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회주의’ 쿠바, 중국으로 가나

2011-04-08     르노 랑베르

쿠바 사람들은 피델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이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3월 22일 그가 이미 5년 전 동생에게 집권 공산당 운영을 맡겼다는 사실도 알았다. 라울은 오는 4월 말로 예정된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경제 실용주의’의 필요성을 언급할 예정이다.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국방장관이던 1994년 당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은 미국의 대포가 아니라 쿠바인들이 먹지 못하는 콩”이라며 쿠바의 구조적인 개혁을 외쳤다. 그가 형의 의견에 반대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1) 피델 카스트로는 식료품 생산을 촉진할 수도 있는 농업시장의 자유화에 반대했다. <<원문 보기>>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쿠바는 ‘평화시대의 특별기간’ 동안 고통을 겪었다. 국내총생산(GDP)이 35%나 곤두박질쳤다. 또 미국이 경제봉쇄를 강화하면서 국민이 영양실조에 허덕였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라울 카스트로는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면 내가 탱크를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그해 말, 농산물 시장이 자유화됐다.

세계경제 위기·태풍 직격탄

16년 뒤, 형에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둘째는(2) 쿠바가 “여전히 특별기간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3) 2008년 쿠바는 세 번에 걸친 태풍으로 기간산업이 초토화되면서 GDP의 20%에 해당하는 10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세계경제 위기로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관광산업과 니켈산업이 붕괴됐다. 더는 부채를 상환할 능력이 없던 쿠바는 해외 투자자들의 자본을 동결하고 수입 중단 조처를 취하며 경제 살리기에 주력한다. 또다시 콩 파동이 일어났고, 2009년 농업 생산이 7.3% 추락한다. 2004∼2010년 쿠바의 곡물 수입 의존도는 50%에서 80%로 늘었다.
라울은 형과의 대화를 단절한 채,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18일, 이듬해 4월에 6차 쿠바 공산당대회를 14년 만에 열겠다고 발표하며 “우리가 상황을 바꿀지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를 토론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런데 무엇을 얼마나 바꾸겠다는 것일까?


국회의장 리카르도 알라르콘이 군데군데 물 샌 자국이 있는 천장과 갈라진 벽, 집기만큼이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말수가 없는 경비가 지키고 있는 방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권력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그가 피델 카스트로의 후임이 될 유력한 2명의 후보자 중 한 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운명이 엇갈린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솔직담백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쿠바혁명이 중단된 것이냐고 묻자, 알라르콘은 “상당 부분 시장과 자본이 개방되겠지만 그건 아니다”라며 “우리는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모든 이가 꿈꾸는 ‘완벽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쿠바가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사회주의다. 시장 메커니즘은 이미 쿠바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손에 빈 장바구니를 든 주부 미리암은 아바나 중심가, 베다도 지역 23번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나서고 있다. 거리 왼쪽 맨 끝에 말레콘 거리가 있다. 7km나 되는 긴 아스팔트 산책로에 면한 건물들은 소금기로 부식되고 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미국의 최남단 플로리다주의 키웨스트가 나온다. 150km가 채 안 되는 곳에 쿠바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끝이 있는 것이다.
미리암은 빨간 신호등이 켜진 바로 옆길을 지나친다. 그녀 눈에는 누더기 차림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아이들이 운전자들에게 라이터나 사탕봉지, 복권을 팔려고 덤비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칼로리 제로’를 내세운 청량음료 광고 포스터도, 샤워 젤의 진한 감미로움을 내세운 광고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쿠바는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 구걸하는 아이들이 없고, 광고판이 없는 섬나라다.
그러나 미리암은 한순간도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쿠바 인구의 70% 이상이 그렇듯이 ‘혁명의 승리’ 이후 세대, 즉 1959년 이후에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쿠바의 고유한 환경(구걸하는 아이들도 없고 광고판도 없는 환경)인 셈이다. 하지만 미리암은 국민이 누리는 ‘사회적 혜택’을 잊지 않고 거론했다. 국가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녀는 그걸 받을 권리가 있다. 교육·건강·스포츠·문화·직장은 물론이고, 내년이면 시행 50주년을 맞는 생필품 배급수첩인 ‘리브레타’ 덕분에 식품까지 제공받고 있다.

식량 자급률 20%대로 폭락

생필품 국영배급소인 보데가에 도착한 미리암은 아홉 칸이 수직으로 배열된 리브레타를 내밀었다. 맨 왼쪽 칸에는 수령할 수 있는 목록이 적혀 있다. 0.80페소짜리 콩 1.2파운드, 0.20페소짜리 식용기름 1.5ℓ, 2페소짜리 탈지유 1kg, 0.15페소짜리 설탕 3파운드, 0.90페소짜리 파스타 400g, 5페소짜리 커피 115g …. 오른쪽에 있는 각 칸은 수첩 소유자에게 지난 8주간 배급된 식품의 할당량이 기록돼 있다.
직원이 “뭘 드릴까요?”라고 묻자, 미리암은 장바구니를 건네며 “쌀”이라고 대답했다. 모든 쿠바인은 5파운드까지는 파운드당 0.25페소로, 추가로 2파운드까지는 파운드당 0.90페소에 구입할 수 있다. 다 합치면 대략 3kg이다. 그녀가 장바구니를 채웠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미리암의 월급은 450페소 정도다. 그녀는 우리에게 “외국인 전용 쿠바 태환화폐(CUC)가 옛 화폐의 24분의 1정도 되니까, CUC로 환산하면 20페소 정도 될까요?”라고 되물었다. 1993년 쿠바 지도부가 ‘경제적인 현실주의’와 타협해 달러를 대체할 태환화폐의 도입을 결정한 뒤, 2004년에 정착시킨 것이 쿠바의 두 번째 화폐인 CUC이다.

거지도 광고판도 없는 유일한 나라

소련 붕괴 이후, 쿠바 당국은 내적인 근본 개혁 없이 외적 부문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역사학자 리처드 고트의 지적처럼 “해외의 자본주의와 쿠바의 사회주의를 동시에 옹호”하려고 했다.(4) 하지만 사방의 틈새로 시장이 개입했다. (미국의 경제 봉쇄로) 투자와 관광길이 막혀 고립된 쿠바는 기존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조달해야 했고, 시장은 달러로 범람했다. 팁과 급여 일부가 달러로 지급되고, 해외 송금도 달러로 받으면서 달러 암시장이 성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쿠바인들에겐 워싱턴의 초상화가 쿠바 화폐에 새겨진 수염을 기른 시에라 마에스트라 혁명군들의 초상화만큼 친근해졌다.
쿠바 당국은 시장의 개입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한 채, 환전소를 개장해 소중한 달러가 국가의 금고로 유입되게 했다. 통화시장이 국가의 금융 주권(전통 페소시장)을 잠식하며 쿠바혁명의 평등주의 윤리를 위협했다. 쿠바 인구 3분의 2만이 달러(그리고 CUC)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최대 4배였던 임금 격차가, 10년 뒤 무려 25배가 치솟았다.(5)
이제 모든 쿠바인은 자신의 페소를 CUC로 환전할 수 있다. 특별법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특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리암은 저울 눈금을 쳐다보며 “국가는 여전히 내게 페소로 봉급을 준다. 멕시코에서 수입한 코카콜라는 1CUC(약 24페소), 아주 평범한 유럽 비누 한 장이 1.5CUC(약 36페소), 오디오는 400CUC(약 9600페소), 컴퓨터는 500CUC(약 1만2천 페소) 정도”라고 했다.
미리암의 장바구니가 가득 찼지만 무겁지 않았다. 기자가 리브레타만 가지고 사는 데 충분한지 묻자, 그녀는 “10~15일까지는 문제없다”고 했다. 보데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미리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 게 더 남아 있고, 게다가 채솟값·교통비·전기료도 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옷도 사야 한다. 패션상품은 포기하더라도 옷을 입기 위해선 종종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예컨대 130페소짜리 바지를 살지, 90페소짜리 티셔츠를 살지, 볼품없는 10페소짜리 반바지를 살지 고민한다.
마탄사스에서 자동차 수리공으로 일하는 란디는 한 달에 350페소를, 산타클라라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는 호세는 대략 250페소를, 시엔푸에고스에서 일하는 젊은 기자 마릴린은 380페소를 번다. 영국 <BBC>의 아바나 특파원 페르난도 라브스베르그는 고위 공무원 월급을 “대략 800페소”로 추정했다. 1989~2009년에 평균임금이 188페소에서 427페소로 올랐지만,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제 가치는 188페소에서 48페소로 추락했다.

생필품 배급제로 보름까지는 든든

외국인 관광객이 유명 호텔 테라스에서 3CUC짜리 맥주 하나를 주문하면 웨이터는 가끔 옆에 따로 감춰둔 자기 맥주를 판다. 1CUC에 사서 3CUC에 파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판 맥주로 자신의 기본급보다 50배를 더 챙기고, 상사에게 ‘뇌물’도 준다.
치과의사가 심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호텔 직원에게 2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더니 ‘해결책’을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오면 5CUC에 치료해주겠다.” 이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자 호텔 직원은 의사에게 “지금 당장 치료해주면 오늘 밤 내가 일하는 호텔 뷔페 식당에서 온 가족이 식사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역제안을 했다.
아파트 매매는 금지됐지만, 일부 가정은 아파트 면적을 늘리거나 축소해 옮겨간다. 중개인들이 불 보듯 뻔한 ‘시장가격’을 토대로 수수료를 챙기며 이런 일들을 진행한다. 꽤 괜찮은 지역인 베다도의 원룸은 1만5천CUC 정도 예상해야 한다.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방 5개짜리 아파트는 8만CUC 정도 한다.
“사회주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는 국가인 쿠바에서, 바닷가재는 관광객용과 수출용으로만 쓸 수 있다. 어부들은 바닷가재를 암시장에 내다팔아 한 달에 700달러 정도를 번다. 인터넷 접근이 허락된 대학교수는 일과 뒤 저녁 시간을 이용해 집에서 온라인 개인교습을 하고, 간호사는 집에서 환자를 돌보고, 버스와 트럭 운전사는 기름을 빼돌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국가를 위해 일하며, 암시장에 펜·의자·도구·건축자재 등을 공급할 기회를 얻고 있다. 일부는 성매매를 한다.
쿠바인들은 몇 해 전부터 자신의 일상인 이중 통화와 주택 및 음식 문제 등을 조율하는 ‘시장 메커니즘’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모든 사람은 이런 공식적인 수사(시장 메커니즘)가 강제하는 상황을 조용히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은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할 때까지 지속됐다. 순박한 면이 있던 카스트로는 2007년 7월 26일 그의 첫 연설 때 “최저임금이 기초생활을 더는 충족하지 못해…, 사회적 규율 위반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그 반대다.
피델 카스트로는 2003년 5월 26일 “진정한 삶의 질은 음식이나 집, 옷보다는 사상에서 나온다”고 천명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국가가 처한 난관, 특히 부패를 퇴치하기 위해 ‘사상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쿠바인, 특히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쿠바의 혁명 이념으로 단련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주유소 경비로 일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반짝 효과를 내지만, 다시금 ‘일탈’이 이들의 의식을 무디게 만든다. 쿠바 정부는 관보를 통해 최근 건설부가 8천 명의 노동자와 석공, 그리고 1만2천 명의 경비원을 고용했다고 발표했다.
라울 카스트로는 2007년 ‘국민 대토론’을 통해, 쿠바인들이 다른 성격의 개혁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결론을 내리게 했을까?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식 발표된 보고서나 종합평가, 혹은 인용된 문건이 전혀 없다. 요컨대 자동차 수리공 란디는 “칼자루를 쥔 쪽은 국가이지 국민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가가 나서서 자영업 권장

우리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회적 역기능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릇되고 비현실적인 우리의 사상”을 제거한 사회주의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긍정적인 자본주의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6) 이런 술책과 요령이 일부 쿠바인을 그렇게 많은 소기업가로 변신시켰을까? 라울은 자영업이 개인의 솔선 의지를 되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지난해 9월부터 매일같이 178개의 직종 목록을 담은 책자가 발간돼 개인이 열람할 수 있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석공, 목수, 전기공, 시계 수리공, 라이터 수리공이나 라이터 기름 충전공 등과 같은 직종은 공식 목록에서 빠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들을 찾고 있다. 알라르콘 국회의장은 그 이유를 “(건물 수리를 책임진) 국영기업을 통해 누수 수리를 하는 것만큼 복장 터지는 일은 없다. 수리를 시작하자마자,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통과의례처럼 누수 전문가인 이웃 주민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이제, 그 이웃이 세금을 낸다. 20CUC가 조금 안 되는 면허등록세, 매출액 25%에 대한 소득세, 소득 25%에 대한 건강보험료, 연간 소득 5천 페소 이상에 대한 중과세(5만 페소나 그 이상의 소득부터는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부가) 등을 내고 있다. 알라르콘 국회의장은 “이제 심지어 자영업자는 다른 쿠바인들을 고용해 그들의 생산성에 따라 급여를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헌법이 이런 형태를 착취라고 규탄하고 있지만, 국세청은 ‘사장’이 된 이웃이 봉급의 25%를 세금으로 내고 있어 아주 좋아한다.
일상은 거의 바뀌지 않은 반면, 연설은 바뀌었다. 1968년 피델 카스트로는 “남에게 의지해 사는 소수민족이… 사지가 멀쩡한 이 게으름뱅이들이 가판대 뒤에 앉아 있거나 일당 50페소를 벌겠다고 소소한 사업을 꾸리고 있다”고 맹비난했다.(7) 이 연설이 있은 지 채 이틀이 되지 않아 바와 식료품 가게, 카센터, 목수, 석공, 배관공 등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지난해 11월, 이런 공식 담론은 변경됐다. 쿠바 공산당 일간지 <그란마>(Granma)는 자영업자를 “선량한 의지로 가득한 기업인”, “윤리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 지칭하며 “이들의 성공은 상당 부분 쿠바 경제 모델의 현대화 성공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8)

대대적 민영화, 실업 사태 예고

1995년만 해도 카스트로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식당의 테이블 수를 12개로 한정해, 돈 벌겠다는 식당업자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15년 뒤, ‘재산 축적’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란마>는 “솔직해지자. 어떤 자영업자가 모든 비용을 제외하고 현재의 월급보다 더 번다고 해서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라고 반문하며, 요컨대 “일상의 서비스 질을 개선하고 고객에게 웃음까지 팔아가며 능력을 발휘해 조금씩 일할 때, 자산이 축적된다”고 했다. 지난 1월 쿠바의 한 가톨릭 잡지는 쿠바가 이제 “재산 축적에 대한 두려움 없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9)
그러나 라울이 이전에 금지됐던 것들을 합법화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 이상 납득할 수 없는 경제 관리의 규칙과 통제를 민영화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쿠바의 최고 지성인 중 한 명인 알프레도 게바라가 전국을 돌며 ‘민영화’를 외치고 있다. 한 예로, 2009년에 수확한 대부분의 토마토가 현장에서 썩었다. 빈 차로 운행하지 말라는 국가의 지침 때문에 트럭들이 현장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토마토를 가까운 공장으로 운반해 토마토 퓌레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기업 정관에는 이런 양상에 대한 처리 규정이 없어 불가능했다.
쿠바 회계사협회의 호르헤 루이스 발데스는 필자에게 “국가가 이발료까지 결정할 필요가 정말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필자가 답변할 틈도 없이 “지난해 4월의 개혁 시행 이전에는, 한 기업이 쿠바의 모든 미용사를 통제했다. 단순히 미용 한 부분만 민영화했는데, 9개월 만에 6억3천만 페소의 경제효과와 6억6천만 페소의 부가소득이 생겼다”고 했다. 발데스는 잠깐 짬을 내 커피로 목을 축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작은 수첩을 꺼내들더니 “지난해 4월 이전의 이발료는 0.8페소였지만, 미용사들은 남성에겐 5~20페소를, 여성에겐 100페소까지 받았다. 국가가 제공하는 전기, 물, 전화는 미용실에 1페소만 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미용사 4명마다 경비원 2명, 청소부 1명, 회계사 1명, 총무 1명, 건물 관리인1~2명 등이 딸려 있었다. 이들 모두 국가로부터 녹을 받았다”고 했다.
발데스가 커피를 마신 뒤, 담배를 깊숙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 때문에 필자가 잔기침을 하자 기침이 잦아들기 기다렸다 말을 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미용사는 자영업자가 되었고, 이들은 국가에 매달 990페소를 내고 있다. 미용실 임대료로 330페소, 건강보험료로 330페소, 노동세로 330페소를 낸다. 이후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발료를 받고 원하는 직원을 뽑아 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용실 규모는 축소됐다.” 현재 인구의 40%가 종사하는 미용사와 임시경비원, 그리고 수직 벽을 타고 오르는 직종 종사자 같은 공공부문은 2020년까지 민간부문으로 전환된다(현재는 인구의 90%가 공공부문에서 일한다). 발데스는 담뱃불을 비벼 끄며 “비용을 줄여 수익을 높이면 국가에 전적으로 이득”이라고 했다.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체 게베라의 이미지보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이미지를 더 부각시키는 나라에서 효율성·생산성·비용절감 등의 담론이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발데스는 “왜 우리가 다른 나라와 달라야 하나? 우리나라도 모든 무상제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필자가 “무상제도요?”하자, 그는 “국가가 출생 때부터 사망 때까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쿠바인에게 무상으로 베풀고 있는 모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가는 엄마가 아니다”

이런 무상제도는 금전적 소득으로 사회복지에 접근할 수 있는 역할을 약화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동기유발을 침식하고 경제발전을 가로막았다. 이제 쿠바의 사회주의는 평등에 대해 말할 때면 거의 빼놓지 않고 ‘평등주의의 일탈’을 규탄한다. 2008년 12월 27일 라울은 무상제도 폐지에 대한 해결책은 “임금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밖의 다른 대안은 없다”고 덧붙였다.
2009년 9월 27일, 쿠바 국무회의 부의장 라미로 발데스는 쿠바인들에게 “국가에 엄마의 역할을 기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10) 국가가 결혼 케이크를 보내고, 신혼여행 때 호텔 숙박료를 지급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아바나에 위치한 4개 정부 부처의 구내식당에서 시행하던 무료배급도 중단됐다. 노동자는 하루에 식사비로 15페소(현재는 충분한 돈이다)를 받는다. 하지만 의회에 제출된 리브레타에 대한 165호 법안이 사회복지 지원 대상을 다른 남미 국가들이 이미 활용 중인 이미지, 즉 ‘꼭 필요한 사람’한테만 주는 걸로 대체하자고 제안해, 어쩌면 곧 리브레타도 사라질 것이다.
한편 쿠바의 유일무이한 노조는 향후 몇 달간 국가의 녹을 먹는 노동자 50만 명을 책임지고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해고 노동자는 일률적으로 1개월치 월급을 받게 되고, 적어도 19년 근속자는 1개월치 월급의 60%를, 26~30년 근속자는 3개월치 월급을, 30년 이상 근속자는 5개월치 월급을 더 받을 것이다.(11) 이는 분명 쿠바 정부가 이들을 신속히 민간부문에 재배치하겠다는 속셈이다.
하지만 정부 부처에서 10년간 근무한 사람이 두 달 만에 농부, 이발사, 석공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그 뒤 그는 아무런 보험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된다. 현재 진행 중인 쿠바 개혁의 정신적 지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경제학자 오마르 에베를레니는 “개혁의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다. 불평등이 상승할 것”이라며 혹독한 말을 던졌다. 그는 “불평등은 이미 존재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평등은 가짜다. 우리가 그것에 종지부를 찍어야 비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 2월 9일 아바나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 병원 노동자들이 의회에 제출할 가이드라인 문건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32장짜리 이 문건엔 291개 제안이 담겼다. 이 중 정당한 월급, 시장가격의 합법화, 사회복지 프로그램 재검토 등과 같은 제안은 모든 쿠바인의 장래와 연관이 있었다. 이들은 이 모든 제안을 단 몇 분 만에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회의 참가자들이 시간을 할애해 각별히 신경 쓴 부분은 쿠바인들의 보건과 교육제도였다. 회의를 진행한 노조위원장은 “바꿔야 한다. 그건 아니다”라는 참가자들의 지적을 열심히 받아적었지만, 정작 이 안건이 어떻게 의회에서 채택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혁이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개혁을 부르다 보면, 궁지에 몰린 쿠바 당국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사회복지 개혁을 구체화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적인 사례, 즉 중국의 경제개방 정책과 프랑스의 공공서비스 부문 개혁 정책이 이런 시나리오를 암시한다. 알라르콘은 낙관적이다. 그는 자신이 의장직을 맡고 있는 국회에서 “야당은 이런 개혁에 당연히 반발해 반대표를 던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정부 세력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1976년 국회가 출범한 이래, 여태까지 정부가 제안한 시책에 적대적인 표가 단 한 표도 없었는데….
<그란마> 2011년 2월 10일자 1면 만평에 야구 모자를 쓴 젊은이가 가로등에 기댄 채 길 가던 나이 든 남성을 불러 세우며 “할아버지, 동전 몇닢만 주세요”라고 구걸하자, 할아버지가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이제 너도 생각을 바꿔 정직하게 일할 시대란다!”라고 응수하는 그림이 실렸다. ‘동전’을 뜻하는 스페인어 캄비오(Cambio)는 ‘변화’라는 말로도 쓰인다.

글 · 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이들이 서로 주고받은 말을 수록한 기록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증언들을 토대로 검증했다.
(2) 2006년 건강 문제로 피텔 카스트로가 물러나자, 2008년 2월 24일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평의회장 대행으로 취임했다.
(3) 2007년 7월 26일 연설 참고.
(4) <Cuba: A new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 2004 참조.
(5) ‘Fidel, the church and capitalism’, <이코노미스트>, 1997년 8월 14일 참조.
(6) 2010년 12월 18일 연설.
(7) 리처드 고트가 <Cuba: A new history>에 인용한 글 참조.
(8) Félix Lopez, ‘Opinion por cuenta propia’, <그란마>, 아바나, 2010년 11월 18일.
(9) Olando Marquez, ‘Sin miedo a la riqueza’, <Palabra Nueva>, 제203호, 아바나, 2011년 1월.
(10) ‘Gobierno pide a los cubanos ‘no esperar que papa Estado venga a resolverles todo’’, noticias24.com, 2009년 9월 27일 참조.
(11) 자네티 하벨, ‘그때 그 쿠바, 이젠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1월호 참조.