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지도자에서 혈육의 아버지로

2011-04-08     라시드 케샤나

리비아 봉기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체제 개혁을 위한 잇단 시도와 열렬한 민주 투사들의 용감하고 자주적인 행동이 봉기를 준비해온 것이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장남 사이프 알이슬람은 지난 2월 19일 방송 <알아라비아>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카다피의 지원을 받아 정치체제를 개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 ‘지도자’(Guide·리비아에서는 국가원수를 이렇게 부른다)가 몇몇 반대파를 만나 헌법 개정을 포함한 근본적인 개혁과 자유선거, 새로운 법률 공포 등을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자신이 시도한 개혁이 2008년 실패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1)
알이슬람은 8년 전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개정안 시행 최종 시한을 2008년 9월 1일로 정해놓기까지 했다. 그때 검토한 방안에는 21개 기본법을 공포하는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투자와 형사소송에 관련된 것, 다른 하나는 민사소송과 상업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알이슬람은 이 개혁들이 리비아를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구출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단언했다. 게다가 그는 이 제안에 곁들여 노조, 연합, 동맹, 법률기구, 직업연맹 등 모든 종류의 독자적 기구들이 발전해나갈 수 있는 시민사회 건설을 호소했다. 카다피가 권력을 잡을 때 근거가 된 혁명적·부족적 정당성을 대체할 헌법상의 정당성을 체제에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들은 의회에 제출되지 못했다. 이 제안은 일종의 술책에 불과했고, 진짜 목적은 시간을 벌고 서방세계에 리비아 체제에 대해 더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헌법 문안 작성을 담당한 법관은 자신의 임무가 체제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식 문서들을 취합하는 것이었다고 하면서, ‘지도자’의 사상을 모아놓은 작은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녹서>(Green Paper)를 주로 참고했다고 한다.
 
지도자, 루소에게서 영감을 얻다

이런 지연 과정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카다피 사상의 바탕을 이해해야 한다. ‘리비아 자유장교단’이 1969년 9월 1일 권력을 장악할 때 리비아는 석유와 가스가 풍족했고, 국민 250만 명 가운데 75%가 베두인인 부족사회로 구성됐다. 그중에서 트리폴리·벵가지·미수라타 등 세 도시가 부각됐다. 새 통치자들이 시행한 중요한 변화는 왕정을 철폐하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세워 1973년 3월 열린 의회에서 ‘인민의 권력’을 신성화하는 것이었다. 1972년 이래 제17법은 정치적 다원주의(복수정당제)를 추방하고, 정당 창설을 금지하고 있다. “정당에 가입하는 모든 사람은 배반자”라는 구절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아랍사회주의자동맹(이후 인민위원회운동이 됨)이 체제의 핵심 중추를 구성하고 있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 ‘제3의 길’을 추구한다는 카다피의 주장과 달리 이 동맹은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튀니지의 연구원 타우피크 메스티리는 카다피가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2) 카다피가 리비아에 ‘베두인 지배’(Bedouinocraite)를 이룩하기 위해 루소의 사상(사회계약론의 대의제)을 참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대통령(Guide가 President를 대신함)·정당(행정관청을 이끄는 인민위원회가 정당을 대신함)이 없는 대신 혁명평의회가 운영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런 조직은 완전히 불투명해 구성원이 어떤 절차를 거쳐 임명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카다피는 그의 부족 알카다파로부터 항상 보호받는다. 카다피가 해외여행을 할 때 카이마(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자신이 리비아를 떠나 있어도 자신의 부족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실상 겉치레에 불과한 이런 행동은 카다피를 대통령이 아닌 부족 지도자로 선택해준 베두인들에게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래서 카다피는 매번 그의 직위가 해임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재임 기간에 카다피는 도시 문명에 반기를 들며 아랍주의에서 민족주의와 부족사회로 옮겨갔다. 그는 카이마를 거처로 삼았고 장관들조차 정확한 그의 거처를 모른다. 1977년에 이르러 카다피는, 1967년 권력을 장악한 혁명평의회의 집단지도 체제를 폐지했다. 진보주의적·이슬람주의적·민족주의적 정적들뿐만 아니라 ‘자유장교단’ 시절 자신의 동료들도 하나둘 제거해나갔다.
마가리하족 출신으로 1969년 쿠데타 당시 제2인자인 압데살람 잘루드 소령은 권력에서 축출된 1993년부터 자신의 부족에 돌아가 피신해 있다. 모하메드 네지브 소령과 모크타르 카루이 소령은 1972년 민간 권력이양이 거부되자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혁명평의회에서 사임했다. 그해 모하메드 알 메게리에프 대령은 불분명한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베치르 알후아디와 야우드 함자는 1975년, 오마르 메히치는 1984년 각각 살해당했다. 4반세기 전부터 카다피 진영에서 이탈해 있던 압델 모네임 알후니는 최근 카다피와 화해했으나 지난해 2월 봉기가 일어나자 아랍연맹 리비아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여섯 아들이 측근 대신해

혁명평의회 위원 12명 가운데 민중봉기가 있기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3명뿐이었다. 그나마 아부바크르 유니스 자베르는 반군에 합류했다. 나머지 2명은 쿠일리디 하미디 소령과 무스타파 카루비 장군이다. 세 사람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업무가 맡겨졌다.
점차 카다피의 아들들이 카다피 측근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국방장관 아부바크르 유니스 자베르는 주변 부대들만 지휘하는 반면 훈련이 가장 잘되고 무기를 잘 갖춘 부대들은 카다피의 아들들, 즉 사디·모아티심·모하메드·카미스가 지휘하고 있다.
카다피는 자신의 ‘개방정책’ 실패 이후 지난해 10월 아들 사이프 알이슬람을 ‘인민권력조정자’로 임명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자리는 리비아 의회인 전인민회의, 정부 내각에 해당하는 전인민위원회, 그리고 군대에 해당하는 보안군 같은 권력의 주요 부문을 지휘하는 잠정적인 국가원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은 지난해 4월 트리폴리 외곽에 있는 아부살림교도소 철거와 동시에 이뤄졌다. 교도소 철거는 이곳에서 일어난 만행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한 것으로, 비정부기구들에 따르면 이 교도소에 수감된 정치범 1200명이 1996년 정부군에 의해 학살됐다고 한다. 범죄행위 장소에 대한 수사를 못하도록 교도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이런 질식할 것 같은 정치적 분위기에서 단지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주동자에게 중형이 내려졌다. 열성적인 정치투사 자멜 엘 하지와 그의 동료 프레이 후미드는 2007년 2월에 있었던 보안군과의 격렬한 대치로 사망한 시위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평화시위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로 다른 10명의 피고들과 함께 리비아 국가안보법정에서 각각 12년, 15년형을 언도받았다. 이 법정은 2007년 트리폴리에 파견된 미국 외교관을 접촉했다는 이유로 이드리스 부파예드에게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활동 죄목을 적용해 25년형을 선고했다.
 
혁명을 예고하는 시민사회의 열광

지식인들은 권력 남용과 자유의 부재에 분개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독재자와 비리 경찰관, 권력의 비호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리비아의 부족과 부족주의’라는 주제로 벵가지에서 열린 강연에서, 트리폴리 가르유니스대학 정치학과 아멜 라비디 교수는 “부족이 정치에 지나치게 예속돼 있다”고 비판했다. 1990년대 초, 부족을 공식적인 체제로 승격시키고 정치 파트너로 삼을 목적으로 고안된 ‘인민 사회주의 지침’이 만들어진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국가의 여러 제도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부족의 우려감은 부패, 법률 무시, 국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졌다.
변호사협회 회장 모하메드 아브라힘 알알라구이는 지난해 9월, 인민위원회가 가진 절대권력을 비판하면서 인민위원회에 대한 법률적 통제와 복수정당제 허용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비슷한 시기에 알알라구이는 아랍사회주의동맹 사무총장 모하메드 지브릴(실제적인 내무장관)과 노조, 인민의회의 전문단체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지브릴 사무총장이 시민단체 사무국들의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고발했다. 지난여름 지브릴은 임기가 만료된 지 1년이나 지난 벵가지 변호사협회 신임 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통상적인 모임까지 금지했다.
지난해 9월 10일자 일간지 <오야>에 실린 기사에서 전 외무장관의 딸이기도 한 에자트 카멜 엘 마쿠르는 독립 노조를 창설할 시민권을 주장했다. 그녀는 판사들이 아니라 행정부가 시민단체의 감시·관리감독을 맡도록 하는 2010년 법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고 이전 법보다 더 가혹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에 맞서 리비아 정부는 이해관계를 축으로 때로 분열하고 때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9월 말, 모하메드 라르비 에사리트 기자가 벵가지에서 습격당한 것이 좋은 예다.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으나, 경찰은 그를 경찰서로 데려가 심문했다. 사이프 알이슬람이 맡고 있는 국제카다피재단은 서둘러 휘하 인권단체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이 사건에 보안군의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카다피 일가가 모든 결정기구와 군부 내 전략적 지위를 독식하고, 국민을 감시하며, 언론 통제를 자행하면서 모든 평화적 변화에 문을 걸어 잠근 것이 국민 봉기로 이어진 것이다.

참고 자료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사회적 조처>
· 256억 유로에 달하는 1차 계획 공표. 3월 18일 국왕은 100억여 달러에 달하는 2차 계획을 발표.
(1) 모든 공무원에게 두 달치 상여금 지급 (2) 모든 실업자에게 375유로의 수당 지급 (3) 최저임금을 560유로로 인상 (4) 주택 50만 호 건설을 위한 예산 배분 (5) 건강 분야에 예산 30억 유로 배정.

<정치적 조처>
· 부패방지투쟁위원회 창설.
· 경찰 공무원 6만 명 모집.

바레인
<경제·사회적 조처>
· 주택 프로그램 수혜자들의 융자금 반환 금액의 25% 삭감(3만5800가구).
· 내무부 장관이 일자리 2만 개 창출을 발표하고, 국왕은 가구당 1790유로의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함. 최빈곤 가구들에게 1억2천만 유로 지급됨.
 
<정치적 조처>
·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장관 몇 명을 해임. 실제적 권력을 행사하게 될 의회에 대한 원칙을 받아들임. 표면적인 양보를 받아들이기 거부한 시위대들 앞에서 국왕은 지난 3월 15일 걸프만 협력위원회 국가들의 군대를 불러들이고 계엄령을 선포함. 수많은 반대파 인사들을 체포함.
 
요르단
<경제·사회적 조처>
· 공공 분야 종사자들과 군인들의 급여 인상.
· 공공 분야에서 2만1천 개 일자리 창출함. 그중 6천 개는 경찰과 헌병 업무 일자리.
· 석유와 식료품에 대한 세금 감면.
· 최빈곤 지역 개발 프로젝트에 할당된 예산 확대.
 
<정치적 조처>
· 지난 2월 1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시위대가 사임을 요구한 사미르 리파이를 교체해 총리 자리에 마루프 바키트 임명.

글 · 라시드 케샤나 Rachid Kechana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엘렌 드 게를라슈, ‘리비아가 세계에 연결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 참조.
(2) <유니베르살리스 백과사전>의 ‘카다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