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예술의 세계화, 색깔 버리고 투기상품 전락

2011-04-08     이브 곤잘레키하노

아랍의 현대예술계를 대표하는 시리아 출신 조각가 유세프 압델키는 지난해 6월 레바논 일간지 <알사피르>를 통해 다마스쿠스의 알아이얌 갤러리 소유자인 칼레드 사마위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 과거 사마위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도 말이다.(1) 기사가 나간 뒤 다른 예술가와 비평가, 저널리스트들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냈는데, 상당수가 갤러리 소유주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칼레드 사마위는 젊은 예술인들에게 독점계약을 제의해 이들이 걱정 없이 작품에만 매진할 수 있게 했고, 거의 최초로 이들의 해외 진출이 가능하도록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는 사적인 측면이 개입돼 있지만, 시리아와 이 지역 예술시장의 급격한 민영화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기도 하다. 예술시장 민영화를 통한 새로운 브로커의 출현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재정적 이익을 비롯해 많은 혜택을 받았고, 해외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세프 압델키처럼 일각에서는 평론가, 전시 기획가 및 해외 대형 경매사들과 연계된 갤러리 소유주들이 차지하는 위상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에 의해 예술이 국제시장의 거대한 투기 시스템 안에 귀속됨으로써 아랍예술의 독창성과 전통, 고유성이 위기에 처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시장 민영화로 등장한 브로커

19세기 아랍문화 부흥운동과 함께 등장한 유럽식 회화는 문화예술계에서 독립적 위치를 점해왔다. 문학 작가들은 언어같이 높이 평가된 영역에 관심을 가졌고, 음악이나 영상 분야는 대중을 대상으로 발전했다. 반면 전통적인 미적 형태에서 벗어나 있던 조형 예술가들은 해외 영향에 민감한 도시 엘리트 계층에게 거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또한 이들이 최소한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작품 거래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공공기관이 지급하는 미미한 보조금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공식적인 노선이자 구식이 된 고전주의와 비주류로 치부되거나, 해외 활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예술적으로 훨씬 까다로운 스타일 사이를 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최근까지 아랍예술계에서는 상반되는- 혹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라 볼 수 있을 예술 공무원들과 ‘술룩’이라 부르는 배척받던 예술가들을 볼 수 있었다. 술룩은 고대 아랍 사막을 배회하던 비주류 떠돌이 시인의 정취와 보헤미안풍의 고답파적인 스타일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던 예술가들이다.

오랜 유산과 단절된 현대화

공권력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문화예술의 민영화는 예술의 독점시장 탈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고유한 시간성과 다양성이 함께 깃든 전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해냈다.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이 주도한 이집트의 경제개방화 정책으로 초래된 문화예술계의 변화는 그로부터 25년 뒤 바샤르 알아사드 체제의 경제자유화 정책이 실시된 시리아보다 훨씬 앞섰다. 1989년 카이로에서 최초로 열린 ‘살롱 드 주네스’(Salon de Jeunesse)는 전문가들에게 예술적 전환점이 되었고, 시리아는 2008년 ‘아랍문화의 수도 다마스’라는 슬로건 아래 ‘시리아 회화의 신세대’ 작품전을 열어 이 흐름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시간적 차이가 전체적인 흐름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새로운 예술 관행 등장은 총체적인 단절을 가져왔다. 1950년대부터 추상예술 추종자들과 지역전통 계승을 일부 표방한 사람들 사이에 지속돼온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 대중을 위한 예술이냐’에 대한 논쟁은 예술계를 지탱해온 공공기관들이 뭐라 말할 틈 없이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조형회화 예술가인 파룩 호스니가 1987년부터 문화부 장관을 맡고 있던 이집트에서조차 비디오아트, 설치예술, 개념예술과 같이 분명한 현대 언어를 드러낸 새로운 조형예술의 등장은 비정부 주체들의 영향 덕분이었다. 이런 특징은 시리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2006년 전례 없는 목표와 자원이 뒷받침돼 설립된 알아이얌 갤러리와 아트하우스 갤러리가 한 예이다.

석유 고갈 이후 대비한 국가적 후견

해가 지나면서 예술계에도 신세대가 출현했고, 이들은 다른 현대예술의 흐름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세계 예술의 여러 특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미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아랍 정체성을 유지했다. 이 현상은 특히 음악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아랍문화예술부흥운동기의 ‘해방주의적’ 시각이 쇠퇴하면서 공권력 개입이 약화됐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술계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은 변화의 역동성 속에서 위상 변화와 목표 수정을 거치며 새로운 시기를 맞았다. 독립 직후 짧은 공화국 시기를 거쳐 집권한 걸프 지역의 왕정들은 기존 문화정책 대신 사회·교육적 측면이 부각된 계획을 수립했다. 이 정책은 석유 고갈 이후 시대에 대비하고, 관광 및 고가품 시장 관련 분야 성장을 도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문화 분야에서 대담한 정책으로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아랍에미리트연방의 토호국 샤르자의 통치자가 1993년 연 현대예술 비엔날레가 그런 노선을 보여준 전형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그로부터 10여 년 뒤 수천억 달러를 들여 현대성과 전통성이 어우러진 막대한 규모의 문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아부다비의 사디야트섬에 예술공연장 및 전시공원과 더불어 5개 미술관 건립을 위해 명망 높은 현대 건축가들이 초빙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두바이도 이에 뒤질세라 2007년 걸프 지역 예술박람회를 최초로 열어 새로운 문화적 역동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세계 예술시장계 민간기업들에 문을 개방한 것이다. 라이벌인 아부다비가 정치에 치중한 반면 재정적 부문에 초점을 둔 아랍에미리트연방의 경제수도답게, 두바이는 크리스티를 필두로 국제 브로커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여러 조처를 마련했다. 크리스티는 2005년 두바이에 현지 법인을 수립했다. 이듬해부터 바로 활동을 시작한 크리스티의 매출은 당초 예상한 규모의 4~5배인 1억3800만 유로를 기록했다.(2)
아랍에미리트연방은 판매용 작품, 갤러리 소유주와 큐레이터 및 관련 분야 전문가, 두바이미디어시티가 2005년부터 발행한 <비도운>(Bidoun)이나 <캔버스>(Canvas) 같은 전문잡지 기자들을 끌어당기며 국제적 예술품 거래 시장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덕분에 무엇보다 인도 및 이란계 예술가들과 현대 아랍 회화의 가치가 큰 혜택을 입었다. 1964년 작고한 이집트 출신 예술가 마무드 사이드의 작품은 지난해 4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250만 달러에 가까운 기록적인 가치가 매겨졌다.

부유층 입맛 맞춘 작품 양산

하지만 예술품 수집가와 전문가, 해외 투자자의 관심 덕에 큰 수혜자가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마그레브(서북부 아프리카)와 마슈렉(동부 아프리카)을 비롯한 현대 아랍예술가 전체이다. 2009년 2월 런던의 유명한 ‘사치 갤러리’에서 열린 ‘베일을 벗은 중동의 신예술’이라는 전시회 제목이 보여주듯, 아랍문화와 이슬람적 특성이 복합된 새로운 ‘상품’은 현지 및 아시아 고객이 상당수 포함된 해외 고객에게 인기를 끌었다. 현지 브로커들의 적절한 노력 덕분에 인기는 곧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그간 지역 예술시장의 변화에서 동떨어져 있던 시리아 시장에서도 최근 몇 년간 300~400% 가격이 올랐다. 겨우 몇백 달러에 지나지 않던 작품들이 지금은 5천 달러에서 많게는 1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과거 다른 시대와 다른 경험을 한 예술가들은 이런 변화가 예술 관행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특히 예술계가 근대기의 시대적 여건 때문에 학교나 미술관 같은 자주적인 기관을 중심으로 발달하지 못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변화의 영향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누드화같이 지나치게 대담한 작품들은 갤러리에서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는데, 부유한 현지 고객들의 민감한 반응을 우려한 갤러리들 때문이다. 이보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은 현대 아랍예술이 걸프 지역의 부유한 아랍에미리트연방 브로커들이 장악한 세계시장에 진출하면서 입장료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데 있다. 현대 아랍예술의 세계시장 진출을 가능케 한 국가의 정서에 맞추기 위해 현대 아랍예술은 정치적 색채나 비판적 역할을 포기하고, 단순한 고가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치적 간섭’이라는 위기를 벗어나자마자 더 큰 위기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글 · 이브 곤잘레키하노 Yves Gonzalez-Quijano
프랑스 리옹2대학 근대아랍문학 강의. 지중해 및 중동연구그룹 연구원. 아랍정치 및 문화 블로그(http://cpa.hypotheses.org) 운영.

번역 · 김윤형

<각주>
(1) 1951년 시리아 북부 지역 카미클리에서 태어난 유세프  압델키는 시리아와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치적 소신을 따라 1981년 프랑스에 정착했다가, 2005년 시리아로 돌아갔다. 신문 만평가로도 이름을 알린 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분석 번역본으로 ‘국경 없는 예술? 국제시장 앞의 아랍예술’을 참조할 것. <아랍 정치와 문화>, 2010년 7월 12일.
(2) 매출액은 브룩 앤더슨과 돈 던컨을 인용함. ‘현대 중동’, <월스트리트저널>, 2010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