생자, 또는 독재체제의 협력자라 여기는 일부 동독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는 담화들에 반박하려면, 부헨발트 수용소를 둘러싼 진실과 각 주체의 공적을 제대로 가리는 일부터 선행돼야 한다.
글· 소니아 콩브 Sonia Combe
역사학자. 저서로 『Une vie contre une autre. Échange de victime et stratégies de survie dans le camp de Buchenwald 목숨 대 목숨.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의 희생자 맞바꾸기와 생존 전략』, (Fayard, Paris, 2014년)가 있으며, 최신작은 『La Loyauté à tout prix : Les floués du “socialisme réel” 절대 충성 : ‘현실 사회주의’의 속임수』, (Le Bord de l’eau, Lormont, 2019년)이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1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발표한 ‘중동 평화안’은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이 차지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점령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2) <Der Spiegel>, Hambourg, 2020년 1월 23일.
(3) 수감자들은 분류돼 가슴팍에 특정 색깔의 삼각형 패치를 달아야 했다. 정치범들은 붉은색, 일반인들은 녹색이었다.
(4) 프랑스어 번역본: Eugen Kogon, 『L’Enfer organisé. Le système des camps de concentration allemands 조직화된 지옥. 독일 강제수용소의 시스템』, La Jeune Parque, Paris, 1947.
(5) Bruno Apitz, 『Nu parmi les loups 늑대들 사이에서 헐벗은 채로』, Les Éditeurs français réunis, Paris, 1961년.
(6) Bill Niven, 『The Buchenwald Child: Truth, Fiction and Propaganda』, Camden House, Rochester, 2007년.
(7) Lutz Niethammer(지도), 『Der gesäuberte Antifaschismus』, Akademie Verlag GmbH, Berlin, 1994년.
(8)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rankfurt, 1986년 6월 6일.
(9) Carola Haehnel-Mesnard, La RDA dans le (rétro)viseur. Plaidoyer pour une autre perception(백미러로 본 동독. 다른 인식을 변호하다, <Symposium Culture@Kultur>, vol. 2, Berlin-Toulouse, 2020년(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