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전범재판, 누가 누구를 심판하나

2011-04-08     다비드 몽테로

지난 1월, 셰이크 와제드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가 그동안 자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종교계를 상대로 이례적인 맹공에 나섰다.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1979년 개정 헌법을 무효화하라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세계 3위의 무슬림 대국인 방글라데시를 다시 초기 세속주의 국가로 되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이슬람주의 지도자들이 30년 넘게 장악한 국가 제도를 재탈환하겠다는 총리의 의지가 서려 있다. 방글라데시가 세속주의 국가로 회귀함에 따라 단순히 국가 제도만이 아닌, 사회 전체가 변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하시나 총리가 이끄는 중도좌파 성향의 정당 아와미연맹(AL)은 몇 달 전부터 이슬람 강경주의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먼저 이슬람 근본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의 이름이 들어간 공공건물 명칭을 바꾸는 작업에만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또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하도록 한 법률도 폐지했다. 이슬람 조직을 소탕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뭐니뭐니 해도 이번 조처의 압권은 1971년 독립전쟁 때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전범재판소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격변의 이면에는 그늘도 있다. 정의의 이름을 내건 정부 투쟁이 사실상 불법적 양상으로 치닫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정부는 현재 야당 인사, 그 가운데서 특히 당원 1200만 명을 거느린 유력 정당 ‘자마트에 이슬라미’(JeI)(1)의 지도자들을 색출해 가혹하게 처벌하기에 바쁘다. 하시나 총리는 이슬람 세력뿐 아니라 정권에 대적하는 기타 야당 세력의 명줄까지 끊어 놓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유·법치·민주주의의 가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극단적 수단마저 총동원하고 있다.

세속주의로 공세적 전환

다카 최대 빈민가 가운데 한 곳인 미르푸르에 자리한 국립독립박물관은, 깨끗하게 단장된 외관이 빈민가와는 사뭇 대조를 이룬다. 이 박물관에는 1971년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을 기념하고 현 방글라데시 총리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의 기수인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을 기리기 위한 전시물이 있다. AL의 수장이던 무지부르 라만은 동파키스탄 지역을 파키스탄 지도자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여, 세속주의 국가 방글라데시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불과 9개월 만에 파키스탄군은 AL 지도자를 몽땅 제거해버렸다. 일부 역사가는 당시 300만 명의 사망자와 20만 명의 강간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실제 전쟁 피해자 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참혹한 학살이 자행된 것만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살육전에는 파키스탄군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 방글라데시 국민 가운데 수많은 무슬림교도가 이슬람 가치를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무슬림교도나 힌두교도를 무참히 도륙했다.    
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무하마드 아부 사에드는 집단학살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내성적인 40대 남자는 형이 파키스탄군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한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형은 파키스탄군에게 물 한 모금만 마시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간청하는 형의 입에 소변을 갈긴 뒤 무참히 살해해버렸다. 또 다른 증언자인 셰이크 샤리풀 이슬람 바불루는 전쟁의 기억으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당시 15살에 불과했던 그는 목을 베려는 살인자들의 손아귀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그의 목에는 그때 상처가 선연하게 남아 있다.
전쟁 증언자들은 저마다 터져나오는 울분을 삼키지 못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 분노에 가까웠다. 하지만 분노의 칼 끝이 파키스탄군을 겨누는 것은 아니었다. 파키스탄군을 처벌하기 힘들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에드와 바불루는 만행에 참가한 방글라데시인만은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범재판을 통해 가해자를 처벌해야, 비로소 희생자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부정의

이들의 염원은 조만간 실현될 것이다. 정부 고위급 내부에 전범재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의실현에 앞장선 것은 희생자가 아닌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젊은이들은 인터넷에 유포된 전쟁 사진과 동영상, 문서, 증언 등을 통해 방글라데시 역사의 어두운 일면을 알게 됐다. “잔혹한 역사와 마주한 젊은이들은 그것이 집단학살이라는 데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하루빨리 전범자가 만행의 대가를 치르기만 바랄 뿐이다.” 다카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며 1971년 독립전쟁을 주제로 수많은 책을 저술한 임티아즈 아메드 교수가 지적했다.(2)
여론을 의식한 하시나는 전범재판소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덕분에 2008년 총리에 선출됐다. 40년 동안 방글라데시 정부는 전범재판에 미온적으로 대처해오다 지난해 3월 비로소 전범재판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 소식에 전세계 법학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재판이 제대로만 진행된다면, 훌륭한 선례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고질화된 부정부패 문화를 척결하고, 건국 초기부터 나라를 도탄으로 내몬 정쟁의 싹을 자르는 데 분명 보탬이 될 것이다.
전범재판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기에 전범재판소가 전범자를 색출한다는 핑계로 오로지 JeI을 괴롭히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이런 식의 마녀사냥은 현재 방글라데시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카타르시스 효과를 제공하지 못할뿐더러, 방글라데시 사회를 또다시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위험천만한 행위이다.
위풍당당한 모습의 50대 남성 무하마드 카마루자만은 전범 혐의를 받고 있다. Jel의 공식 대변인이기도 한 그는 이슬람이 국교이던 시대를 무척 그리워한다. 지난해 3월 취재차 만났을 때, 그는 아들이 차를 따르는 동안 우리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통계 수치와 역사 자료를 내밀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전범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했다. “1971년 Jel은 방글라데시 독립투쟁에 격렬히 반대했다. 거기에는 정서적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이미 무슬림 국가를 세운다는 종교적 명목을 내세워 인도에서 분리독립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또다시 국가가 둘로 쪼개지는 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그는 한발 물러나 “물론 파키스탄군이 극단주의 성향을 지닌 민병으로 당을 조직한 것은 사실이다. 정작 전쟁 범죄를 자행한 것이 이들 민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덧붙였다.

300만 명 학살… 가해자의 변명

카마루자만이 당시 북부 지역 심문소를 총괄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300명 이상이 그가 지휘하는 심문소에서 고문받거나 처형됐다. 지성계와 사회단체는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Jel에 무조건 집단적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당시 학살에 참여한 전범자가 전부 Jel 진영 사람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재판을 통해 대부분의 만행이 다른 정당 소속 당원이 자행한 것인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7월, 대대적인 카메라 세례 속에 카마루자만은 당 대표를 포함한 간부급 당원들과 함께 전격 체포됐다. 국영방송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방글라데시 국민은 깜짝 놀라며 과연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인지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시계추는 금세 과거를 향해 역행했다. 카마루자만과 동료 이슬람주의 의원들이 소추된 초기, 전범 혐의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1971년 사건과는 무관한 크고 작은 범죄 혐의만 문제시됐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발언이나, 정치 집회 중 지나가는 행인을 살해한 것 등이 거론됐다. 하지만 일단 징역형이 선고되자, 이들에게 전범 혐의가 가중됐다. 부정부패, 자금세탁, 테러 등의 혐의가 줄줄이 따라붙었다.
하시나 총리는 남아시아 최고의 신학자이자 Jel을 창당한 사이드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저술을 금서로 지정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독단주의적 행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전범재판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짙어지고 있다. 아메나 모신 다카대학 국제법 교수는 “재판도 없이 사람들에게 형을 언도할 수는 없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전범재판 자체가 열리지 않을 위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 사이 방글라데시에는 폭력사태의 위험과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Jel 당원과 공권력 사이에 충돌이 잦아지고 있다. 폭발물을 소지해 체포된 이까지 등장했다. 문득 카마루자만의 발언이 단순한 선동이 아닌, 예언임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한편 세속주의 국가 회귀에 관한 판결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11월에는 누군가 대법원장 집 담벼락 너머로 화염병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폭력적 정치 갈등으로 비화

최근 방글라데시는 정치적 이슬람주의를 근절하겠다며 강경 일로로 치닫고 있다. 얼마 전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등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랍국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다. 2008년 총리에 오른 이후 하시나는 민생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과거보다 식량 폭동이 늘어났고, 단수나 단전으로 이미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빈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섬유공장 노동자의 시위 물결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최근 하시나 총리는 주요 표적을 Jel에서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으로 확대했다. 현재 총리의 주요 정적인 BNP 의원들은 정부의 박해와 체포에 시달리고 있다. 두 정당원 사이에 거리 충돌이 잦아지면서, 벌써 45명의 사망자와 2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면, 2007년 AL과 BNP 당원 사이에 벌어진 충돌 사태 때처럼 군부가 개입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3)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방글라데시는 그토록 기대하던 민주사회가 아닌 40년 전 과거로 역행하는 꼴이 되고 만다. 시간이 촉박하다. 나이 먹은 독립전쟁의 증언자들이 하나둘 숨을 거두고 있다. 그와 함께 전범 증거도 사라지고 있다. “하루빨리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전쟁 증언자 바블루가 말했다.

글 · 다비드 몽테로 David Montero
최근작으로는 <파키스탄: 잃어버린 세대>(프론트라인 월드·델리·2010)가 있다.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자마트에 이슬라미’(Jel)당은 방글라데시 최대 이슬람주의 정당이다. 이슬람 강경주의 가치를 수호하며, 선거에 의한 이슬람 국가 설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2) <1971년 집단 학살에 관한 역사화: 국가 대 개인>, The University Press, 다카, 2009.
(3) 당시 군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선거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